한기탁과 회의를 마치고 목장으로 향했다.
그에게 처음으로 계획을 밝혔다.
지금까지 작물을 재배하지 않은 이유는 리스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작물은 씨앗을 뿌린다고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수확을 할 때까지 다양한 변수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내가 목장을 운영한 이유기도 했다. 젖소를 기르고 유제품을 만드는 것은 날씨와 환경의 영향을 덜 받는다.
판매처만 있으면 꾸준히 유제품을 팔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목장 운영이 안정권에 든 지금은 작물에도 도전해 볼 만했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작물을 키울 생각은 없었다. 기후와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고도 작물을 재배할 시설을 만들고 싶었다.
방현식의 사건으로 생각이 굳어졌다.
설민주가 있는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작업실은 연구실을 방불케 했다.
스테인리스 재질의 작업대에 다양한 종류의 펄들이 놓여 있었다.
“이게 다 버블티에 들어가는 펄들인가요?”
“네, 종류가 더 다양해졌어요.”
설민주가 펄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종류가 전보다 훨씬 더 다양했다.
대표 선수인 고구마 펄을 비롯한 현미 펄, 감자 펄, 참깨 펄, 완두콩 펄 별의별 펄들이 있었다.
“이걸 다 언제 만들었나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셨잖아요. 그 뒤로 이렇게 많은 제품이 나왔어요.”
조직 개편의 효과였다.
“펄 안에 들어가는 작물은 어디서 샀나요?”
“대부분이 우리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들이죠. 화개장터에서 산 물건도 있고요.”
내가 재료를 궁금해하자 설민주는 냉장고를 열었다.
그 안에 그녀가 사용하는 농산물들이 있었다.
“버블티 세트 때문에 오신 거죠?”
설민주는 나에게 물었다.
“네, 버블티 세트에 들어갈 물건이 궁금해서 왔어요. 이렇게 다양해질 줄은 몰랐네요. 대단하네요.”
설민주의 표정이 밝았다.
사실 그녀를 찾은 건 버블티에 들어갈 펄 때문은 아니었다.
“민주 씨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민주 씨가 사용하는 재료 중에 직접 재배하고 싶은 작물이 있나요?”
“직접 재배하고 싶은 작물이요?”
설민주는 펄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턱까지 괸 모습이 제법 고민스러운 것 같았다.
“하나만 선택해야 하죠?”
“네, 우선 하나 만요.”
“하나라면...”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펄에 들어가는 재료가 아닌데 괜찮나요?”
“네, 상관없습니다.”
그녀가 펄에 들어가는 재료 중 하나를 말할지 알았다.
어떤 재료가 나올지 기대됐다.
“우리 밀이요.”
“밀가루 말인가요?”
“네.”
“이유가 궁금하네요?”
설민주는 선반 아래 있던 밀가루를 꺼냈다.
“밀가루를 제외하고 전부 국내산이거든요.”
“그렇네요, 밀가루만 수입품이네요.”
“목장 체험할 때 피자를 만드는데 밀가루를 제외하고 전부 국산 재료를 써요.”
“그렇겠네요, 아무래도 국산 밀은 구하기 힘드니까.”
“어렵게 구한다고 해도 가격이 너무 비싸요.”
극소수의 농가만이 우리 밀 농사를 지었다.
수입산 밀가루에 비해서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었다.
“해미도 요즘 빵을 만들어서 밀에 관해서 관심이 있어요.”
“잘 참고하겠습니다.”
“그냥 호기심에 묻는 거 아니죠?”
설민주가 날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네,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에요.”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그럼 밀을 키울 생각도 있는 건가요?”
“네, 상황에 따라서요.”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도 될까요?”
“얼마든 지요.”
“밀을 키운다면 여러모로 좋을 거 같아요. 목장에서 나오는 유제품과 잘 어울릴 거예요. 버터와 우유를 이용해서 빵을 만들 수도 있고 쿠키와 약과까지 가능해요.”
“그러고 보니 약과에도 밀가루가 들어가네요.”
“맞아요, 은근히 많이 들어가요.”
설민주는 과장된 손짓까지 사용했다. 밀 농사를 짓고 싶어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 *
목장을 나오는 길이었다.
