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대만 출장이 결정되기 전이었지만, 한기탁과 백민석에게는 공유를 해야 했다.
만약 그녀가 이번 출장 동행을 거절한다고 해도 언젠가 대만에 갈 생각이었다.
“대만엔 무슨 일로?”
한기탁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백민석도 궁금하다는 눈빛이었다.
“밀크티 시장을 조사할 계획이에요.”
“혹시, 버블티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음료 안에 타피오카 들어간 독특한 음료.”
“맞아요, 목장에서 나오는 우유와 하동 녹차를 결합할 생각이에요.”
“그걸 신제품으로 개발할 생각인 거야?”
“네. 녹차 요거트와 녹차 아이스크림에 이은 신제품으로 만들어 볼 계획이에요.”
“이번 아이디어는 좀 아닌 것 같다.”
한기탁은 무턱대고 반대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반대하는 까닭이 궁금했다.
“선배,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죠?”
한기탁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지인 중에 버블티 하다 쫄딱 망한 사람이 있어.”
2000년대 초반 버블티가 한국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 잠시 입소문이 돌았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중국산 타피오카에 스며든 방부제가 발각되면서였다. 인체에 해로운 악성 물질이 다수 발견된 것이다.
대중적인 음료도 아니었고, 방부제까지 문제가 되자 사람들의 관심도 한순간에 식어버린 사건이다.
한기탁의 지인 중에 그런 일을 겪은 인물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저도 알고 있어요. 버블티가 반짝 유행으로 끝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왜 굳이 그걸 시도하려는 거야?”
한기탁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선배 지인 중에 버블티를 했던 분이 계시다면 알 수도 있겠네요. 그때 버블티가 망한 이유를요.”
“타피오카에 들어 있는 방부제가 문제가 됐다고 들었어.”
“맞아요, 중국산 타피오카에 방부제가 있었어요. 그게 문제가 되면서 가게들이 전부 망했죠.”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하려는지 궁금하네?”
“전 그때 시장성이 이미 입증됐다고 봐요. 시장성이 있는데 망한 이유는 뭘까요?”
한기탁과 백민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야 안 좋은 재료를 썼으니까 망한 거지!”
백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맞아, 안 좋은 재료로 식품을 만들었기 때문이야. 버블티 안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가 수입품이었어. 우롱차, 홍차, 타피오카 게다가 우유까지.”
“우유도?”
“탈지분유를 썼어.”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었네?”
“맞아, 그런데도 소비자들은 반응을 보였어. 심지어 근본도 없는 외국계 프랜차이즈가 내놓은 상품에 말이야.”
“네 말은 재료가 바뀌면 인식도 바뀔 거라는 생각이네?”
“맞아, 목장에서 생산한 우유와 하동의 녹차, 거기에 꿀까지 결합한다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한기탁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선배는 어떻게 생각해요?”
“시장성이 있었다는 건 인정. 지인도 버블티가 엄청 잘 될 거라고 이야기했었으니까. 그리고 재료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인정, 그분이 했던 매장도 전부 외국계 프랜차이즈에서 물건을 받아서 버블티를 만들었어.”
“그 문제를 우리가 개선하는 거예요. 선배도 그때 시장성이 있다는 걸 눈으로 직접 목격했잖아요.”
“두 눈으로 목격했지.”
한기탁의 표정이 이제야 밝아졌다.
그러고 보면 기묘한 유행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 반짝 유행했던 버블티는 2000년대 후반에 다시 유행을 탔다.
대만계 대형 프랜차이즈가 한국에 입성하면서부터였다. 그때 인터넷 마케팅 전략도 버블티가 다시 살아나는데 한몫했다.
아직 유행이 돌아오기 전 상황이었다.
“그럼, 대만에 출장을 다녀와도 될까요?”
“잘 다녀오십쇼!”
백민석이 기분 좋게 외쳤다.
“해미 씨도 같이 가는 거지?”
한기탁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왜요? 저 혼자만 갈까 봐요?”
“혼자만 갈까 봐 걱정했지.”
노해미가 알고 있는 대만 전문가에 대해서도 공유했다.
대만 유학파에 현지에 녹차 밭을 하는 친구도 있다는 사실을 듣자 모두 수긍했다.
회의를 마치고 연구소로 발길을 돌렸다.
