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내려가는 길에 황유신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곶감 교육을 끝내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하니 반가운 목소리로 만남을 재촉했다.
상주 황유신의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황정아 여사가 날 반겼다.
“덕명 씨 온다고 아까부터 부산을 떨었어요.”
황정아 여사가 웃으며 말했다.
“덕명이 왔구나? 왔으면 어서 들어오지 않고.”
황유신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방안에 다과를 준비해두고 기다리고 계시던 모양이다.
“곶감 교육을 끝내고 찾아뵈려고 했는데 늦었습니다.”
“교육 온 사람들하고 돌아가며 곶감 농사를 지었으니 늦을 수밖에 없지.”
“전부 초보다 보니 함께 힘을 합쳐 같이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도 네 생각이 좋다고 여겼다. 나중에도 또 함께 일할 수도 있는 거고.”
“다들 그렇게 하자고 다짐했습니다.”
“그거 좋구나. 그래, 뭐 특별한 문제는 없었고?”
황유신은 미소를 지으며 묻었다.
“문제가 하나 생기긴 했습니다.”
“문제라니?”
그의 온화하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얼마 전에 하동에 집중호우가 내렸습니다.”
“나도 뉴스는 봤다. 갑자기 비가 내려 이상하다고 여겼지. 혹시 그때 피해를 본 게냐?”
“네, 작업한 곶감이 비에 맞았습니다.”
“저런, 얼마나 피해를 본 거냐?”
“전량 폐기한 상태입니다.”
“어허... 딱한 사정이 됐구나.”
황유신은 갈증을 느꼈는지 물을 벌꺽 마셨다.
“마음이 안 좋았겠구나. 네가 처음으로 교육을 한 사람인데 말이다.”
“네,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제 잘못 같기도 했고요.”
“그게 어찌 네 잘못이겠느냐, 하늘 탓이지.”
하늘의 탓이라는 대목에서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모든 농부들이 겪어야 하는 필연적인 문제였다.
인간은 날씨를 제어할 수 없었다. 농부는 변덕스러운 날씨 앞에서는 속수무책인 것이다.
“피해를 본 청년 농부는 농사가 처음인 사람이냐?”
“네, 올해 처음으로 곶감 농사를 지은 청년입니다. 제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나이가 가장 어린 사람이기도 합니다. 올해 21살입니다.”
“안타깝구나.”
“그 친구가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려고 합니다.”
“기회라니? 무슨 계획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자세하게 말해 보거라.”
황유신이 관심을 보였다. 어떤 일인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그 청년 어머님이 소일거리로 기름을 짜고 있었습니다.”
“기름이라면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말하는 게냐?”
“맞습니다.”
“함께 기름을 짜서 팔아보려고 합니다.”
“좋은 생각 같구나. 한참 깨가 나온 때이기도 하고.”
“그래서 선생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습니다.”
“곶감 쟁이가 기름 짜는 데 무슨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다?”
“선생님이 도움을 주실 수 있는 일입니다.”
“너도 알다시피 난 깨 농사는 짓지 않는다.”
황유신은 큰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나도 그가 깨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선생님에게 교육받은 사람 중에 천진호라는 농부가 있지 않았습니까?”
“예천 천진호를 말하는 것이냐?”
“맞습니다, 예천 천진호 씨 말입니다.”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구나.”
황유신도 그제야 내 뜻을 이해했다.
곶감 교육생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신청서를 받았다.
모든 문서는 내가 먼저 검토했다.
황유신에 곶감 교육을 받을 이들은 모두 기존에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곶감 농사뿐 아니라 다른 농사를 동시에 짓는 이도 있었다.
매실을 키우며 감을 키우는 이도 있었고, 참깨 농사를 지으며 곶감을 만드는 이도 있었다.
천진호는 참깨와 곶감 농사를 했다. 주력은 참깨였다. 곶감으로도 성과를 내기 위해 이번 교육에 신청을 했던 거였다.
“예천은 참깨가 유명하지. 천진호가 참깨 농사를 크게 짓는다고 알고 있다.”
“그분에게 참깨를 사고 싶습니다.”
“나에게 가격을 부탁할 생각이냐?”
“선생님에게 그런 부탁을 드리다니요, 절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부탁이랄 것도 없겠구만, 내 도움이 필요한 이유가 뭐냐?”
“대량으로 사고 싶어서입니다.”
“그렇게 많이 만들 계획이냐?”
