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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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이 익어가는 계절이었다. 마지막 꿀을 딸 시기이기도 했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양봉장을 찾았다.

부모님께 양봉장을 맡겨 두고 무심했던 것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벌통을 정리하고 계셨다.

“네가 양봉장에 오다니 별일이구나.”

“죄송해요, 바쁘다는 핑계로 양봉장에 자주 오지도 못하고.”

“네가 바쁜 건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농담으로 해 본 말이다.”

아버지는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런데 손에 든 건 뭐냐?”

어머니가 물었다.

“목장 우유와 하동 녹차로 만든 버블티에요.”

“버블티?”

“한번 드셔보세요.”

난 부모님에게 버블티를 건넸다.

아직 시험 중이었지만 설민주의 고구마 펄을 넣었다.

“안에 이상한 알갱이가 있네?”

어머니가 고구마 펄 맛을 보며 말했다.

“맛이 이상하세요?”

난 조심스럽게 물었다.

“달달한 게 맛은 있구나. 그런데 이게 뭐냐?”

고구마 펄이 씹힌 모양이다.

어머니는 고구마 펄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혹시 이거 고구마로 만든 거냐?”

어머니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네, 고구마로 만들었어요. 어떠세요?”

“쫄깃한 게, 내 입엔 먹을 만하구나.”

어머니는 웃으며 답했다.

“아버지는 어떠세요?”

묻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버블티 컵이 깨끗하게 비비어 있었다.

“벌써 다 드신 거예요?”

“이거 먹을 만하네. 미숫가루처럼 든든하기도 하고.”

어머니도 재미있는지, 크게 웃으셨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난 벌통을 바라보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벌들은 어떤가요?”

“벌들은 항상 열심히 일하지. 이번에도 좋은 결실을 볼 수 있을 거다.”

아버지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벌이 사라지고 난 뒤엔 벌을 돌보는 게 한결 수월해졌지.”

어머니도 벌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동굴에서 가져온 호박 보석 덕이었다.

양봉장에 호박 보석을 걸어둔 이후에 말벌이 보이질 않는 것이다.

처음엔 우리 집 양봉장에만 영향을 미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을까지 영역이 확대됐다.

다른 농가들도 수월하게 벌을 지킬 수 있었다.

“올해도 꿀 농사는 풍년이겠죠?”

“그럴 것 같구나. 벌통에 꿀이 가득 찼으니 말이다.”

* * *

신제품을 위한 준비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하동의 녹차 농가들은 생산자조합으로 뭉칠 예정이었다.

녹차 농가를 시작으로 과수, 곡물, 채소에 이르기까지, 생산자들이 연대를 이루기를 바랐다. 농가들이 힘을 합친다면 어려움이 닥친다고 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시작은 녹차 농가부터였다.

지리산 농부들의 신제품은 하동 녹차 협동조합과 콜라보를 이룰 것이다.

사무실에서 전략 회의가 있었다.

난 목장에서 시제품으로 만든 버블티를 사무실 동료들에게 나눠주었다.

동료들은 고구마로 만든 펄의 맛에 만족하는 얼굴이다.

“이렇게 빨리 만들 줄은 생각도 못 했네.”

한기탁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도 작업 중이에요. 아마 고구마 말고도 다른 재료로 만든 펄도 나올 예정이고요.”

“대단하네요, 우리도 분발해야겠어요.”

한기탁은 동료들은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동료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삼일 뒤에 하동 녹차 농가와 회의가 잡혔습니다. 임시백 선생님이 마련한 자리죠.”

“그때 말한 생산자협동조합 건이겠죠?”

“네, 맞습니다. 우리가 비전을 보인다면 협동조합을 만드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겁니다.”

녹차 농가가 조합을 만들면 여러모로 이점이 많았다.

생산자협동조합의 이름으로 균일한 품질의 제품을 받을 수 있고, 또 유기농 인증도 협동조합 이름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공동으로 홍보와 마케팅을 하여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으니 여러 가지로 이점이 있었다.

“그러면 지리산 농부는 조합과 어떤 관계가 되는 건가? 단순 협력 관계인지 위탁 판매 대행업체인지? 아니면 우리도 조합의 일부가 되는 건지?”

한기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중엔 하나로 뭉치면 좋을 거 같습니다.”

“하나로 뭉친다면 우리도 조합 안으로 들어갈 계획이 있는 건가요?”

“당장은 아니고 적당한 때가 되면 조합의 일원이 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대표님이 말하는 적당한 때는 언제를 말하는 거죠?”

“하동의 모든 농가가 조합원이 되는 순간이죠.”

동료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게 놀랄 일인가요? 작년엔 과수 농가의 과일을 판 경험도 있어요. 녹차 농가들 다음엔 과수 농가도 협동조합으로 만들면 어떨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을의 과수 농가는 지리산 농부들의 벌통을 분양받았으니까요. 녹차 농가들이 지리산 농부들로부터 산양을 분양받은 것처럼.”

