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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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차(斗茶)의 룰

투차(斗茶).

말 그대로 차를 두고 겨루는 일이다.

랴오판이 투차의 룰을 설명했다.

“투차의 방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방식은 같은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 차의 품질을 놓고 겨루는 형태고, 두 번째 방식은 차의 맛을 보고 어떤 지역에서 난 차인지 맞추는 일이죠. 두 번째 방식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일이니, 첫 번째 방식으로 투차를 진행할까 합니다. 문제없으신가요?”

“좋습니다.”

랴오판의 입에서 투차라는 말이 나왔을 때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외국인과 차를 놓고 경합을 벌인다는 것이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그런데 차의 품질이 좋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죠? 차의 맛과 향은 개인차가 있지 않나요?”

“김덕명 씨의 말씀대로 차의 맛과 향은 입맛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투차의 룰이 존재합니다.”

점심을 먹었던 식탁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랴오판은 다기와 찻잎이 든 병을 가져왔다.

“우리 다원에서 만든 문산포종차입니다. 포종이란 이름은 궁정에 헌상된 차가 향이 날아가지 않도록 2장의 사각 종이에 포장한 데서 유래했죠. 건조한 찻잎은 짙은 에메랄드 녹색을 띠죠. 뜨거운 물에 우리면 색이 진하게 변합니다.”

그는 다기에 찻잎을 넣고 차를 만들었다. 투명한 색의 다기였다. 에메랄드색의 찻잎이 진한 초록으로 변했다.

“우려 나온 차의 빛깔을 보십시오.”

찻잔에 담긴 차의 빛깔은 연 노란색에 가까웠다. 탁하지 않고 맑았다.

“승부를 가르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찻잎을 뜨거운 물에 부었을 때 색이 변하는 속도입니다. 색이 최대한 천천히 변할수록 우세합니다.”

“색이 변하는 속도가 녹차의 품질과 관련이 있나요?”

가만히 듣고 있던 노해미가 물었다.

충분한 관련이 있었다. 색이 변하는 것은 찻잎을 비비는 것과 연관이 있다. 찻잎을 비비는 과정에서 조직이 파괴된다. 적당히 조직이 파괴돼야 차 성분이 잘 우러나는 것이다.

임시백 선생님이 만든 차도 변화의 속도가 느렸다. 그는 손으로 찻잎을 비비는 과정에서 강한 힘을 주지 않았다. 손가락 사이에 진액이 나와 엉겨 붙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은 찻잎이 변화는 속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진 않았다.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방식입니다. 전 그 방식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랴오판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도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남은 하나는 뭔가요?”

“변화가 끝난 이후의 차의 빛깔입니다. 순백에 가까운 쪽이 이기는 겁니다. 예로부터 순백에 가까운 차를 명차라고 불렀습니다.”

랴오판은 노해미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해미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순백에 가깝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마 속으로 맹물을 가져오면 이기겠네요, 라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완성한 찻잎을 뜨거운 물에 우리면 고유의 색을 띠게 된다. 비슷해 보이지만 종류와 만든 방식에 따라 전부 다르다.

청색, 황색, 녹색, 노란색 등 다양한 빛깔을 가진다. 순백의 색을 가질 순 없다. 맑은 순백의 액체는 맹물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랴오판이 말하는 순백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색이 탁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했다. 차의 색깔은 찻잎을 덖는 것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덖은 찻잎은 맑고 고운 빛깔을 갖지만, 불 조절에 실패한 찻잎을 물에 우리면 탁한 빛깔이 나온다.

“이 정도면 설명은 충분하겠지요?”

랴오판이 나를 보며 물었다. 부당한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재미난 대결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차를 만들 장비들을 볼 수 있을까요?”

“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모든 사용해도 좋습니다.”

랴오판은 다원과 떨어진 곳에 있는 통나무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부터 우리 다원이 시작됐죠. 지금은 수제 차를 만드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수제 차를 만들 수 있는 기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차를 덖는 솥부터 찜기까지 소량 제작이 가능한 기구들이었다.

“찻잎은 우리 다원에서 채엽한 잎을 쓰겠습니다. 뭐 이것밖에 사용할 것도 없긴 합니다만.”

랴오판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농담으로 한 말 같았다. 웃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더 필요한 건 없나요?”

장비를 들을 점검할 때 랴오판이 물었다.

“왕골 돗자리가 필요합니다.”