며칠 전 서우영의 합류를 축하하는 회식 자리가 있었다. 서유영은 이영호보다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연구소에서 밤을 새우는 날도 허다했다. 연구에 치여 환영회도 미루고 미뤘던 것이다.
회식 날 서우영은 자기소개를 하며 앞으로 유기농 비료를 개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큰 관심을 보인 것은 김상철이었다. 지리산 농부의 구성원 중에서 작물 재배에 매진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직접 생산한 유기농 비료를 사용해 블루베리를 키우고 싶다고 말했다.
김상철의 말대로 유기농 비료를 사용해 블루베리를 키우게 될 것이다.
유기농 비료로 키운 녹차로 밀크티도 만들 계획이었다.
노크를 하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갔다.
서우영과 이영호는 각자의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니터 화면에 숫자들이 가득했다. 데이터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내 말에 이영호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오셨나요?”
“방금 왔습니다.”
서우영도 인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는 잘 진행되고 있나요?”
“신경 써주시는 덕분에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장비며 부족한 것들이 많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지원센터에 훌륭한 장비가 많이 있더군요.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서우영의 말에 이영호가 부끄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서우영 박사님이 오기 전에는 쓰지도 못하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서 박사님이 오시고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이영호 씨가 과장해서 말하는 겁니다. 이 친구 실력도 만만치 않으니까요.”
“네, 두 분의 실력이야 의심의 의지가 없죠. 이거 드시고 하십시오.”
난 여수에서 사 온 빵을 건넸다. 사무실 동료들 것과 연구실 팀원을 위한 것도 준비했다.
“마침 잘됐네요, 야식으로 먹기 좋겠네요.”
“너무 늦게까지 하진 마십시오. 몸 축나니까요.”
* * *
이틀 뒤였다.
노해미와 함께 하동푸른다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녀가 핸드폰 문자를 확인하곤 나를 무섭게 쳐다보았다.
“대표님, 가신대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장지수 교수님이 우리와 함께 가겠대요.”
“그래요? 아주 잘됐네요!”
노해미는 흥에 겨운지 몸을 들썩이기도 했다. 마침 오늘이 임시백 선생님과 하는 마지막 차 수업이었다.
“전 솔직히 조마조마했어요.”
노해미가 날 보며 말했다.
“왜요?”
“장지수 교수님이 사람을 좀 가리는 편이거든요.”
“그래요?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던데.”
“저도 처음엔 그런 줄로만 알았어요. 처음 만난 사람하고도 워낙 대화도 잘하시고 해서.”
“그런데요?”
“일부러 그렇게 하는 거라고 말했던 적이 있어요. 워낙 내성적이고 사람을 가리는 성격인데, 그래 보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적극적으로 말하는 면이 있다고요.”
“장지수 교수님이 해미 씨를 참 좋아하나 봐요. 그런 말씀도 하시고.”
“저 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어요. 저도 형제가 없어서 그런지 교수님이 언니 같아요.”
“그럼 교수님보다 언니가 낫지 않아요?”
“습관이 돼버려서 지금은 고치기가 힘들어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노해미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장지수의 동행 소식과 함께 하동푸른다원에 도착해 오늘도 변함없이 녹차 수업을 받았다.
수업이 완전하게 끝나는 날은 아니었다. 봄이 올 때까지 잠시 대기하는 시간이었다.
임시백 선생님과 수업을 마치고 차를 한잔 마셨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내 급한 성격 때문에 곤란한 적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적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부족해 선생님을 힘들게 했습니다.”
임시백은 흡족한 표정으로 나와 노해미를 바라보았다.
“수업이 끝났다고 끝은 아니다. 유기 비료가 개발되면 새로운 녹차를 실험해 볼 테니.”
“네, 선생님. 저도 바라는 바입니다.”
“해미의 말도 기억하고 있다. 녹차와 각종 과일을 블렌딩하겠다고 다짐했던 일 말이다.”
임시백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네, 녹차 블렌딩을 하는 족족 선생님에게 검사를 받을 생각입니다.”
노해미가 웃으며 말했다. 임시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 그리고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거라.”
“조만간 해미 씨와 함께 대만에 다녀올까 합니다.”
“대만엔 무슨 일로 가는 게냐?”
“대만 밀크티를 견학할 생각입니다.”
“덕명이 네가 우롱차와 홍차에 관심이 보인다 했더니, 생각보다 빨리 실천하는구나. 지난번 인터뷰 때 깜짝 놀랬지 뭐냐.”
