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탁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생각하고 다르네. 이럴 줄은 몰랐어.”
“박동규 과장님은 최선을 다했을 거예요.”
공무원 조직의 한계였다.
“부산으로 옮길까? 우리 제품을 판매하는 곳들도 많은데.”
“처음으로 매장을 여는데, 하동이 좋지 않을까요? 녹차 농가의 차도 판매할 거고요.”
“나도 하동이 좋지. 그런데 하동 갤러리를 사용할 수 없다면 문제가 달라지니까.”
“선배 말이 맞아요. 하동 갤러리가 우리 매장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다 되는 건 아니잖아. 이럴 땐 차선책을 선택하는 것도 방법이야.”
“그럼 한 번만 더 노력해 볼게요.”
“어떻게 하려고?”
“군수와 직접 만나볼 생각이에요.”
“군수와 만난다고?”
한기탁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 * *
그 시각, 하동군 군수실.
하동군수 김창대는 군청 홈페이지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김창대는 올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그는 나이에 비해 젊은 감각이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특히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데 두려움이 없었다. 컴퓨터를 사용해 인터넷을 사용하는 일도 꾸준히 배우고 있었다.
이 년 전 새롭게 도입된 홈페이지에 군수와의 면담 페이지를 제안한 것도 그였다.
김창대는 출근과 동시에 군수와의 면담 페이지를 살폈다.
2007년인 지금, 농가에서 홈페이지를 자유롭게 들어가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군수와의 면담 페이지를 만들었지만, 이용자는 많지 않았다.
작은 민원이라도 들어오면 기쁜 마음으로 답변을 달았다.
실제로 면담이 이뤄진 경우도 있었다.
마을 회관에서 컴퓨터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었다.
김창대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 뒤로 인터넷을 통해 소통하는 재미를 느꼈다.
매일 아침 군수와의 면담 페이지를 살피는 게 작은 낙이 되었다.
오늘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군수와의 면담 페이지를 클릭했다.
오랜만에 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기대를 하고 클릭했다.
글쓴이는 청년 농부 김덕명이었다.
곶감 농사로 농부의 길로 들어섰다는 소개 글로 시작했다.
김창대는 김덕명이 쓴 글을 끝까지 정독했다.
군수는 청년 농부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다.
그의 전매특허인 독수리 타법이 등장했다.
김창대는 김덕명에게 회신을 보냈다.
지리산 농부의 1호 매장
군청 홈페이지를 열었다. 군수에게 답변이 도착해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회신에 놀랐다.
기대했던 답변이었다.
- 김덕명 씨의 제안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시간이 되실 때 군청에서 한번 만나고 싶군요. 아래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하면 약속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즐거운 만남을 기대합니다.
당장 전화를 걸었다. 이름을 말하자 실무진은 스케줄을 점검하고 시간을 말해주었다.
난 가장 빠른 시간을 선택했다. 점심을 동반한 면담이었다.
군수를 만나기 전에 한기탁과 만났다.
“군수와 면담이 잡혔어요.”
“어? 정말 된 거야?”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번 기회를 잘 살려 볼게요.”
“이건 어제 말한 아이디어를 문서로 정리한 거야.”
한기탁이 문서를 건네며 말했다.
군청의 박동규 과장님에게 연락을 받고 우린 전략을 수정했다.
하동 갤러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할 방안에 대해서 구체적인 방안을 낸 것이다.
몇 가지 아이디어가 나왔다. 우선 지역 특산물들을 하동 갤러리에서 전시하는 아이디어였다.
장지수가 녹차 농가를 취재하고 있었기에 나온 아이디어였다.
녹차 농가를 시작으로 과수와 작물 등 하동의 특산품을 전시할 계획이었다.
단순히 특산품만을 전시하는 게 아니었다. 농부의 이야기가 담긴 글과 함께 전시하는 게 특징이었다.
타지역 농부들과 교류의 장을 여는 내용도 있었다.
화개장터의 특성을 이용한 아이디어였다. 화개장터는 하동, 구례, 산청, 광양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에 있는 곳이었다.
하동 지역의 특산품뿐만 아니라 타지역의 상품도 기획 전시처럼 판매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지역의 농부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협력할 방안도 찾을 수 있어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군수와의 만남은 지역의 오랜 전통을 간직한 한식당에서 이뤄졌다.
이름을 말하자 예약한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아늑한 공간이었다.
얼마 뒤 군수 김창대가 비서실장과 함께 들어왔다.
“김창대라고 합니다.”
“김덕명입니다.”
김창대는 생김새가 동글동글한 중년 남자였다. 후덕하고 인심이 좋아 보였다.
“면담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지역의 발전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요.”
우린 식사를 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녹차 농가들이 협동조합을 만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김덕명 씨가 몸담고 있는 지리산 농부들이 함께한다는 말도 들었고요.”