랴오판은 전화를 걸었다. 누군가에게 지시하는 것 같았다. 곧 한 남자가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 왕골 돗자리가 있었다.

“이거면 되겠습니까?”

“네, 충분합니다.”

준비가 끝나자 랴오판은 앞치마를 둘렀다. 승부욕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저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네, 시작하죠.”

우린 동시에 녹차를 만들었다. 우롱차나 홍차는 산화 과정을 거쳐야 해서 하루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빠른 대결을 위해 녹차를 선택했다.

녹차를 만드는 과정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찻잎을 덖고, 비비고, 말린다.

초벌 덖음이 차의 승패를 가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쇠솥에 찻잎을 덖었다.

타지 않게 고르게 덖어야 했다. 세심한 온도 조절도 필요했다.

처음엔 센 불에 찻잎을 덖다가 점점 온도를 낮춰져야 한다.

찻잎을 덖을 때 미세한 차이로 향이 달라진다. 냄새를 통해 온도를 낮출 타이밍을 잡아야 했다.

난 대나무 가지를 묶어 만든 솔로 찻잎을 뒤집었다.

최대한 신중하게 차를 덖었다.

노해미와 장지수는 손에 땀을 쥐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만 봐도 어떤 마음이 알 수 있었다.

랴오판도 신중하게 차를 덖었다. 그는 찜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나처럼 무쇠솥으로 찻잎을 덖었다.

거의 동시에 덖는 작업이 끝났다.

덖은 찻잎을 비벼야 했다.

난 왕골 돗자리를 이용해 찻잎을 비볐다. 왕골 돗자리는 임시백 선생님이 강조하던 물건이었다.

그는 멍석 등을 이용해 찻잎을 비비는 일을 끔찍이 싫어했다. 찻잎에 불순한 냄새가 스며들기 때문이었다.

난 임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찻잎을 비볐다.

랴오판은 왕골 돗자리가 아닌 커다란 나무판 위에서 차를 비볐다.

이곳과 함께 세월을 보낸 물건 같았다.

비비기가 끝나고 이제 말리는 일만이 남았다.

랴오판도 찻잎을 비비는 일을 끝냈다.

“김덕명 씨는 손이 빠르시네요.”

랴오판이 날 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모든 과정에서 내가 조금씩 빨랐다.

머릿속에서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다.

시간도 중요한 부분이었다.

차를 덖는 시간은 4분 30초 이내에 끝내야 했다. 최대 5분이었다. 그 이상 덖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찻잎을 비비는 일도 7분 안에 끝내야 했다. 진물이 나와 엉겨 붙기 전에 마쳐야 했다.

“찻잎을 바람에 말리는 동안 잠시 쉬죠.”

“그러죠.”

찻잎을 말리고 허리를 폈다.

노해미가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니요, 신기해서요.”

“뭐가요?”

“임시백 선생님을 보는 줄 알았어요.”

노해미는 웃으며 말했다. 반면 장지수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난처한 일에 휘말린 것 같아서.”

“전 괜찮습니다.”

장지수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대만의 차 문화와 랴오판이 운영하는 차밭을 소개하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투차에 끼어들게 만드는 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내가 입을 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랴오판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원한 거 한잔 마시죠.”

그의 손에 음료수가 있었다.

“버블티네요.”

노해미가 밀봉된 음료를 들고 말했다.

“저희 다원에서 만든 홍차로 만든 버블티입니다. 타이페이시에 직영매장도 있습니다.”

시내에서 같은 문양의 상표를 본 게 떠올랐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랴오판은 다원에서 나온 찻잎을 수출하고 있다고 했다. 매장을 열어 버블티도 판매하다니 가족 기업치고는 규모가 상당한 듯 보였다.

다른 버블티와 달리 독특한 꽃 향이 났다.

“맛은 좋네요.”

노해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맛은 인정하지만 기분은 별로라는 얼굴이었다.

“밀크티는 중국이 아닌 서양에서 나왔죠. 혹시 아편전쟁이 홍차 때문에 일어난 사실 아십니까?”

랴오판이 날 보며 물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영국 사람들의 홍차 사랑 때문이었죠.”

“역시, 김덕명 씨도 알고 계셨군요.”

영국와 중국의 무역 중에 홍차가 차지하는 부분이 엄청났다.

영국 사람들은 홍차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란 말이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나올 정도였다.

그때 당시 영국 사람들은 홍차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홍차 대금으로 은을 받았다. 오로지 은만이 교환의 대상이었다.

