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나와 노해미는 임시백 선생님을 찾았다.
그는 반가운 얼굴로 우릴 맞았다.
“대만 출장은 잘 다녀온 게냐?”
“네, 선생님 덕에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내 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임시백 선생님이 웃으며 물었다.
노해미는 대만에서 벌어진 여러 가지 일들을 말했다.
랴오판과 벌인 녹차 대결을 말할 땐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대만에서 녹차 대결을 벌였다고?”
임시백 선생은 이야기를 한참 듣다 놀란 듯이 물었다.
그는 대결의 룰에 대해서 다시 물었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룰이라면 대결을 해 볼 수도 있겠지. 나도 책에서만 봤지 직접 본 적은 없다. 한국 사람들은 차로 그런 짓을 벌이지 않으니까. 네가 대만에서 그런 일을 겪을 줄은 생각도 못 했구나.”
“그 투차를 할 때, 대표님이 녹차를 만드는 모습이 임 선생님하고 비슷해 보였어요.”
노해미가 임시백을 보며 말했다.
임시백 선생은 대견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대만에서 돌아오는 길에 작은 선물도 준비했습니다.”
난 대만에서 사 온 선물을 풀었다.
대만 유명 차들과 다기들이었다.
임시백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선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건 뭐냐?”
임시백은 선물 중에서 묘한 물건을 발견했다.
밀봉된 음료였다.
“대만 버블티입니다. 우롱차와 우유로 만든 제품이죠.”
임시백은 신기한 듯 버블티를 들었다.
“이걸 대만에서 들고 온 게냐?”
놀란 눈빛이었다.
“아닙니다.”
“아니라니?”
“오늘 아침에 집에서 만든 겁니다.”
“네가 이걸 만들었다고?”
“네, 한 번 드셔보시지요.”
시험 삼아 만들어 본 제품이었다. 하동 녹차와 목장 우유로 만든 버블티였다.
임시백은 버블티 잔을 들었다. 신기한 듯 요리조리 훑어보았다.
“이걸 어떻게 먹는 거냐?”
“빨대로 드시면 됩니다.”
노해미가 빨대를 건네며 말했다.
“빨대가 크기도 하구나.”
임시백은 밀봉된 뚜껑에 빨대를 꼽았다.
한입에 쭉 빨아들였다.
바닥에 깔린 타피오카가 입안으로 딸려 들어갔다.
“달착지근한 게 맛이 독특하구나.”
잠시 후 표정이 안 좋아졌다.
입을 오물거리더니 손에 뭔가를 뱉어냈다.
“그런데 이게 뭐냐? 밀크티 안에 이물질이 있구나.”
“타피오카 펄이라고 합니다.”
“타피...? 그게 뭐냐?”
“우리 식으로 말하면 떡 같은 겁니다.”
“맛이 아주 고약하구나!”
노해미는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대만식 밀크티를 우리 식으로 개발해 보려고 합니다.”
“그거 생각 잘했다. 이건 아주 몹쓸 맛이야. 특히, 타핀가 뭔가 하는 거는 먹기 힘들구나.”
노해미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나까지도 웃음이 전염됐다.
임시백도 껄껄거렸다.
대만식 버블티를 우리 식으로 바꿀 계획이었다.
그 시작은 타피오카다.
쫀득한 고구마 펄
신상품을 만들기 전에 시음회를 가졌다.
사무실 동료들이 모두 목장으로 모였다. 모두 신제품에 대해 거는 기대가 컸다.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의견을 내보기로 한 것이다.
버블티는 나와 노해미가 직접 만들었다.
랴오판에게 배운 노하우를 활용했다.
종류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동의 우롱차를 넣은 버블티였고 다른 하나는 대만의 우롱차를 넣은 것이었다.
우유는 우리가 직접 생산한 신선한 우유였고, 타피오카는 대만에서 사 온 제품이었다.
모두에게 두 가지 종류의 버블티를 내놓았다.
