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현식과 함께 차에 탔다. 지리산 농부들의 연구소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참기름 병이 두 개네요?”
방현식은 종이봉투에 담긴 참기름 병을 보고 물었다.
“하나는 전에 어머니가 주신 거고, 다른 하나는 내가 오늘 방앗간에서 받은 거야.”
그는 참기름 병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형, 솔직히 말해도 돼요?”
“말해.”
“죄송한데,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요.”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기름을 짜기 위해 연구며 실험을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내가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말로 이해할 문제가 아니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연구소에 성분을 검사한 뒤에 계획을 말할 작정이었다.
“한 가지는 말해 줄 수 있어.”
“우리가 만들 참기름은 보통 참기름이 아니야.”
“어떤 참기름을 만드는 건가요?”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참기름.”
“새로운 참기름인가요?”
“맞아, 새로운 참기름.”
“어떻게 만드는 건데요?”
“곧 알게 될 거야.”
우린 하동 농업지원센터에 도착했다.
난 참기름 병을 들고 연구소로 들어갔다.
건강한 참기름을 위한 분석과 실험
연구소에 참기름 성분 검사를 할 것이라고 말해둔 상태였다.
연구원 이영호가 내 손에 있는 종이 가방을 보고 말했다.
“그 안에 든 게 말씀하신 참기름인가요?”
“맞아요. 이거 바로 성분 검사할 수 있나요?”
“네, 준비해 뒀습니다.”
이영호가 참기름이 든 병을 챙겼다.
“저도 함께 검사를 하겠습니다.”
이영호의 옆에 있던 서우영이 말했다. 간단한 실험이라고 생각해, 이영호에게 요청을 해 놓은 상태였다.
이영호도 혼자서 충분하고 말했다. 서우영은 비료의 품질을 높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 일에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다.
“저희 어머님도 매년 참기름을 보내주셔서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서우영이 참기름을 보며 말했다.
“네, 그럼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나와 방현식은 연구소 소파에 앉아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연구소가 이렇게 생겼군요.”
방현식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연구소에 방문한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신기한 모양이었다.
“형, 참기름 안에 별다른 게 있을까요?”
“결과가 나오면 알겠지.”
“형은 뭔가 알고 있는 거죠?”
방현식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지 말고 조금만이라도 알려줘요.”
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의 궁금증을 조금이라도 달래줘야 할 것 같았다.
“발암물질이 있는지 체크하려는 거야.”
“참기름에 발암물질이 있다고요?”
방현식은 깜짝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어떤 물질인데요?”
“그건 결과를 보면 알겠지.”
“솔직히 믿기지 않네요. 우리 집에서 만든 참기름에 발암물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게.”
그때 서우영과 이영호가 참기름을 들고 나왔다.
“생각보다 벤조피렌 함량이 높네요.”
서우영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벤조피렌이 뭔가요?”
방현식이 물었다.
“벤조피렌은 일종의 발암물질입니다. 국제암연구소는 이를 1등급 발암물질로 분류하고 있죠. 인체에 축적될 경우 암과 함께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죠.”
이영호가 방현식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우리 참기름에 그런 나쁜 게 들어있다니 믿을 수 없네요. 우리 집에서 만든 거 말고 방앗간에서 만든 거 말씀하시는 거죠?”
방현식은 애처로운 눈빛으로 물었다.
“아쉽게도 둘 다 벤조피렌이 발견됐습니다.”
서우영은 방현식에게 말했다. 방현식은 실망한 듯 풀이 죽어 있었다.
“벤조피렌은 식품을 가열하는 과정에서 생성되는 물질입니다. 씨앗 형태의 참깨를 기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열을 사용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벤조피렌이 생성된 것 같습니다. 일정 부분 벤조피렌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습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실험을 통해 궁금한 것은 하나였다.
“벤조피렌은 몇 도 이상으로 가열을 하면 발생하는지 알 수 있나요?”