난 미소로 화답했다.
“대만은 차 문화가 일상에 파고들었다고 들었다. 좋은 경험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 좋은 결실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기대하마, 선물도 잊지 말거라!”
대만에서의 대결
타에페이 공항에 도착했다. 도착과 동시에 비가 쏟아졌다. 가을 날씨임에도 후덥지근했다.
“약속대로 오늘은 친구와 시간을 가질 예정이에요.”
장지수가 우리의 안내자가 되는 작은 조건이었다. 그녀는 하루만 개인적인 시간을 줄 것을 요구했다.
우리가 방문할 차밭을 섭외하기 위해 시간도 필요하다고 했다.
요청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시장조사는 그녀가 없어도 충분히 가능했다. 게다가 노해미도 중국어에 능통했다.
장지수와는 타에페이시에서 잠시 이별했다.
난 노해미와 숙소에 짐 가방을 놓고 시내로 나왔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다시 대만에 온 게.”
노해미는 북적이는 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차나 한 잔 마실까요?”
우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찻집으로 향했다.
난 밀크티를 한 잔 시켰다.
“해미 씨는 처음 밀크티를 먹었던 사람이 누구인 줄 알아요?”
“글쎄요, 처음 밀크티를 먹은 사람이라?”
“1680년에 프랑스의 사블리에르 부인이 우유에 홍차를 넣어 마셨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럼 그 사람이 밀크티를 발명한 사람이네요?”
“기록만 있을 뿐 발명을 했다고 볼 순 없죠.”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왜 홍차에 우유를 넣어서 마신 걸까요?”
“아무래도 홍차의 떫은맛 때문이었을 거예요. 홍차는 마시고 싶은데 떫은맛 때문에 마시기 힘들었을 테니까요.”
“근데 좀 이상해요.”
“뭐가요?”
“왜 그렇게 홍차를 마시고 싶어 했을까요?”
노해미는 테이블 위에 놓인 홍차를 보며 말했다.
“그때 당시 유럽에선 홍차는 부의 상징이었어요. 게다가 동양에서 건너온 신비의 약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해요.”
“홍차를 신비의 약으로 알았다니 웃기네요.”
“영국의 한 차 전문점이 광고를 했대요.”
“광고요?”
“홍차의 효능에 대해서요. 홍차가 소화불량, 두통, 불면, 담석, 괴혈병, 기억 상실, 복통에 좋다는 광고를 했다죠.”
“완전 만병통치약이네요.”
“맞아요, 마지막엔 우유와 함께 마시면 폐병을 예방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라는 문구도 넣었다고 해요.”
“홍차에 그런 이야기가 숨어 있는 줄 몰랐어요. 그런데 대표님은 별 걸 다 아세요.”
“차를 배우며 틈틈이 책도 봤어요.”
노해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홍차를 마셨다.
“이제 슬슬 일어나 볼까요?”
“벌써요?”
“오늘 하루 종일 차를 마실 계획이에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하루 종일이요?”
카페를 나왔다. 방금 마신 밀크티는 영국식 밀크티였다.
영국식 밀크티는, 만들 때 덥히지 않는 우유를 먼저 넣어야 한다. 실온의 우유에 뜨거운 홍차를 부어 밀크티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유의 온도가 서서히 상승하면서 단백질의 변성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방법은 영국 왕립화학회가 발간한 ‘한 잔의 완벽한 홍차를 우리는 법’에 나와 있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서양 사람들의 기준이 모든 것의 표준일 순 없다.
오히려 대만 방식의 밀크티가 눈길을 끌었다.
버블티라고도 불리는 대만식 밀크티다.
“저 사람 좀 보세요.”
노해미는 한 남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픈된 카페에서 버블티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에 가서 봐도 될까요?”
우린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칵테일 바에서 쓰는 셰이크 컵에 얼음을 담았다. 그 안에 우롱차를 부었다.
뜨거운 우롱차가 얼음이 가득한 셰이크 컵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남자는 음악에 맞춰 셰이크 컵을 흔들었다.
뜨거운 차를 식히기 위한 과정이었다. 차갑게 변한 우롱차를 타피오카가 담긴 컵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우유 거품을 넣고 밀봉하면 대만식 버블티가 완성된다.
영국과 달리 대만인들은 시원하고 달콤하게 먹을 수 있는 버블티를 고안했다.