“마셔보고 소감을 말씀해 주세요.”
난 동료들에게 말했다.
반응들이 엇갈렸다. 버블티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는 말부터 너무 달아서 입맛에 맞지 않는다는 평까지 다양했다.
공통적인 반응도 하나 있었다.
하동에서 생산한 찻잎으로 만든 버블티가 대산만 찻잎으로 만든 것보다 좋다는 것이다.
나 역시 그 부분엔 동의했다.
“그럼 이제 이걸 한 번 마셔보세요.”
노해미에게 손짓을 했다. 그녀는 또 다른 종류의 버블티를 가져왔다.
“이거 같은 거 아닌가요?”
한기탁이 투명한 유리컵에 든 버블티를 보며 말했다.
“보기엔 비슷하지만, 맛은 다를 거예요. 한번 드셔보세요.”
모두 새로 가져온 버블티를 맛보았다.
맛을 본 사람들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그러네요, 맛이 다르네요.”
한기탁이 신기한 듯 유리컵 안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음... 단맛이 달라졌어요!”
설민주가 정답을 외치듯 말했다.
“역시, 민주 씨는 센스가 있네요. 맞아요, 두 번째 제품은 단맛이 달라요. 설탕 대신 꿀을 넣었어요.”
내 말에 모두가 버블티를 한 모금씩 더 마셨다.
“그러네요, 다시 먹어 보니 꿀 향이 느껴지네요.”
김상철이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타피오카 펄의 맛도 좀 다른 것 같아요.”
설민주가 타피오카 맛을 보며 말했다.
“네, 두 번째 버블티의 타피오카 펄은 반죽을 할 때부터 꿀을 넣었어요.”
랴오판의 다원에서 배운 노하우를 응용한 것이었다.
그는 파티오카 반죽에 설탕을 버무렸다.
“뭔가 꿀떡 같은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재미있네요!”
백민석이 타피오카를 씹으며 말했다.
첫 번째 것보다 맛이 더 좋다는 반응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난 노해미에게 사인을 보냈다. 그녀는 그릇을 하나 들고 왔다.
그릇 안에 검은 알갱이가 가득했다.
“타피오카 펄입니다. 카사바라고 불리는 식물의 뿌리에서 추출한 녹말로 만들죠. 흑진주처럼 생겼다고 해서 펄이란 이름도 붙었습니다. 대만 버블티의 핵심 요소이기도 합니다. 전 이 타피오카를 다른 재료로 바꾸고 싶습니다.”
노해미가 동료들에게 접시를 하나씩 내주었다.
“설탕에 절이거나 꿀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타피오카 녹말로만 만든 겁니다. 한 번 드셔보세요.”
동료들은 타피오카 펄을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그냥은 맛이 좀 별로네, 무(無)맛이야 무맛.”
“버블티 안에 들었을 땐 그럭저럭 먹을 만했는데.”
“쫀득거리는 식감이 있긴 하지만 단독으로 먹기는 좀 애매하네요.”
“솔직히 이것만 먹으라면 좀 고역일 거 같아요.”
난 곧 다른 접시를 내놓았다. 역시 타피오카 펄이 있었다.
“이것도 맛 좀 보세요.”
다들 조심스럽게 타피오카를 입에 넣었다. 표정이 처음과 달랐다.
“이건 맛이 좋네요.”
“그러네요, 뭔가 쫀득하면서 좋은 맛이에요.”
“분명 생긴 건 똑같은데 맛이 다르네.”
랴오판이 알려준 레시피로 만든 타피오카였다.
그들의 말대로 맛이 달랐다.
“우리 신제품엔 타피오카 말고 다른 것을 넣으면 어떨까요?”
“다른 거라니요?”
설민주가 타피오카를 꿀꺽 삼키며 물었다.
“우리가 새롭게 해석하는 거죠. 타피오카가 아닌 다른 재료를 사용해서, 예를 들어 고구마는 어떨까요?”