난 서우영에게 물었다.
“조건에 따라 다릅니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100도 이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100도 아래라고 해도 미량이 검출될 수도 있습니다. 정확한 수치는 직접 제조해봐야 알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머진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실험은 여기서 끝인 건가요?”
서우영이 안경테를 만지며 물었다.
“다음번에도 참기름을 가져올 겁니다.”
그제야 그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다음번엔 벤조피렌이 없는 참기름을 가져오시겠군요.”
“네, 그럴 겁니다.”
방현식과 함께 연구소를 나왔다.
* * *
예상했던 것보다 벤조피렌의 수치가 높았다. 최고 수치가 10ppb이라면 참기름에 든 벤조피렌의 수치는 5ppb를 초과했다.
방앗간에서 최신의 기계로 만든 참기름은 7ppb에 가까웠다. 고온 압착의 결과였다.
방현식은 실망한 얼굴이었다. 참기름 안에 발암물질이 있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참기름을 판 사람들에게 미안해서요. 참기름 안에 발암물질이 있는지 정말 몰랐어요.”
방현식의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미안한 얼굴이었다.
“알고 그런 게 아니잖아. 방앗간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형은 어떻게 알았어요?”
방현식은 내 눈을 쳐다보며 물었다. 미래에서 봤다고 말할 순 없었다.
“독일 출장에 유연히 알게 됐어.”
“독일에서요?”
난 그에게 독일에서 벌어진 참기름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다.
교민 중 하나가 참기름을 수입해 팔려고 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독일 식품안전국에서 참기름을 판매를 금지했다. 유해 물질이 과다하게 나온 이유였다.
실제로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우연히 알게 된 일이야.”
“미리 말해주지 그랬어요?”
“말해주면 네가 믿었을까?”
“아니요, 아마도 방방 뛰었겠죠.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방현식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좀 진정이 된 것 같았다.
“이제 내가 말한 참기름이 어떤 건지 알겠지?”
“네, 알 거 같아요.”
“우린 벤조피렌이 나오지 않는 참기름을 만들 거야. 연구소에서 들었던 것처럼, 100도 이하에서 참기름을 만들어야 해. 정확한 온도는 우리가 찾아야 하고. 참깨를 볶는 시간까지도.”
“몇 도의 온도에서 얼마나 볶아야 하는지 알아야겠네요.”
“맞아, 벤조피렌이 나오지 않는 최상의 조건을 찾아야 해.”
“맛도 함께 잡아야겠죠.”
“당연하지, 맛도 함께.”
방현식의 목소리에서 투지가 느껴졌다.
“그 일은 너에게 맡길 생각이야.”
“저 혼자요?”
“맞아, 내가 맡아줬으면 해.”
“그럼... 형은요?”
“네가 그 일을 할 동안 난 기름 짜는 기계를 제작할 계획이야.”
“기름 짜는 기계를 제작한다고요?”
“집에 있는 착유기로는 실험 정도밖에 할 수 없을 거야. 참기름을 팔기 위해선 대량으로 생산할 기계가 필요해.”
“형 말이 맞지만 그런 기계는 비싸지 않나요?”
“그런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괜히 저 때문에...”
“그때도 말했지만 무작정 돕는 거 아니다. 나도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는 일이야. 그만큼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고 믿고 있고.”
“고마워요, 형.”
농사를 처음 시작했을 때 아무것도 없었다. 곶감 살 돈도 없어서 신용거래를 했다.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절대 여기까지 오지 못했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방현식에게도 작은 행운이 필요했다.
함께 잘 되는 일이라고 믿었다.
방현식의 집에 도착했다.
헤어지기 전에 그에게 줘야 할 물건이 있었다. 난 가방에서 물건을 꺼냈다.
“이게 뭔가요?”
“적외선 온도계야.”
방현식은 온도계를 손에 쥐었다. 권총을 닮은 모양으로 쏙 들어가는 크기였다.