“이거 흔들어 드셔야 해요. 그래야 우유와 시럽이 잘 섞여요.”
노해미가 버블티가 든 컵을 들고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컵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우유와 차 그리고 타피오카가 섞이며 기이한 장면을 연출했다.
노해미는 커다란 빨대를 꼽고 버블티 안에 있는 타피오카를 빨아 먹었다.
“그거 맛있어요?”
“네, 이거 먹는 재미죠. 쫀득쫀득한 게 떡 같아요.”
타피오카는 카사바라는 작물의 뿌리에서 추출한 녹말이다. 남미나 아프리카 사람들에겐 식량으로 쓰이기도 한다. 맛이 좋아서라기보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작물이기에 대량으로 재배한다.
노해미와 타이페이 시를 다니며 온갖 종류의 버블티를 맛보았다. 차에 과일을 넣거나 타피오카 대신 젤리를 넣은 음료도 있었다.
노해미는 다섯 잔까지는 즐거운 얼굴로 마셨다.
“혹시, 또 마실 생각이세요?”
“아직 멀었는데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그럼 내가 다 먹을게요. 해미 씨는 기록만 해도 돼요.”
그녀와 난 관광을 하러 온 게 아니었다. 공식적인 출장이었다. 먹는 것 하나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들렀던 찻집부터 노점에서 판매하는 과일 버블티까지 모두 기록했다.
노해미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이 도움이 됐다. 재료를 묻고 제조 방법도 체크했다.
물론 친절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제조 방법을 물으면 대꾸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전부는 아니어도 대략의 방법과 자신만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이도 있었다.
우린 하루 종일 음료를 마시고 분석했다. 늦은 저녁이 돼서야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표님 전 너무 피곤해서 먼저 쉬겠습니다.”
노해미가 방으로 들어간 뒤, 난 다시 밖으로 나왔다.
좀 더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목적지는 스린 야시장이었다. 대만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시장이다.
타피오카 펄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음료가 아닌 빵이나 요거트에 타피오카 펄을 넣었다. 그 맛이 궁금했다.
야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난 매장 안으로 들어가 타피오카 펄이 들어간 요거트를 주문했다.
밀크티 안에 들어 있는 타피오카 펄과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콩자반 느낌이었다. 타피오카 펄을 설탕과 물엿으로 조려낸 것 같았다. 쫀득하고 달달한 느낌이 은근히 요거트와 어울렸다.
목장에서 생산하는 요거트와도 궁합이 좋을 것 같았다.
요거트 말고도 다른 빵이며 과자까지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음식을 시식했다. 출장이라고 너무 무리하는 것 같긴 했지만 먹는 것도 일이니... 열심히 먹었다.
기록도 잊지 않았다. 가능한 최초의 느낌을 살려서 기록해야 했다.
새벽이 다 돼서야 숙소로 돌아왔다.
침대에 눕자마자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다음날 아침, 호텔 앞에서 장지수와 그녀의 대만 친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에 말씀드린, 다원을 운영하는 친구와 함께 왔어요. 곧장 차밭으로 이동할 건데 괜찮을까요?”
어젯밤 야시장에서 밀크티와 더불어 관심 있던 음식들을 충분히 맛보았다. 그랬기에 오늘 곧장 차밭으로 이동한다니 오히려 반가웠다.
노해미도 당장 차밭으로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시내에 더 있다간 푸드파이터가 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랴오판입니다.”
장지수의 대만 친구였다.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행색이며 자동차까지 그는 부잣집 도련님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의 차에 일행 모두가 탑승했다.
“지금 가는 곳은 평림에 있는 차밭입니다.”
그는 나를 위해 영어로도 말했다. 다행히 통역은 필요 없었다.
평림은 타이페이시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대만에서 차로 유명한 지역 중 하나였다.
차밭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불고불 언덕마다 차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평림에서 유명한 차는 문산포종차입니다. 청심우롱 품종에서 딴 찻잎을 원료로 하죠. 약하게 산화시켜 꽃 향이 진합니다. 다원에 도착하면 차 맛을 보여드리죠.”
랴오판이 창밖에 펼쳐진 차밭을 보며 말했다.
차에 대해서 말할 땐 눈빛이 달랐다. 부잣집 도련님에서 차 전문가로 변한 것 같았다.
우리가 도착한 평림 다원은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
랴오판은 어떤 면에서 임시백과 비슷한 종류의 인물이었다.