홍차를 워낙 많이 수입하느라 영국에서 은이 동날 수준에 이르렀다. 동난 은을 되찾기 위해 팔기 시작한 것이 아편이었다. 이것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홍차가 아편전쟁의 숨은 원인이었다.

그와 나도 작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찻잎이 거의 다 말랐겠네요.”

노해미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찻잎이 바람에 충분히 말랐다.

우린 바람에 말린 찻잎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솥에서 수분을 제거하는 일만이 남았다.

100도를 넘기지 않는 온도에서 25분가량 말려주면 차가 완성된다.

원래는 말린 차를 조용히 잠재우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

임시백 선생님은 온돌방에 찻잎을 널었다. 그렇게 안정시켜주는 작업까지 해야 완전히 끝나는 것이다.

랴오판과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린 빠른 승부를 위해 그 작업을 생략했다.

난 대나무 솔로 찻잎을 천천히 저었다.

차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노해미와 장지수도 차의 향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차가 완성됐다.

이제 투차의 결과를 확인할 시간이었다.

“승부를 확인하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면 어떨까요?”

랴오판이 나를 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곳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네, 이곳에서 차를 만드는 분들이죠. 투차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판단을 해 줄 겁니다.”

랴오판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우리가 불리한 거 아닌가요?”

노해미가 의심의 눈초리로 랴오판의 말을 받아쳤다.

“그 부분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누가 만든 차인지 모르게 할 테니까요.”

그는 서랍에서 번호표를 꺼냈다.

“사람들은 번호로만 차를 알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다들 이곳 사람들인데...”

노해미는 마지막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랴오판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정 믿지 못하겠다면 다원 사람들을 모두 모으겠습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발언하겠습니다. 우리 다원의 명예를 걸고요.”

“좋아요, 다원의 사람을 전부 모아놓고 말해주세요. 공정하게 승부를 가르겠다고.”

“알겠습니다.”

장지수가 노해미의 어깨에서 손을 얻었다.

흥분한 노해미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랴오판은 판이 커지자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그는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이곳은 다원 안의 모든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다원에 강당이 하나 있습니다. 보통 강의나 품평회를 하는 곳으로 쓰는 곳이죠. 사람들을 그곳으로 모으겠습니다.”

다원 사람들이 강당 안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강당 한가운데 테이블이 설치됐다.

테이블 위에 하얀 천을 깔았다. 그 위에 오늘 만든 녹차가 있었다.

이름은 없고 번호표만으로 구별했다.

관전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긴장감이 느껴졌다.

다원의 모든 인원이 모이자 강당이 가득 찰 정도였다.

“다원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어요.”

노해미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혹시라도 망신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그런데 대표님은 떨리지 않으세요?”

“안 떨리는 것처럼 보여요?”

“네, 전혀요! 너무 덤덤해 보여 제가 더 떨리네요.”

랴오판의 장난기 어린 제안에 호기심이 생겨 벌인 일이었다.

내 기술을 공개적으로 평가하는 자리로 변하자 마음이 달라졌다.

이기고 싶었다.

랴오판이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저와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 투차를 벌이게 됐습니다. 최대한 공정하게 심판하기 위해 여러분을 모셨습니다. 투차의 심사는 3번에 걸쳐 진행할 겁니다. 심사는 우리 다원의 최고령자이자 최고 경력자인 펑위옌 씨가 맡겠습니다.”

소개가 끝나자 하얀 수염을 기른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우린 그가 심사하는 모습을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랴오판이 자리로 돌아왔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정말 궁금하네요.”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이 이긴다고 확신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하는 법이다.

게임의 승패

1번과 2번 번호판 뒤에 찻잎이 놓여 있었다.

찻잎을 깐 하얀 종이 밑에 차를 만든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번호의 주인을 아는 이는 나와 랴오판 밖에 없었다.

노해미와 장지수에게도 몇 번 뒤의 녹차가 누구의 것인지 몰랐다.

강당에 모인 다원 사람들도 번호의 주인을 알지 못했다.

그 상태로 투차가 진행됐다.

“그럼 본격적으로 투차를 시작하겠습니다.”

심사를 맡은 펑위옌이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찻잎 뒤에 숨겨진 주인은 알지 못했지만 열기가 뜨거웠다.

펑위옌이 시작을 알리자 두 남자가 차가 놓은 테이블로 걸어 나왔다.