“참깨를 볶을 때 온도계를 사용해야 할 거야.”
“그렇잖아도 저도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온도를 어떻게 재야 할지.”
“네가 할 일은 온도를 다르게 해서 참기름을 만드는 일이야. 각기 다른 온도에서 참기름을 제조해야 해. 참깨를 볶은 시간도 확인하고. 그렇게 만든 참기름은 다시 연구소에 가져갈 거야.”
“형이 말한 게 이제야 이해 가네요.”
“무슨 말?”
“연구자의 자세로 일해야 한다고 했던 말이요.”
“맞아, 연구자처럼 일해야 해. 지금까지 참기름을 만든 것과 많이 다를 거야. 꼼꼼하게 기록하고 실험해야 해. 네 말대로 맛도 놓치지 말고.”
“최대한 여러 가지 조건으로 참기름을 만들어 볼게요.”
“좋아, 나도 최상의 기계를 만들어 볼게!”
벤조피렌 0이 목표였다.
참기름을 짤 기계도 필요했다.
* * *
기름을 짜낼 기계가 필요했다.
방앗간에서 기름을 짜는 기계는 규격화된 것이 없었다.
기름 짜는 기계, 착유기, 기름 압착기 등 부르는 이름도 다양했다.
프레스 방식부터 유압식까지 움직이는 방식도 하나가 아니었다.
이름과 방식은 다양했지만, 원리는 하나였다.
참깨 등의 씨앗에 압력을 가해 기름을 짜내는 것이다.
기계가 등장하기 전에는 명주 천에 씨앗을 넣고 절굿공이나 돌로 눌러 기름을 짰다고 한다.
방앗간에 전문으로 기계를 납품하는 공장을 직접 찾아갈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공장 제품은 고온으로 볶음 참깨를 짜는데 맞춰 있었다.
200도가 넘는 고온으로 볶은 참깨는 섬유질이 약해져 기름을 쉽게 짤 수 있었다. 기계도 그것에 맞게 설계된 것이다.
100도 이하로 볶은 참깨는 섬유질이 단단해 일반적인 기계로는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기계보다 더 큰 힘이 필요했다.
고민 중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이장우였다. 군대 동기로, 군 시절 동고동락했던 친구다.
그는 기계공고 출신으로, 기계를 다루는데 능숙했다.
미래의 정밀 업체 사장으로 우수중소기업 표창을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기름 짜는 기계를 맡기기에 적합한 사람이었다.
난 이장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덕명, 이게 얼마 만이야?”
“오랜만이지? 미안, 연락도 자주 못 하고.”
“요새 뭘 하고 지내? 회사 다녀?”
“아니, 나 농사지어.”
“농사?”
놀란 말투였다. 그에게 간략하게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지.”
이장우는 한마디로 정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예나 지금이나 정리 하나는 잘했다.
난 그에게 용건을 말했다.
그는 현재 아버지와 함께 정밀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답했다.
아직 자신의 사업장을 운영하던 시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기름 짜는 기계도 제작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당장 인천으로 갈게.”
“언제든지.”
난 인천으로 달려갔다.
장거리였지만 힘이 났다.
벤조피렌이 없는 참기름을 만들게 되면 곧장 기름을 짤 생각이었다.
기계도 최대한 빨리 완성해야 했다.
인천 기계 거리에 도착했다.
‘인천 정밀’이란 간판 아래 차를 세웠다. 내부로 들어가자 작업복 차림의 이장우가 나타났다.
“이게 얼마만이야! 하나도 안 변했네.”
이장우가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너도 여전하다.”
그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 안이 썰렁했다.
“사람들은 없어?”
“지금은 다 내보내고 아버지랑 둘이 운영 중이야. 최근 일도 많이 떨어졌고.”
그가 믹스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나 보네?”
“돈 받으러 가셨어.”
“돈?”