그는 평림 다원의 4대 손이었다. 대를 이어 차밭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김덕명 씨와 노해미 씨는 한국에서 차를 배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곳에서 차를 만드는 과정도 궁금하시겠죠?”
랴오판이 나와 노해미를 보며 말했다.
“네, 궁금해요!”
노해미가 반가운 얼굴로 답했다.
“절 따라오시지요.”
랴오판은 차를 만드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제법 규모가 컸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차를 만들고 있었다.
“대만의 차는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저희 다원에선 아버지 때부터 수출을 하고 있습니다.”
랴오판의 말에서 대만차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영토와 인구는 작아도 차만큼은 세계적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평림 다원은 녹차를 대량 생산하기 위해 공정을 간소화한 부분도 있었다. 찻잎을 커다란 시루에 넣고 증기로 찌는 게 대표적이었다.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한국에선 찌지 않고 덖는 게 일반적이었다.
내가 찻잎을 찌는 찜에 관심을 보이자 랴오판이 반응했다.
“일본 사람들이 사용하던 기술이죠. 저희도 녹차를 만들 때만 사용합니다. 우롱차나 홍차를 만들 때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대만은 한때 일본의 식민지였다. 그때 일본 사람들이 남기고 간 기술이었다.
랴오판의 얼굴에 미세한 표정 변화가 느껴졌다.
“제가 정신이 없었군요. 점심시간이 된 것도 모르고 있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대만에서 먹어 볼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랴오판이 식당으로 우릴 안내했다. 랴오판은 은연중에 장지수를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느낌을 받았다.
장지수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곳입니다.”
다원 안에 있는 식당이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정원이 딸린 곳이었다. 손님용으로 따로 사용하는 곳 같았다.
테이블 위에 음식이 올라왔다.
“닭 날개 볶음밥입니다.”
랴오판이 접시를 보며 말했다.
“뼈를 제거한 닭 날개에 대만식 볶음밥을 넣고 그릴에 구운 요리입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얼마나 그립던지~!”
노해미가 포크를 들고 군침을 흘렸다.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약간 매콤한 소스를 발라 구운 닭 날개와 볶음밥이 조화롭게 잘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식사를 하며 가벼운 대화가 이어졌다.
랴오판이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두 분은 유명한 선생님 밑에서 차를 배운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선생님이 유명하시긴 하시죠. 최근엔 황금 미네랄 녹차도 개발하셨고요.”
노해미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황금 미네랄 녹차요? 이름만 들어도 대단한 물건 같네요!”
랴오판의 관심에 노해미가 황금 미네랄 녹차에 대한 이야기를 한껏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황금 미네랄 녹차는 정말 특별한 녹차예요. 맛과 향도 정말 좋아요!”
노해미는 임시백 선생님의 녹차를 마셨을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혹시, 저도 한 수 배울 수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노해미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저희 다원에 있는 찻잎으로 녹차를 만들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만?”
“랴오판, 장난 치려는 거 아니야?”
장지수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장난 아니야, 그냥 우리 다원에 차를 만들 줄 아는 한국 분이 온 건 처음이라서 궁금했을 뿐이야. 다른 뜻은 없다고.”
랴오판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럼 다른 제안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랴오판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처음 차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그는 날 의식하고 있었다.
“뭔가요?”
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눈에서 묘한 경쟁심이 느껴졌다.
“중국의 차 문화 중에 투차라는 게 있습니다.”
“투차요?”
“일종의 게임이라고 볼 수 있죠. 송나라 때 황실과 문인들이 했던 놀이이기도 합니다.”
“차를 놓고 게임을 벌이는 건가요?”
“역시, 눈치가 빠르시네요. 여러 명이 하는 게임은 아닙니다. 보통은 두 명으로 제한하죠. 두 사람이 동일한 조건에서 차를 만들고 승패를 가르는 경기입니다.”
“승패를 가르는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차의 빛깔과 찻잎이 우러나는 시간으로 측정을 하죠.”
노해미가 굳이 대결을? 뜬금없이요? 하는 눈빛으로나를 바라보았다. 느낌이 좋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대만차를 공부하시려고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만에서 나는 찻잎으로 차를 만들어 보시면 도움이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랴오판, 장난이 지나치잖아!”
장지수가 랴오판을 째려보며 말했다.
“해보죠, 투차(斗茶)!”
난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