그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나하나 협동조합을 만들고 나중에 결성된 협동조합과 지리산 농부도 하나가 된다는 뜻이네요?”

“맞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가요?”

난 동료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힘을 합치는 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에 녹차 농가에서 나온 제품을 팔 전략이 필요하겠지만요.”

백민석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도 지역 기반으로 조직을 갖는 것에 찬성합니다. 그리고 당장 어느 한 조직에 속하지 않는 것도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하고요.”

한기탁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동료들도 찬성의 의사를 밝혔다.

사무실에 있는 동료에게만 물은 건 아니었다.

목장에 있는 동료들과 양봉장에 계신 부모님과도 상의했다.

모두 큰 그림에 동의했다.

당연히 시작이 좋아야 했다.

“협동조합에 대해선 이 정도로 뜻을 공유하는 걸로 하지요. 그럼 본격적으로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안건은 두 개였다.

지리산 농부들이 만든 신제품을 팔 전략과 녹차 농가의 제품을 팔 전략이었다.

신제품에도 녹차가 들어가긴 했지만, 접근 방식이 달랐다.

지리산 농부들이 만든 독특한 상품이었다.

녹차 농가와 구별해서 생각해야 했다.

“농가의 제품은 온라인을 기반으로 팔 생각입니다.”

여러 가지 의견이 오고갔다.

결혼식 이벤트를 다시 이용하자는 의견부터 녹차 밭을 주말농장처럼 분양하자는 아이디어까지.

원하는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난 백민석에게 물었다.

“녹차밭 결혼식 때 신청한 사람들에게 메일 주소를 받았죠?”

“네, 모두 받았습니다.”

백민석은 같은 팀의 천희석과 눈빛을 교환했다.

문제없다는 듯이 천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메일을 대량으로 보낼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까요?”

“대량 메일이요?”

백민석과 천희석이 동시에 반응했다.

2007년인 지금은 이메일 마케팅이 활발하지 않은 때였다.

당연히 대량으로 메일을 보내는 프로그램도 부재했다.

이메일의 마케팅은 단순히 메일을 많이 보내는 것에 있지는 않다.

상품의 홍보를 위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단체로 보낼 수 있어야 했다.

“광고용 이메일을 다수의 수신자에게 발송해주는 프로그램입니다. 일종의 마케팅 프로그램이라고 볼 수 있겠죠.”

“대량 메일발송 프로그램이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백민석이 눈을 번쩍였다.

“일종의 인터넷 전단지라고 볼 수 있겠네요.”

“맞아요, 전단지라고도 볼 수 있죠. 제가 원하는 건 전단지 보다 잡지 개념이에요. 잡지로 광고를 한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요.”

“시간이 좀 필요할 텐데 가능할 거 같아요. 기능을 너무 많이 넣지 않는다면.”

백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회귀 전 기준으로 보면 이메일 마케팅은 이미 한물간 스타일이다. 하지만 2007년인 지금 기준으로는 꽤 신선한 생각이었다.

광고 기획자 시절 자주 썼던 마케팅 기법이기도 했다.

지리산 농부들이 확보한 이메일 주소가 있었다.

대량으로 메일을 보낼 수 있다면 마케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메일 마케팅에 넣을 컨텐츠는 제가 전문가와 상의해 보겠습니다.”

대만여행을 함께 간 장지수와 상의 할 생각이었다.

차와 관련한 에세이로 유명세를 탈 사람이기도 했다.

하동의 녹차 농가에 관한 글을 쓰는 것에도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안건은 신제품에 관한 것이었다.

인터넷 마케팅 때보다 열기가 뜨거웠다. 그만큼 신제품에 거는 기대감이 큰 것 같았다.

“우리 유제품을 받는 매장에 신제품을 공급하면 어떨까요?”

박태호가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차도 끓이고 펄도 만들어야 하는데 매장에서 할 수 있을까?”

한기탁이 물었다.

“그럼 완제품으로 주면 안 되나요?”

모두 생각에 잠겼다.

버블티의 특성상 완제품으로 납품하는 게 매력이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마땅한 해법이 나오지 않았다.

“작게라도 매장을 열어서 판매하면 어떨까요?”

난 동료들에게 물었다.

한국식 버블티는 우리만의 독특한 상품이었다.

매장 납품으로는 진가를 알리기 힘들었다.

작은 매장이라도 우리의 제품을 알리면 좋을 것 같았다.

“맨날 물건만 대주다 보니까 우리가 직접 매장을 할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네.”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매장 하나 없네요. 인터넷으로 물건 팔 생각만 하고.”

백민석이 동의한다는 뜻으로 말했다.

“그럼 다들 찬성하는 건가요?”

“좋습니다. 드디어 우리도 매장이 생기는 거네요!”

한기탁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도 좋습니다.”

모두 기쁜 얼굴로 외쳤다.

지리산 농부들의 특허

농부들이 임시백의 다원으로 모였다. 모두 녹차 밭을 하는 농부들이었다.