난 동료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버블티의 상징과 같은 타피오카 펄을 한국에서 생산되는 작물로 새롭게 만든다, 재미있는 아이디어네요. 잘 만들면 대박 제품이 나올 수도 있겠어요.”
한기탁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고구마 특유의 맛이 타피오카보다 나을 것 같다는 느낌도 드네요.”
백민석도 의견을 보탰다.
다들 기대감에 찬 얼굴로 타피오카를 바라볼 때였다.
“타피오카도 전분으로 만드는 거니까. 고구마도 가능할 거 같아요. 그런데 고구마가 이렇게 쫀득한 맛이 날까요?”
설민주가 고민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녀다운 질문이었다.
나 역시 시장조사를 하며 수없이 고민했다.
고구마가 타피오카만큼 쫀득할지는 미지수였다.
“저도 그 부분을 고민해 봤습니다. 그러다 작은 실마리를 하나 찾았습니다.”
모두 내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고구마 녹말가루와 찹쌀가루를 섞는 방식입니다. 찹쌀가루를 이용한다면 타피오카보다 쫀득한 식감을 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설민주를 포함한 동료들의 얼굴이 밝게 변했다.
“그런 방식이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타피오카보다 더 쫀득하게 만들 수도 있겠네요.”
설민주가 미소지으며 말했다.
“대만 출장을 그냥 다녀온 게 아니었네요. 좋은 아이디어까지 잘 챙겨서 오셨네요.”
한기탁의 말에 동료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우선 가명으로 고구마 펄이라고 이름 짓죠. 고구마 펄 개발은 신제품 개발을 맡은 저와 노해미 씨, 그리고 설민주 씨도 함께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민주 씨도 괜찮으시죠?”
“안 시켜주면 부탁이라도 할 판이었어요.”
설민주는 당장이라도 고구마 펄을 만들고 싶은 얼굴이었다.
대만에서 버블티를 먹을 때마다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타피오카를 한국식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작물로 타피오카보다 좋은 맛을 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작물을 고민하다 고구마를 떠올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느꼈다.
‘하동에서 생산한 차, 목장의 우유, 양봉으로 얻은 꿀 그리고 고구마로 만든 펄을 하나로 합쳐 한국식 버블티를 만든다.’
대만 출장이 끝났을 때 정리한 생각이었다.
사무실 동료들은 모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노해미와 설민주는 목장 안에 있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난 설민주에게 버블티를 만드는 법부터 알려 주었다.
차가운 차를 이용해 버블티를 만드는 법부터 뜨거운 차로 만드는 법까지 알고 있는 모든 기술을 선보였다.
그녀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노하우를 빨아들였다.
랴오판에게 배운 노하우도 공유했다.
우린 당장 고구마 전분과 찹쌀가루를 이용해 고구마 펄을 만들어 보았다.
타피오카 펄과 모양이 비슷하게 나왔다.
“우와! 이렇게 쉽게 나올지 몰랐어요.”
노해미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그녀의 말대로 모양은 그럴싸해 보였다.
우린 처음으로 만든 고구마 펄의 맛을 보았다.
“보기와 달리 탄성이 하나도 없네요.”
노해미가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캉말캉한 느낌에 입에서 쉽게 녹아 내렸다. 탄성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한 가지 긍정적인 사실은 타피오카와 달리 맛이 좋다는 것뿐이었다.
“다시 한번 해보죠.”
우린 의지에 불타 있었다. 벌써 3시간이 넘게 실험을 반복했다.
“이번에도 아닌 것 같은데요.”
이상한 일이었다. 어떤 비율로 고구마 펄을 만들어도 탄성이 생기지 않았다.
“저에게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
설민주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기분이 들어서요. 이럴 땐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빠를 수도 있어요.”
설민주가 눈을 힘을 주고 말했다. 자신에게 맡겨 달라는 눈빛이었다.
“저는 그렇다고 해도 해미 씨가 옆에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난 노해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민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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