“기계를 받아 놓고 돈을 주지 않아서. 아버지가 요즘 신경이 날카로우셔.”
“그렇구나.”
“그런데 기름 짜는 기계면 공장 제품도 많을 텐데?”
이장우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기성 제품이 아닌 새로운 게 필요해서.”
“새로운 거? 기름 짜는 건 다 똑같지 않나?”
“똑같지 않아.”
“어떻게 다른데?”
이장우의 얼굴이 호기심 많은 아이로 변했다.
“너도 기름 짜는 기계 본 적 있지?”
“많이 봤지. 직접 만들기도 했고.”
“전부 고온 압착 방식인 것도 알겠네?”
“깨를 볶아야 기름이 잘 나오니까.”
그도 이해하고 있었다. 이해가 빠른 만큼 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건 저온 압착 방식이야.”
“저온 압착?”
“고온에서 볶은 깨가 아니라 낮은 온도에서 볶은 깨를 짜는 기계.”
“낮은 온도에서 볶은 깨라.”
그때였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아버지, 제 친구예요.”
“안녕하세요,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앉아요.”
“아버지 얼굴이 왜 그래요? 일이 잘 안 됐어요.”
“아이고 말 마라.”
일이 잘 안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친구가 웬일로 사무실에 온 거냐?”
이장우의 아버지가 물었다.
“기계를 만들려고 왔어요.”
“무슨 기계?”
“기름 짜는 기계요.”
“그럼 손님이시구나.”
아버지의 얼굴이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 힘이 없어 보이던 중년의 남자였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는 기운이 넘쳐 보였다.
말투도 달라졌다.
“내 이름은 이동춘입니다.”
“네, 아버님.”
“아무리 아들놈 친구라고 해도 고객은 고객이지요. 지금부터 존대를 하겠습니다.”
“네, 편하실 대로 하시죠.”
“어디까지 이야기했나요?”
난 아버지에게도 원하는 기계에 대해 말했다.
“저온 압착이라,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겠습니까?”
두 부자가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들은 왜 저온에서 참깨를 압착하는지 묻지 않았다.
오직 기계만 생각했다. 낮은 온도에서 볶은 깨는 고온일 때보다 더 단단했다.
그들은 단단한 씨앗을 깨고 기름을 짤 수 있는 방법에만 집중했다.
드디어 결론이 난 것 같았다.
이동춘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선형 압착기면 가능할 거 같습니다.”
이름으로도 대강 유추가 가능했다. 스크루를 돌려 기름을 짜겠다는 소리다.
느낌이 좋았다.
“최대한 빨리 만들 수 있을까요?”
“시간과 돈은 하나로 연결돼 있지요.”
이동춘은 제법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견적을 뽑아 주십시오. 일을 착수하는 순간에 대금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기계가 완성된 뒤에 나머지 돈을 드리죠.”
“당장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착수금을 준다는 말에 얼굴이 꽃처럼 피어났다.
하루 만에 기계를 만들 것 같은 기세다.
기술자들
기계 제작에 들어가기 전에 확인할 것들이 있었다.
“나선형 압착기에 대해서, 저에게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동춘은 서랍에서 나사를 하나 꺼냈다.
“이게 나선형 나사입니다.”
나사에 스크루 형태의 돌기가 보였다. 그는 나사를 서서히 돌렸다.
“나선형 형태의 스크루를 제작할 겁니다. 참깨가 기다란 스크루를 통과하며 기름이 나오는 구조가 되겠네요. 저온으로 볶은 참깨라서 단단한 구석이 있습니다. 나선형 스크루가 단단한 참깨를 기름으로 만드는 데 적합할 거 같습니다.”
“좋습니다. 거기에 한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 장치가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기계 안에 열선을 넣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열선으로요.”
“온도가 너무 높지 않다면 가능합니다. 100도 이내로.”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럼 열선을 스크루에 넣어드리면 될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저온으로 볶는 일도 기계가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시중에 판매되는 기계들은 볶은 깨를 넣고 압착하는 역할만 했다.