“네, 최대한 많이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많이 만드는 거야 문제가 안 되겠지. 하지만 물건이 안 팔릴까 봐 걱정이구나.”
황유신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저에게 계획이 있습니다.”
황유신은 깊게 묻지는 않았다.
계획 있다면 그걸로 됐다며 미소를 지었다. 잘 될 거라고 믿는 표정이었다.
그는 조만간 천진호에게 내 뜻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 * *
긴 일정을 마치고 하동으로 돌아갔다.
아직 남은 일이 하나 더 있었다.
목적지는 지리산 농부들의 매장이었다.
노해미가 상의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매장 영업이 끝난 시간이었다.
노해미 혼자 매장을 지키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아니요, 괜찮아요. 혹시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 저녁 전이에요.”
“제가 그럴 줄 알고 준비한 게 있어요.”
노해미는 주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게 뭔가요?”
“모카빵이에요.”
“혹시 여기서 만든 건가요?”
“네, 매장에서 구운 빵이에요. 목장에서 만든 우유와 버터를 사용했고요.”
그제야 한기탁이 최근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매장에 오븐을 들인다는 말이었다.
사소한 사항이라 자세한 내용은 묻지 않았다.
속으로 김꽃님 할머니가 사용할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약과를 만들고 있었다. 오븐을 사용해 다른 종류의 과자도 만든다고 생각했다.
노해미가 빵을 만들 줄은 몰랐다.
내가 빵을 보고만 있자 노해미가 수줍게 말문을 열었다.
“대표님에게 직접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요, 이야기는 전해 들었어요.”
“맛 좀 보세요.”
모카빵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향긋하고 달콤한 게 맛이 좋았다.
배가 고팠는지 나도 모르게 빵 하나를 뚝딱 해치웠다.
“맛있네요.”
“그렇게 잘 드실 줄 몰랐어요. 하나 더 갖다 드릴까요?”
“네, 하나 더 주세요.”
그녀는 모카빵 두 개를 더 가져왔다.
버블티도 함께 가져왔다.
“해미 씨가 빵 만드는 재주가 있는 줄 몰랐네요.”
난 모카빵을 먹으며 말했다.
“대만에서도 버블티와 빵을 먹었던 거 기억 안 나세요?”
“파인애플 빵 말하는 건가요?”
“네, 파인애플 빵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빵들이 있었잖아요.”
그녀의 말대로 대만 버블티 집에서 다양한 종류의 빵을 맛봤다.
“오븐과 빵 때문에 저를 보자고 한 거군요.”
“아니요, 빵이 아니라 버블티에 관련해서 상의 드릴 게 있어요.”
“버블티요?”
“매장에 유치원생들이 온 날 기억나세요?”
“네, 기억나요.”
곶감 교육생들과 함께 매장을 찾은 날이었다.
초록 모자를 쓴 아이들이 매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유치원에서 요청이 하나 들어왔어요.”
“요청이요?”
“저희 매장의 버블티를 받고 싶다는 요청이에요.”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반응이 좋으면 지속적으로 받고 싶다는 말도 했어요.”
“그래요?”
“그런데 좀 특별한 걸 원해서요.”
“특별한 거요?”
“그게 뭐죠? 궁금하네요.”
난 잠시 마시고 있던 버블티를 바라보았다.
버블티 안에 우리가 개발한 고구마 펄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노해미는 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하면 이런 모습이 될 거 같아요.”
노해미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버블티를 만드는 재료들이 담겨있었다.
고구마 펄부터 우유팩 그리고 우롱차까지 포장이 따로 된 상태였다.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서 먹을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었어요.”
“혹시 그 아이디어는 누가 낸 건지 물어봤나요?”
“아이들이 낸 아이디어라고 들었어요. 직접 만들어서 먹어 보고 싶다고.”
그녀의 말을 듣고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들의 발상이 귀여웠다.
“귀여운 아이디어네요. 한 번 만들어 볼까요?”
노해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의 결과
한기탁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왔다.
사무실은 곶감 예약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아직 곶감이 완성되기 전이었는데도 예약자들이 넘치는 상황이었다.
“기대 이상이야. 곶감 예약자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
한기탁이 예약자 명단을 건네며 말했다.
명단을 확인했다. 작년에 곶감을 구매했던 고객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찾은 고객들이었다.
“올해도 곶감 농사는 풍년이네요.”
“그러게, 곶감 교육생들 물건까지 합치면 물량이 상당할 거 같아.”
한기탁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곶감 교육생 중에 방현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곧 화제를 돌렸다.