두 남자의 얼굴이 비슷해 보였다.

“저 둘은 쌍둥이입니다.”

랴오판이 웃으며 말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손놀림까지 비슷하죠.”

쌍둥이는 번호표 뒤의 찻잎을 들고 뜨거운 물이 담긴 컵에 찻잎을 떨어뜨렸다.

랴오판의 말대로 쌍둥이의 손놀림은 데칼코마니처럼 같았다.

낙엽이 떨어지듯 찻잎이 컵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심사를 위해 투명하고 넓은 컵을 사용했다.

펑위옌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찻잎이 퍼지는 모습을 보았다.

강당에 모인 사람들도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투명한 물이 황록색으로 변해갔다.

거의 비슷한 시간이었다.

심사를 맡은 펑위옌은 시간을 확인했다.

3분이 지나자 심사가 종료됐다.

“1번 승.”

펑위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응원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들은 번호 뒤에 감춰진 이름을 몰랐다.

함성이 터진 것은 두 개의 찻잎이 변하는 속도가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심사위원인 펑위옌도 고개를 갸웃할 정도였다.

최초의 승패가 났을 때, 사람들은 랴오판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의 표정 변화를 통해 번호의 주인을 확인할 생각인 듯했다.

노해미와 장지수도 내 얼굴을 쳐다봤다.

랴오판의 얼굴에서 표정의 변화를 읽을 수 없었다.

나 역시 가만히 테이블을 지켜볼 뿐이었다.

내가 1번이었다.

랴오판이 잠잠히 지켜보는 이유가 있었다.

투차는 3판 2승이었다.

찻잎 하나로는 승부를 가를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3번은 평가를 해야 품질의 균일함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투차를 진행하겠습니다.”

쌍둥이가 같은 방법으로 찻잎을 떨어뜨렸다.

찻잎이 컵 안에서 진한 녹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강당에 있던 사람 중 몇몇이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두 눈은 투명한 컵을 향하고 있었다.

펑위옌은 시간을 확인했다.

“2번 승.”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또 터져 나왔다. 이번에도 미세한 차이였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측정이 힘들 것 같았다.

심사를 맡은 펑위옌은 언제나 확신에 찬 눈으로 승패를 결정지었다.

강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도 그의 눈을 의심하지 않았다.

2번의 승패가 결정된 순간 랴오판의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제 마지막 승부를 남겨두고 있었다.

강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긴장된 눈으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노해미도 참지 못하고 테이블 앞으로 나갔다.

테이블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였다. 랴오판은 제지하진 않았다.

랴오판의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언제나 여유롭던 모습과 달리 긴장한 얼굴이었다.

“마지막 승부를 진행하겠습니다.”

펑위옌의 말에 쌍둥이가 찻잎을 들었다.

쌍둥이 형제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텔레파시로 대화하는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마지막만큼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내려놓자고 말하는 듯이 보였다.

찻잎이 컵에 떨어졌다. 기계가 내려놓은 것처럼 동시에 찻잎을 떨어뜨렸다.

1번과 2번 컵 안에 찻잎이 서서히 퍼졌다.

투명했던 색이 변하기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펑위옌은 그 시점을 놓치지 않았다.

나 역시 손에 땀을 쥐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1분, 2분, 3분.

“1번 승.”

펑위옌은 망설임 없이 외쳤다. 보통은 여기서 환호성이 터져야 정상이다. 하지만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심사위원 펑위옌을 향하고 있었다.

펑위옌은 쌍둥이 형제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동시에 찻잎 아래 깔아둔 종이를 뒤집었다.

“우와!”

노해가 소리쳤다.

“대표님이 1번이었네요.”

펑위옌이 나에게 다가왔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가 내 손을 잡고 승리를 알렸다.

그제야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랴오판도 일어나 박수를 쳤다.

대만차를 배우러 와서 차 대결을 펼쳤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것도 이곳 다원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차로 겨뤄 내가 이겼다는 게.

승부욕이 강한 랴오판이었지만, 승패가 결정되자 호탕하게 웃으며 나를 칭찬해주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그제야 시간이 제법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해미도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지 내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되어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랴오판에게 말했다.

“손님을 이렇게 보낼 수 없죠. 제가 식사를 준비 시키겠습니다.”

“아닙니다, 식사는 다음에 하기로 하죠.”

노해미를 보며 말하자 그녀가 물개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장지수도 동의한다는 눈빛이었다.