기계 안에서 고온을 발생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저온 방식이면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상상만 했었는데, 다행히 아버님이 가능하다니 만족스러웠다.
나선형의 스크루가 기름을 짜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참깨를 볶는 일까지 하는 것이다.
“혹시, 다른 요청 사항이 더 있나요?”
“기계에 타이머도 넣고 싶습니다.”
“열을 가하는 시간을 제어하고 싶은 거군요?”
“네.”
“문제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부분은 다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그럼 저도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이동춘이 조용히 물었다.
“말씀하시죠.”
“기계에 들깨와 참깨 말고 다른 것도 넣을 건가요?”
“당장은 아니지만 해바라기씨와 호두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해바라기 씨야 상관없지만 호두는...”
이동춘은 아들 이장우와 눈빛을 교환했다.
호두를 통째로 넣을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호두 기름을 짤 때는 껍질을 제거하고 찌기를 반복합니다. 크기도 작아지죠.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안심이군요. 그런데 호두 기름은 어디다 쓰나요?”
이동춘이 물었다. 이장우도 궁금한 눈치다.
저온에 볶은 참깨를 기계에 넣을 거라고 했을 땐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이들이었다.
호두 기름을 짠다는 말엔 호기심을 보였다.
그들이 궁금할 만도 했다.
2007년인 지금 호두유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방송에 출연한 한의사의 말이 입소문 나면서 사람들에게도 알려졌다.
호두 기름은 어린이와 노인들의 급성폐렴에 특효약이었다.
오랜 기간 기침을 했던 노인이 호두유를 복용하고 나은 사례도 있었다.
효능이 알려지면서 인기를 끌게 되는데, 갑자기 호두유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고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참기름만 짤 생각은 없었다. 다양한 기름을 짜낼 계획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호두 기름을 ‘신의 한 방울’로 부른다고 합니다. 고급 음식이나 약으로 사용하기도 하고요.”
“호두 기름을 쓴다는 말은 처음 들었네요. 아무튼 그 정도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럼, 이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기계를 만들기 위한 준비가 끝났다.
이동춘은 당장 작업 준비를 했다. 그는 기계를 만드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모터 베어링 등 중요한 부품은 이미 구비하고 있었다.
스크루만 완성하면 빠르게 제작이 가능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장우가 날 배웅했다.
“아버지 때문에 불편하진 않았어?”
“아니, 오히려 좋았어. 일 이야기도 잘 통했고.”
“그랬다면 다행이고. 그리고 기계는 걱정하지 마.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나도 꼼꼼하게 챙길 테니까.”
“고마워, 그리고 이건 참고로 묻는 건데. 기계 설비도 가능해?”
“어떤 설비를 말하는 거야?”
“농작물 재배와 관련한 설비들.”
“관수 시설을 말하는 거야?”
“맞아, 물을 대는 시설부터 온도와 습도 제어 설비장치, 뭐 그런 것들.”
“너, 기름만 짜려는 게 아니었구나?”
언젠가는 스마트 팜을 도입할 계획이다.
기계를 만드는 김에 설비에 관한 내용도 문의하고 싶었다.
아직은 스마트 팜의 개념이 생소할 때였다.
이장우도 한참을 고민하는 것 같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기계로 하는 건 뭐든 가능해. 하지만 정확하게 요청해야 할 거야. 우린 농사 지식이 없으니까. 네가 기름 짜는 기계에 관해서 설명했던 것처럼 말이지. 어떤 기능이 필요한지, 어떻게 작동하고 싶은지 설명해 주면 큰 문제는 없을 거 같아.”
“역시, 기술자는 다르구나!”
“기술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그럼 연락 기다릴게.”
기름 짜는 기계 제작 의뢰가 끝났다. 이제 완성된 기계를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그동안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