방현식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떨렸다.
“형, 제가 벤조피렌이 없는 참기름을 만든 거 같아요.”
실험이 끝나면 나와 함께 연구소를 찾기로 했다.
그가 홀로 연구소를 찾은 건지 궁금했다.
“혹시 연구소에 간 거야?”
“아니요, 연구소는 형이랑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아직 확인 전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알아?”
“형도 와서 오면 알 거예요.”
그는 직접 와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이유로 확신하는지도 궁금했다.
“내가 집으로 갈게.”
“네, 기다리고 있을게요.”
내가 기계를 알아보는 사이, 그는 참기름을 실험하고 있었다.
다양한 조건에서 참기름을 만들어 보는 실험이었다.
참깨를 가열하는 온도와 볶는 시간을 찾아야 했다.
실험이 끝나면 결과물을 연구소로 가져갈 계획이었다.
그중에서 벤조피렌이 검출되지 않는 참기름을 찾으면 해결되는 문제였다.
방현식이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이 며칠 전과 달라 보였다. 얼굴이 핼쑥하고 한쪽 눈자위가 붉게 충혈돼 있었다.
“잠은 제대로 잔 거야?”
“잠잘 시간을 아껴서 참기름을 만들었죠.”
얼굴 상태와 달리 표정이 너무 밝았다.
“제가 만든 참기름이 방 안에 있어요.”
난 그를 쫓아 방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착유기 옆에 참기름 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방안에 참기름 병이 가득했다.
병 안에 소량의 참기름이 담겨 있었다. 병마다 라벨지가 붙어 있었다.
참깨를 볶은 온도와 시간을 상세하게 적었다.
“대체 몇 개를 만든 거야?”
“100개밖에 안 만들었어요. 생각보다 많이 만들진 않았죠?”
방현식이 가진 착유기는 시중에 판매하는 것과 원리가 같았다.
고온 압착으로 기름을 짜는 기계였다. 저온으로 볶은 참깨의 기름을 짜기 위해서는 힘든 과정을 거쳐야 했다.
여러 번 반복해야 간신히 기름을 얻을 수 있었다.
기름 짜는 기계를 따로 제작한 이유였다.
방현식은 밤을 새워가며 참기름을 짰을 것이다.
“고생했네.”
“아니에요.”
난 참기름을 병을 둘러보았다.
“네가 말한 참기름은 어떤 거야?
방현식은 중간에 있는 참기름 병을 들었다.
투명한 병 안에 노란색 기름이 담겨 있었다.
“이게 벤조피렌이 없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참기름을 만들다가 서우영 박사님에게 전화한 적이 있어요. 너무 궁금해서요.”
“뭘 물어봤는데?”
“계속 만들다 보니 보이는 게 있었거든요.”
“뭐가 보였는데?”
“침전물이요.”
“침전물?”
“네, 참기름을 만들 때 생기는 침전물이요. 참깨를 많이 볶으면 볶을수록 침전물이 많이 나와요. 낮은 온도에서 볶으니까 침전물이 적게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침전물과 벤조피렌하고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서우영 박사님에게 그 부분에 대해 여쭤봤어요.”
난 다시 한번 참기름 병을 바라보았다.
침전물이 보이지 않았다.
투명에 가까운 노란색이었다.
“침전물이 없는 참기름은 벤조피렌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했어요. 거의 맞을 거라고.”
방현식이 웃으며 말했다.
난 참기름 병의 뚜껑을 열었다.
보통의 참기름과 냄새가 달랐다.
은은하고 고소한 향이 코끝을 스치는 정도였다.
“향도 괜찮네.”
“그렇죠, 은은하게 고소하죠.”
“연구소에 가서 확인해 볼까?”
“좋아요.”
우린 방에 있는 참기름 병을 전부 차에 실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스스로 일어나는 힘
지리산 농부들의 연구소에 도착했다.
참기름 병을 상자에 넣고 연구소 안으로 옮겼다.
“참기름 병이 몇 개 더 있는 건가요?”
서우영이 기름병들을 보고 물었다. 엄청난 수량에 놀란 얼굴이었다.
