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으로 돌아와 설강인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자네가 날 찾는다고 들었네?”
“멸균우유에 대해서 상의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멸균우유라니 그걸 어디다 쓸 작정인가?”
그가 어떤 뜻으로 그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멸균우유는 살균하는 과정에서 좋은 미생물들이 전부 사멸한다.
지금 목장에서 생산하는 유제품과는 부합하지 않았다. 특히 요거트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요거트나 아이스크림에 넣을 우유가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신제품을 만들 계획입니다. 그때 쓸 계획입니다.”
그에게 밀크티에 대한 계획을 간략하게 말했다.
“뭐 밀크티라면 문제없겠지. 그래도 목장 우유를 그대로 쓰는 게 더 낫지 않나?”
“말씀대로 목장 우유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목장 우유는 유통기한이 일반 우유보다 더 짧습니다. 멸균우유는 비교적 유통기한이 길고요.”
“그건 자네 말이 맞네. 멸균우유의 최대 장점이지. 무슨 뜻인지 잘 알았네.”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멸균우유는 살균 처리하는 과정에서 맛도 변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맛이 좀 달라지긴 하지.”
“원래의 맛을 최대한 유지했으면 합니다.”
“나에게도 시간을 주게. 여러 가지 실험을 해봐야 하니까.”
“네, 당장 급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은 미리미리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설강인이라면 멸균우유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다고 믿었다.
* * *
목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였다.
“대표님.”
“해미 씨.”
노해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했다.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사람 같았다.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안 좋은데.”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자리를 옮길까요?”
노해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드라마의 명장면을 찍었던 장소로 이동했다.
초원이 노을에 물들어 있었다.
“이제 말해보세요.”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곤 결정했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휴가를 좀 다녀올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휴가요?”
“집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집 문제는 절대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휴가를 쓰는 건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녹차를 배우는 과정에서 휴가를 쓴다는 게 궁금했다.
“무슨 일이...?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예전에 서울에 올라갔던 거 기억하시나요?”
녹차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녹차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 가깝게 지내던 외래교수.
그 교수님에게 대만에 녹차밭을 하는 친구가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만에 잠시 다녀올까 하고요.”
“대만이요?”
“그때 말씀드렸던 교수님이 조만간 대만에 가신다고 해요. 대만 녹차도 공부할 겸, 함께 가보고 싶어서요.”
“그런 일이라면 휴가를 허락할 수 없습니다.”
노해미의 얼굴이 당황해서 벌게졌다.
“그건 휴가가 아니고 출장이니까요.”
벌게졌던 얼굴이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출장이요?”
나 역시 대만 출장을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밀크티를 변형한 버블티는 대만에서 시작됐다.
버블티와 관련한 노하우를 배울 좋은 기회였다.
“함께 가는 분에 대해서 듣고 싶군요.”
전에는 자세한 정보를 물을 기회가 없었다. 강의 일을 그만두고 책 작업을 한다고 들었다.
“장지수 교수님이에요.”
장지수,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었다.
“혹시, 교수님 사진도 볼 수 있을까요?”
노해미가 다이어리에 있던 사진을 꺼내 보였다. 얼굴도 낯이 익었다.
“뭘 그렇게 자세히 보세요?”
“지금 뭘 하신다고 했죠?”
“지금은 에세이를 쓰고 계세요.”
그제야 얼굴과 이름이 떠올랐다. 그녀를 서점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출간은 되지 않았지만 에세이 부분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었다.
자신의 경험을 여러 가지 맛의 차에 빗대어 쓴 에세이였다.
“교수님을 직접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저도 함께 출장을 가고 싶어서요.”
출장 동행자
다음날 노해미가 날 찾았다.
장지수 교수와 통화를 했다며 입을 열었다. 신이 난 얼굴이었다.
“교수님도 대표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어요.”
장지수는 시간 강사 일을 하다 에세이 작가가 된 사람이었다.
당시 유명했던 베스트셀러라 에세이에 관심이 없던 나도 읽은 경험이 있었다.
‘우울할 때 마시는 차’라는 책이었다.
작가는 힘들었던 삶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냈다. 에피소드마다 다양한 차들이 등장했다.
커피뿐만 아니라 우롱차와 밀크티까지 여러 종류의 차들이 나왔다. 차에 대한 전문지식도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한몫했다.
그녀의 책이 반응을 얻으며 덩달아 비주류였던 차까지 관심을 받게 됐다는 기사도 생각이 났다.
난 장지수와 함께 대만 출장을 가길 희망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까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출판사에서 그녀의 책을 받아주지 않아 자비 출판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좋은 인연으로 이어진다면 그녀에게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장지수와 약속이 잡혔다. 그녀는 지금 여수에 있었다.
하동과 비교적 가까운 곳이었다. 한 시간도 안 걸려서 여수에 도착했다.
장지수는 우리보다 먼저 카페에 와 있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곳이었다.
“해미야, 여기야.”
“교수님.”
장지수는 소탈한 느낌의 사람이었다.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노해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 같았다.
“우리 대표님이세요.”
노해미가 장지수에게 날 소개했다.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장지수예요.”
본론을 말하기 전에 가벼운 이야기가 오고 갔다. 지리산 농부의 인턴 이야기부터 최근 있었던 녹차밭 결혼식까지 다양한 화제가 입에 올랐다.
이야기 중에 장지수의 의외의 말을 꺼냈다.
“전부터 김덕명 씨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어요.”
“저에 대한 호기심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죠?”
“아버지에게 덕명 씨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대단한 청년 농부라고요.”
“아버지요?”
그녀의 아버지가 내 이야기를 했다는 게 놀라웠다.
“저희 아버지께서 양봉을 하시거든요.”
“아버님 존함을 여쭤봐도 까요?”
그녀의 입에서 장문식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토종벌 협회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교수님, 저한테는 그런 말씀 안 하셨잖아요?”
노해미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런 기회가 올 줄 몰랐지.”
장지수의 말에 노해미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해미에게 대만 건에 대해서도 들었어요. 제가 대만에 가는 길에 출장으로 함께 가시겠다고요?”
“해미 씨에게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차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풍부하시다고요.”
“개인적인 목적으로 가는 여행인데, 출장이라니 조금 부담이 되네요.”
“교수님의 여행을 방해하지는 않겠습니다. 교수님은 원래의 계획대로 하시면 됩니다. 저도 출장이라기보다 차 기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차 기행이요?”
“네, 차를 만나는 시간이죠.”
“표현이 좋네요. 차를 만나는 시간이라.”
장지수는 카모마일이 든 잔을 만지며 말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비용도 절약되는 일이니 함께 가요. 교수님!”
노해미가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
“너도 같이 가는 거니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볼게.”
노해미의 말에 장지수는 웃으며 답했다.
장지수는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마음을 결정하겠다고 했다.
그녀의 결정을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