“네, 말씀대로 협동조합을 구성하는 단계입니다. 지리산 농부들은 조합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습니다.”
“하동 갤러리를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처음엔 좀 놀랐습니다. 하동 갤러리는 원래 지역 예술가를 위해 만든 공간입니다.”
“네, 지역 예술가를 위해 조성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공간을 만든다고 예술가가 나오는 건 아니더군요.”
김창대가 말했다.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 고민이 느껴졌다.
“김덕명 씨의 아이디어를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동 갤러리가 농산물 예술 공간이 될 수 있겠다고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세부적인 내용을 정리해서 가져왔습니다.”
난 그에게 작성한 문서를 건넸다.
김창대는 문서를 받고 꼼꼼하게 살폈다. 비서실장에게도 공유하며 간간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그 사이 식당 직원이 들어와 테이블 정리를 끝냈다.
김창대는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이 낸 아이디어라 그런지 개성이 넘치네요. 지역의 특산물을 전시하는 법도 남다르고요. 녹차 농가의 상품만 전시하는 게 아니라 농부들의 이야기도 함께 전시한다니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농가들의 이야기는 김덕명 씨가 직접 취재하나요?”
“작가분이 취재하고 계십니다.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던 분인데 지금은 에세이 작가로 활동 중이죠.”
“글 쓰는 분도 전문가를 기용하셨다니, 작은 거 하나 어설프게 하는 법이 없군요.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하네요.”
후식으로 마실 차가 나왔다.
김창대는 꼼꼼히 문서를 읽어갔다.
“다른 지역 농부들과 교류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걸까요?”
김창대는 디테일한 내용에 관해서도 궁금해했다. 볼수록 치밀한 구석이 느껴지는 관리자였다.
“제가 알고 있는 농업 기술을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도 나눌 생각입니다. 농부들끼리 농업 기술을 나누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덕명 씨의 농업 기술을 나눈다... 예를 들어 어떤 농업 기술을 나눌 계획인가요?”
“전 하동 대봉감으로 곶감을 만들었습니다. 곶감 기술을 공유하는 일부터 할 계획입니다.”
“그런 기술을 쉽게 알려줘도 되는 건가요?”
“전 기술 교류를 해야 더 좋은 기술이 나온다고 믿습니다. 저에게 곶감 기술을 전수한 선생님도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고요.”
“아, 그렇습니까? 제가 너무 좁게만 생각했군요.”
김창대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김덕명 씨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매력적으로 느껴지네요. 그런데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이곳에 오기 전에 김덕명 씨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년 농부로 우리 지역에서 유명하더군요. 부산 등의 큰 도시에 유제품을 유통하고 있다고도 들었습니다. 서울로 가서 더 크게 사업을 하겠거니 했는데... 이번엔 어떻게 하동에서 일을 벌일 생각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녹차 협동조합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녹차 농부들이 생산한 차들이 한자리에 있는 모습을 그려봤습니다. 판매는 인터넷을 통해 전국적으로 하지만, 녹차의 주 생산지인 이곳 하동에 상징적인 매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군요. 그것 참 좋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지리산 농부들이 새로 개발한 신제품의 반응을 직접 주민들에게서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요.”
“신제품이요?”
“버블티를 신제품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합 사람들의 차와 지리산 농부들의 유제품으로 만든 합작품이죠.”
“버블티라... 그 맛이 궁금해지네요.”
김창대는 상체를 내밀며 궁금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동 갤러리 임대 건은 내 선에서 처리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내부적으로 확인 절차를 거치겠노라 말을 하긴 했지만, 갤러리 운영 건을 준비해도 좋다는 약속을 했다.
그에게 면담을 요청했을 때부터 기대했던 말이었는데, 막상 원하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하동에서 첫 매장을 오픈할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청년들을 위한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 김덕명 씨 같은 청년 농부가 들어오는 건 이상할 게 없죠. 물론 무상은 아니지만요.”
김창대의 말에 우린 함께 웃었다.
“물론 성과에 따라 임대의 조건이나 기간이 달라질 겁니다. 만약 좋은 성과를 낸다면 우리 군도 김덕명 씨와 오랜 시간 함께 갈 수 있을 겁니다. 제 임기가 끝난 뒤에도 말이죠.”
김창대의 말에서 오랜 식견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갤러리에서 농산물을 팔 아이디어는 누가 낸 거죠? 김덕명 씨인가요?”
“네, 제 아이디어였습니다.”
“갤러리를 매장으로 이용할 생각을 어떻게 한 건가요?”
“농산물을 파는 곳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농산물을 파는 곳은 투박하고 수수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니까요. 세련되고 깨끗한 곳이면 좋겠다고 한 생각이 하동 갤러리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그 말엔 저도 적극적으로 동감입니다. 농산물이라고 해서 세련된 공간에서 팔지 말라는 법은 없죠. 좋은 결과를 기대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