“수량이 제법 됩니다.”
방현식은 참깨를 알뜰하게 사용했다. 한 번 실험할 때마다 최소량의 참기름을 짜냈다.
병당 30ml 가량의 참기름이 들어 있었다. 100개의 참기름 병이 연구소 테이블에 놓였다.
서우영은 상자에 든 참기름 병 중 하나를 꺼냈다.
방현식이 실험에 성공했다며 내게 보여준 그 병이었다.
“이건 침전물이 없네요.”
서우영은 참기름 병을 흔들며 말했다.
아무리 흔들어도 침전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방현식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다양한 조건에서 참기름을 만든 것 같네요. 모두 검사를 해보겠습니다.”
“검사 시간이 오래 걸릴까요?”
“최대한 빨리해보죠.”
서우영과 이영호는 참기름 병을 들고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현식과 난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좀 떨리네요.”
방현식이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자신하더니, 연구소에 오니까 떨리나 보네.”
“침전물로 벤조피렌 유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만 들은 거니까요.”
“만약 벤조피렌이 들었으면 어떻게 할 거야?”
“처음부터 다시 해 봐야죠.”
방현식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다.
“내 예상인데 그럴 일은 없을 거 같아.”
“그러면 더 좋고요.”
방현식의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집에 남은 깨는 있어?”
“올해 농사지은 참깨를 거의 다 썼어요.”
실험 때문에 참깨를 다 쓴 상태였다.
“조만간 참깨를 구입하려고 해.”
“누구에게요?”
난 그에게 예천 천진호에 대해서 말했다. 방현식처럼 곶감 교육을 받은 인물이라고 말하자 표정이 밝아졌다.
“참깨 살 때 저도 함께 갈게요.”
그때 연구실 문을 열고 서우영과 이영호가 나왔다. 한 손에 참기름병과 문서를 쥐고 있었다.
“병에 적힌 게 참깨를 볶은 온도와 시간을 나타내는 거죠?”
서우영이 방현식에게 물었다.
“네, 온도와 시간이에요.”
“48도에서 30초 볶은 참깨에선 벤조피렌이 검출되지 않았어요.”
방현식이 두 팔을 들어 만세를 외쳤다. 아이처럼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다른 것들은 어떤가요?”
난 서우영에게 물었다.
“우선 48도 이하로 볶은 참깨에서는 벤조피렌이 거의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볶는 시간이 30초를 넘어가면 미량이지만 벤조피렌이 발견됐고요.”
서우영의 말이 끝나자 바통 넘기듯 이영호가 입을 열었다.
“48도 이상에선 참깨를 볶는 시간과 무관하게 벤조피렌이 검출됐습니다. 아무래도 48도 이하가 벤조피렌이 나오지 않는 온도 같습니다.”
48도에서 30초 볶는다. 그것이 벤조피렌이 나오지 않는 조건이었다.
기름을 짜는 기계에 기본값으로 넣어야 하는 수치였다.
“방현식 씨는 연구자를 해도 잘 하겠어요. 이렇게 많은 데이터를 만들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서우영이 방현식을 보며 말했다.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현식은 두 연구원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수고라니요, 저희가 하는 일인데요. 정말 수고는 방현식 씨가 다 해오신걸요.”
우리는 참기름 병을 다시 차에 실었다.
방현식은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내가 그랬잖아, 결과가 좋을 거라고.”
“형이 예상한 대로 들어맞았어요. 그런데 걱정이 하나 있어요.”
“걱정이라니 말해봐.”
“솔직히 48도 밑으로는 기름을 짜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기름 한 병을 짜기 위해서 보통보다 열 배는 더 힘이 들어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기계의 힘을 빌릴 테니까.”
그에게 기계의 원리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나선형 스크루에 열선까지 달 물건이었다. 볶는 시간까지 단축할 수 있었다.
그 기계라면 혼자 힘으로 많은 양의 참기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기계라면 저온에서도 쉽게 참기름을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참깨 살 때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 형 혼자 가면 안 돼요.”
방현식이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조건 지켜야 하는 약속이라는 눈빛이었다.
“그래, 꼭 같이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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