“김덕명 씨가 대만 밀크티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다원도 밀크티 매장을 운영하고 있죠. 혹시 밀크티의 노하우가 궁금하진 않으십니까?”

“노하우요?”

“투차에 이긴 보상으로 노하우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대만으로 오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장지수에게 말했다.

그녀와 따로 보내는 동안 우린 밀크티 시장조사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내가 대만 밀크티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장지수에게 들었을 것이다.

장난으로 시작한 게임으로 생각지도 못한 기회를 얻었다.

그가 말한 밀크티의 노하우가 궁금하긴 했다.

난 노해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 마음을 읽은 듯했다.

“대표님만 괜찮다면 저도 문제없습니다.”

장지수와도 눈빛을 교환했다.

그녀도 동의한다는 듯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녁만 먹고 가겠습니다.”

우리는 식사를 했던 장소로 이동했다.

랴오판은 준비를 시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휴우,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노해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데 대표님 대단하세요. 랴오판을 이길 줄은 몰랐어요. 그 남자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던데.”

노해미가 장지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게임의 승패를 떠나서 정말 죄송합니다. 랴오판이 워낙 제멋대로인 줄은 알았지만, 손님에게 이런 결례를 벌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중간에서 역할을 해야했는데... 애매해서 끼어들기가 좀 어려웠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처음에 약속한 제 역할을 못 한 것 같네요.”

“교수님,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수님 덕에 유서 깊은 대만의 다원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보고 배울 것도 많았고요. 투차는 그저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니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해프닝 치고는 일이 너무 컸던 건 사실이죠. 김덕명 씨가 실력으로 이겨서 망정이지 만약 지기라도 했다면...”

장지수는 미안한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사소한 게임일 뿐이었습니다. 이기고 지고는 의미가 큰 의미가 없고요. 그나저나 정말 손에 땀이 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장지수의 성격인 것 같았다. 사소한 일일지라도 자신 때문에 내가 곤란한 상황을 겪었으리라 생각하며 몹시 미안해했다.

“너무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는데, 그럼에도 마음이 불편하다면... 나중에 저를 좀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될까요?”

“농부들과 관련한 글을 써 주십시오.”

“글이요?

“장지수 씨는 에세이 작가시잖아요?”

“네.”

“알다시피 저는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농부들과 관련한 책을 쓸 계획도 있습니다.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여러 명인에 대한 이야기들이죠. 많은 사람들에게 농사의 노하우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어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나요?”

“농사와 관련한 책들은 모두 딱딱해서요.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내용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래의 농부들을 위한 책이죠. 그들이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

장지수는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책이 나온다면 정말 좋을 거 같아요. 저 같은 사람들은 무조건 사서 볼 거예요.”

노해미가 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랴오판이 안으로 들어왔다.

“제가 없는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나 보네요.”

그가 자리에 앉자 요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대만 요리가 테이블 위에 가득 찼다.

가운데 놓은 메인 요리는 낯이 익었다.

“메인은 오리 요리입니다. 베이징덕과 모양은 비슷해 보이지만 대만식이죠.”

비주얼이 그럴싸해 보였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투차를 하며 긴장했던 탓인지 허기가 졌다.

요리를 한 점 맛봤다.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그의 말처럼 베이징덕과는 맛이 달았다.

향료가 많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입에 맞았다.

“김덕명 씨의 실력에 놀랐습니다. 솔직히 투차로 누군가에게 진 적은 처음입니다.”

랴오판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긴장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장지수는 랴오판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장난꾸러기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노해미도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도 마쳤는데 차를 드시러 갈까요?”

“좋습니다. 약속했던 밀크티 노하우도 듣고 싶네요.”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음식을 먹는 동안에도 그의 버블티 노하우가 궁금했다.

랴오판은 내 말에 보기 좋게 웃었다.

“안 그래도 저녁을 먹는 동안 준비해 놓으라고 했습니다. 그곳으로 이동할 생각이었습니다.”

랴오판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우리는 깨끗하게 정리한 주방으로 이동했다.

밀크티에 들어갈 재료들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대만 밀크티는 타피오카 펄이 포인트입니다. 대만에서 나온 방식이죠. 보통은 버블티라고 불립니다. 음료를 흔들어 먹는 방식에서 유래하죠.”

랴오판은 스테인리스 그릇을 들었다. 그 안에 흰색 가루가 있었다.

