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난 한기탁과 백민석을 따로 불렀다.
간부들끼리의 비공식적인 회의였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간부 회의라니.”
백민석이 물었다.
“연구소에 사람을 한 명 더 들이면 어떨까 하고.”
난 백민석과 한기탁에게 말했다.
“연구원을 한 명 더 늘린다. 이유가 뭐지?”
한기탁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연구원 이영호는 요거트와 치즈를 만들 수 있도록 유산균을 개발하는 등 자기 몫을 해내고 있는 걸 한기탁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는 연구원을 더 늘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유기 비료를 개발할 목적이에요.”
“유기 비료라? 유기농 비료? 유기농 퇴비? 같은 건가?”
“네, 유기농 비료라고 볼 수 있죠. 친환경적으로 만들어 낸 좋은 영양제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런데 유기 비료가 왜 필요하지?”
“작물을 키우기 위해선 좋은 영양제가 필요하니까요.”
“작물이라면 상철 씨가 키우고 있는 블루베리?”
한기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블루베리를 키우는데 연구원까지 들이냐는 반응이었다.
“블루베리뿐만 아니라 차나무까지도.”
“차나무?”
“네, 어떤 비료를 쓰느냐에 따라 녹차의 영양소가 달라지는 걸 확인했어요. 기탁 선배 생각도 알 것 같아요. 지리산 농부들이 주력하는 상품은 목장에서 나온 유제품이니까요. 하지만 장기적으로 작물 재배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상철 씨가 키우는 블루베리와 차나무가 그 시작이 되겠죠.”
“하긴, 녹차를 다른 농가에서만 받을 수는 없겠지. 작더라도 우리가 생산한 차가 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
한기탁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비장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큰 틀에서 연구소 인력 충원에 동의해. 우리 연구소도 공식적으로 연구소다운 모양새를 갖출 필요가 있기도 하고. 인력 추가에 따른 사업계획서도 준비해 봐야겠군.”
“아우 잘됐네요, 개인적으로 이영호 연구원이 좀 안 됐다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어.”
“그게 무슨 뜻이지?”
백민석의 말에 한기탁이 물었다.
“저희는 팀원이라도 있는데 이영호 씨는 혼자잖아요. 상의할 사람도 없이 혼자 외로웠겠어요.”
“나도 그게 좀 걸리긴 했어.”
한기탁이 백민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구 업무 특성상 고립된 환경에 있어야 했다.
이영호가 혼자 있는 게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그럼 연구원을 한 명 더 들이는 것에 찬성하는 건가요? 본격적으로 지리산 농부들이 모실 연구원을 찾아볼까요?”
“좋습니다!”
한기탁과 백민석이 기분 좋게 말했다.
“그나저나 신제품 건은 어떻게 됐나요?”
난 한기탁에게 물었다.
“오늘 매장에 전부 들어갔어.”
녹차 아이스크림과 녹차 요거트였다.
유제품을 공급하는 카페에 새롭게 발주하는 신메뉴였다.
마케팅 요소로 목장 체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목장 체험에 온 가족과 단체들에 신제품을 무료로 나눠주고 리뷰를 받는 방식이었다.
설민주가 만들어 낸 신제품은 완성도가 높았다. 소비자들의 평가도 좋았다.
* * *
일주일 뒤, 난 이영호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서우영을 만나러 가는 자리였다. 약속 장소는 신촌의 수제비 집이었다. 이영호의 추천으로 선택한 장소였다. 서우영의 오랜 단골이라고 했다.
“반갑습니다, 서우영이라고 합니다.”
“김덕명입니다.”
“먼 길 오셨습니다. 제가 하동으로 가야 하는 건데.”
서우영은 단정하고 점잖았다. 이영호처럼 수줍음이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식사 도중 그는 웃으며 말했다.
“칼국수 맛이 어떤가요?”
“네, 국물이 담백하네요. 면도 독특하고요.”
보통의 면과 달리 찰기가 덜했다.
“토종 밀로 만든 면이죠. 우리 밀이라고 불리는 밀도 대부분 외국에서 들여온 씨앗으로 밀을 생산합니다. 몇몇 농가 정도만 토종 밀을 생산합니다. 이곳의 주인장도 토종 밀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가게의 단골인 까닭이죠.”
서우영은 칼국수를 먹으며 ‘외국 종자’로 길러 먹는 ‘우리 농산물’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말해 주었다.
우리 식생활에 빠지지 않는 청양고추. 우리 종묘회사가 자체 개발한 토종 종자지만, 미국 기업에 회사가 팔리면서 이제는 종자를 역수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딸기의 종자는 거의 일본에서 수입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농부가 고추와 딸기 농사를 짓고 있지만, 종자 사용에 따르는 로열티는 미국, 일본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고발했던 다국적 기업은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유전자를 조작해 씨앗이 싹트지 못하게 하는 불임 기술을 개발했다. 다음 농사를 짓기 위해선 무조건 씨앗을 새로 사서 길러야 했다.
서우영이 토종 씨앗의 복원과 전파에 관심을 두는 이유였다.
“김덕명 씨는 유기 비료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서우영이 날 보며 말했다.
“네, 화학적인 비료가 아닌 유기 비료로 작물을 재배하려고 합니다.”
“저도 유기 비료에 관심이 많습니다. 토종 씨앗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죠.”
서우영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영호 씨에게 들으셨겠지만, 지리산 농부들은 서우영 박사님과 함께 일하길 원합니다. 혹시 생각은 해 보셨는지요?”
서우영은 잠시 말을 멈췄다.
신중하게 행동하려는 몸짓 같았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그곳에서 토종 씨앗 복원하는 일을 연구해도 좋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전 토종 씨앗 복원뿐만 아니라 전파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혹시 대표님은 그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듣고 작은 목표를 하나 설정했습니다. 농가들과 연합해서 토종 씨앗을 보급하는 일이죠. 단순 보급만이 아닌 직접 토종 씨앗을 심어 재배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결정을 내리기 쉽게 됐네요.”
서우영이 웃으며 말했다.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어차피 실업자 신세입니다. 불러 주는 곳이 있다면 가야겠죠. 그곳이 하동이라면 더 좋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이영호의 얼굴이 밝게 변했다.
“감사합니다, 연구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뭐든 말씀해주십시오.”
서우영이 지리산 농부들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