“어제 해미 씨 만났다고 들었어. 버블티 세트도 봤다고?”
“네, 봤어요. 아이디어가 귀엽더라고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이들의 상상력이란 참 대단한 거 같아. 덕분에 지리산 농부들의 쇼핑몰도 다양해질 거 같아. 인터넷 쇼핑몰에 버블티 세트도 넣을까 생각 중이야.”
“좋은 생각이네요.”
“설 선물 세트로 만들어 볼 생각이야. 각종 펄에 녹차 종류도 다양하게 해서.”
그는 한참을 버블티 세트에 대해서 말했다. 특별히 수정할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계획대로 상품을 만든다면 좋은 성과가 있을 거 같았다.
신상품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됐을 무렵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아껴뒀던 말을 꺼냈다.
“현식 씨, 일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
한기탁이 물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목소리가 무거웠다.
“잘 진행되고 있어요. 설날 전에는 물건을 팔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해요.”
잘 되고 있다는 말에 한기탁의 표정이 밝아졌다.
내심 걱정하고 있던 모양이다.
“반가운 소식이네. 곶감도 그렇고 참기름도 설 선물도 좋을 거 같아.”
“참기름은 우리 쇼핑몰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팔아볼까 해요.”
“전에 말할 땐 우리 쇼핑몰에서 판매할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나?”
한기탁은 다소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기름은 인터넷보다 홈쇼핑이 어울릴 거 같아서요.”
“홈쇼핑? 나름 괜찮을 것도 같네. 홈쇼핑을 주로 보는 사람들이 주부기도 하니까.”
“네, 선배 말처럼 홈쇼핑을 즐겨보는 사람들은 가정주부들이죠. 참기름을 직접 사용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요.”
“그럼 지리산 농부들의 쇼핑몰에서는 판매하지 않는 건가?”
“홈쇼핑에서 일주일 정도만 판매할 생각이에요. 그 뒤로는 우리 쇼핑몰에서도 판매할 계획이고요. 처음 홈쇼핑에서 물건을 파는 이유는 홍보 목적이 강해요.”
“홍보 목적이라면 홈쇼핑만한 것도 없지.”
처음으로 홈쇼핑을 이용해볼 생각이었다.
지리산 농부들도 팔아야 할 물건이 많았다.
홈쇼핑은 수수료를 내는 만큼, 우리 인력은 많이 들이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었다.
나름의 전략도 세운 상태였다.
“그 일은 무리 없이 진행될 거라고 생각해요. 선배하고는 따로 상의할 일이 있어요.”
“무슨 일?”
“곶감 농사를 겪으면서 목표한 게 있어요.”
“목표라니...?”
“날씨와 무관하게 작물을 키우는 일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지? 날씨와 무관하게 작물을 키우는 게 가능해?”
“참기름 문제로 기계를 알아봤어요. 단순히 참기름을 짤 기계만 알아본 건 아니에요. 작물을 재배할 기반 시설도 함께 알아보는 중이에요.”
“작물을 키우는 시설이라니, 어떤 시설을 말하는 거야?”
한기탁은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볼게요.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사막에서 작물을 재배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떤 시설이 들어가야 할까요?”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평범하게 농사를 지을 수는 없겠지. 특별한 시설이 필요할 거 같은데?”
“제가 생각하는 것도 비슷한 거예요. 날씨와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작물을 재배할 수 있는 시설이죠.”
“대충은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그려지진 않네.”
한기탁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말하는 건 첨단 농업 시설이었다.
아직 한국에서 누구도 손대지 않은 분야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작물을 재배할 생각이야?”
“지리산 농부들의 주력은 목장에서 나오는 유제품이에요. 그것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작물을 재배할 생각이에요. 지금은 아이디어 단계예요. 우선 선배에게만 상의하는 거고요.”
“현식 씨를 돕는 줄만 알았는데, 다른 꿍꿍이가 있던 거네?”
“곶감을 폐기하면서 저도 충격을 받았어요. 동시에 한계도 느꼈고요.”
“나도 마음이 안 좋았어.”
“현식 씨와 약속한 일을 끝내고 시작해볼 생각이에요.”
“목장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작물이라 기대되는데.”
“지리산 농부들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을 거예요.”
내 말에 한기탁의 눈빛이 변했다.
“이건 노파심에 묻는 건데, 처음부터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은 아니겠지?”
“당연하죠, 차근차근 만들어나갈 생각이에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