“카바사 뿌리에서 추출한 녹말가루입니다. 이걸 뭉쳐서 타피오카를 만듭니다. 우리 집의 노하우는 이 타피오카 반죽에 있습니다. 수입한 물건을 쓰는 매장과 다르죠.”

그는 녹말가루를 손으로 뭉쳤다. 자세히 보니 스테인리스 안에 카바사 녹말가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흰색의 하얀 알갱이들이 보였다.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타피오카 펄을 만들 때 녹말가루만 넣지 않습니다. 코코아 파우더와 설탕을 함께 넣어서 반죽하죠.”

랴오판의 손에서 동글동글한 모양의 타피오카가 만들어졌다.

“다 만들어진 타피오카는 시럽에 재워둡니다. 이게 완성된 모습이죠.”

랴오판은 냉장고에서 타피오카펄이 든 통을 꺼냈다. 랴오판은 그걸 이용해 버블티를 만들었다.

방식은 타이페이시에 봤던 것과 비슷했다. 물론 우롱차와 우유 등을 넣는 비율은 달랐다.

수첩을 꺼냈다.

“재료를 넣는 비율을 알 수 있을까요?”

“비율은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될까요?”

“그게 뭐죠?”

난 랴오판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저희 매장은 현재 타이페이시에 직영을 갖고 있습니다. 직영점 말고도 다른 매장들도 많죠. 가오슝에도 매장이 있으니까요. 곧 홍콩과 마카오에게 매장을 열 계획입니다.”

“그렇군요.”

“조만간 한국에도 진출할 계획입니다.”

“그렇군요?”

“김덕명 씨가 한국 지사를 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김덕명 씨처럼 차를 잘 다루는 분이 제격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랴오판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미난 제안이었다.

“죄송하지만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힘들겠네요.”

“왜죠?”

“전 대만식 버블티를 한국식으로 바꿀 예정이니까요.”

“역시 계획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랴오판은 호탕하게 웃었다.

“제안을 거절하면 노하우도 알려주지 않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랴오판은 카사바 녹말가루와 코코아 파우더 그리고 설탕을 넣은 비율을 말해주었다.

녹말 5, 코코아 파우더 3, 설탕 2의 비율로 타피오카를 만들었다.

그는 비율을 알려주며 그만의 타피오카펄을 완성했다.

“맛 한 번 보시겠습니까?”

모두 그가 완성한 타피오카를 입에 넣었다.

“맛이 어떤가요?”

“좋네요. 쫀득하고 달달한 게.”

“설탕을 더 넣는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는 정량만 넣습니다. 비결이라면 코코아 파우더겠죠. 타피오카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재료죠.”

랴오판은 자신이 아는 내용을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좋은 정보를 얻었다.

저녁을 먹고 버블티 비법까지 배우면서 랴오판과 우리는 제법 편안한 사이가 되었다. 투차의 긴장감이 사그라들었다.

긴 하루였다.

“해미 씨 이제 숙소로 가죠.”

“네.”

노해미의 표정이 밝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기분 좋은 밤이었다.

밤공기가 산뜻했다.

대만에서 가져온 선물

랴오판의 다원에서 벌어진 일이 자극이 된 것 같다.

노해미는 적극적으로 시장조사에 임했다. 먹는 것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녀는 쉬지 않고 먹었다. 심지어 내가 말려야 할 정도였다.

장지수도 코디네이터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대만의 유명 차밭을 섭외하고 우리를 안내했다. 그날의 해프닝이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느낌이 들었다.

4박 5일의 출장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대만의 차밭을 둘러보며 재미있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차로 유명한 지역마다 대농이 있었다.

압도적으로 큰 다원들이 하나씩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식민지 시절부터 부를 축적한 이들이었다.

랴오판의 다원도 4대째 내려오고 있으니 비슷한 역사를 가졌으리라고 생각했다. 다원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가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큰 다원들은 자체 매장도 소유했다. 랴오판의 다원은 버블티로 프랜차이즈 사업까지 벌이고 있었다.

농사를 기반으로 판매 루트도 다양했다. 관공서의 도움도 컸다. 지역 기관들이 제품의 연구개발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성장한 다원은 중견기업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언젠가 한국 시장에 들어올 것이다.

조사를 할수록, 하루빨리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대만계 버블티를 뛰어넘을 우리만의 신제품. 그전에 한 가지 해결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하동에서 녹차를 생산하는 모든 농가가 하나가 되는 일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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