처음 마주할 때와 표정이 달랐다. 그들에게 산양을 통해 유기농 기법을 제안했을 때는 의심의 눈으로 날 봤다. 지금은 아니었다.

차밭에서 열린 결혼식 때문이었다.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녹차 농가의 신뢰를 되찾는 일이기도 했다.

그 일 뒤로 사람들이 날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제가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신 이유는 협동조합으로 가는 길을 제안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도 모이기 전에 협동조합과 관련한 이야기를 들은 상태였다.

“임 선생님에게 협동조합과 관련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뭐 조합이야 그전에도 해보려고 했던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판로 개척이 문제라...”

“그렇죠, 판매가 문제입니다. 조합만 만든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요.”

“전에도 판로 문제로 일이 흐지부지됐으니까요.”

농부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판매는 지리산 농부들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난 농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대기업에 납품할 생각인가요?”

농부 중 한 명이 물었다.

대기업이란 말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하동 이외의 지역에선 대기업에 차를 납품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닙니다, 대기업에 납품할 계획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판매를 하는 거죠?”

“인터넷을 통해 판로를 개척할 생각입니다.”

“팔리기만 한다면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인터넷으로 사람들이 녹차를 살까요?”

농부들이 그 말에 동요하는 듯했다. 아직 인터넷을 통해 녹차 등을 사고파는 게 익숙하지 않은 때이기도 했다.

불안해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좋은 물건은 소비자와 만나게 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전 하동의 녹차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인터넷 판매만을 하기보다 더 적극적인 일도 할 생각입니다.”

“그럼 매장도 연다는 말인가요?”

“네, 매장도 열 계획입니다.”

회의 때 나온 아이디어였다.

지리산 농부들의 버블티 매장에서 농부들이 생산한 녹차도 함께 팔자는 제안이었다.

온·오프라인 전략을 다 쓸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난 구석 자리에 있는 노해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녀는 빠르게 움직였다.

미리 준비해둔 음료를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이게 뭔가요?”

농부들이 음료 잔을 들고 물었다.

“지리산 농부들이 만든 신제품입니다. 하동 녹차와 목장 우유를 넣고 만들었습니다. 맛을 한번 보시지요.”

농부들은 버블티를 마셨다. 조심스럽게 먹어보는 사람도 있고, 한 번에 쑥 들이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 안에 이상한 알갱이가 들어 있네요!”

모두 고구마 펄을 씹고 있었다. 표정들이 다양했다.

노해미가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방금 마신 음료는 제가 대만에서 배운 버블티입니다. 알갱이는 고구마로 만든 것입니다.”

“이게 고구마라고요?”

다들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민주가 만든 고구마 펄은 하루가 다르게 개선됐다. 지금 농부들이 먹고 있는 고구마 펄은 거의 완성 단계라고 불러도 좋은 만큼 상태가 양호했다.

쫀득한 맛이 살아 있는 고구마 펄이었다.

“이런 맛도 있다니 신기하네요.”

다원에 모인 농부들은 반응은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다.

“지리산 농부들이 제품화할 버블티에 여러분들이 생산한 찻잎을 사용할 계획입니다. 협동조합이 생산한 녹차도 함께 판매할 거고요.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인터넷을 통한 판매도 병행할 생각입니다.”

“그 정도 계획이라면 우리도 협조해야겠네요.”

모든 농부들이 찬성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여러분께 작은 조건을 하나 걸고 싶습니다.”

“조건이라니 뭔가요?”

“제가 산양을 이용한 유기농 농법을 소개해 드릴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저의 조건은 찻잎을 재배할 때 유기농으로 하는 일입니다.”

“혹시, 무농약도 안 되는 건가요?”

농부 중 하나가 물었다.

친환경 농산물 인증에는 3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는 유기농 인증이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작물을 재배하는 일이다.

둘째는 무농약 인증이다. 농약은 사용하지 않으나 화학비료를 사용해 작물을 재배하는 일을 말한다.

셋째는 저농약 인증이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권장량의 반만 쓴 것을 말한다.

“무농약도 삼가는 조건입니다. 협동조합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여야 합니다. 기본적인 농사 기법도 같은 수준을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산양을 이용하면 좀 더 수월하게 유기농으로 찻잎을 재배할 수 있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하긴, 아직 사람들 중엔 우리가 차밭에 농약을 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농부들 하나가 말했다.

녹차밭 이벤트나 임시백 선생의 ‘황금 미네랄 녹차’가 이슈화되어 하동의 유기농 녹차 재배가 많이 홍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불신하는 소비자가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은 유기농 비료도 개발 중에 있습니다. 돈을 벌 목적으로만 유기농 비료를 개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와 함께 하는 조합원 여러분들께는 원가로 공급할 예정입니다.”

“유기농 비료를 원가로 공급하는 조건이라면 하겠습니다. 자네들은 어떤가?”

찬성한다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찻잎을 재배하는 농부들은 유기농으로 작물을 재배할 것을 약속했다.

난 협동조합에서 나온 제품을 판매하겠다고 약속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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