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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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퇴근한 늦은 시간이었다. 난 혼자 사무실을 찾았다.

확인할 서류가 있었다. 서류를 확인하고 건물 밖으로 나갈 때였다.

건물에 불이 켜진 곳이 있었다. 이영호의 연구실이었다.

난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퇴근 안 하세요?”

이영호는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이시군요. 놀랐습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식물성 레닛을 개발 중이었습니다.”

레닛은 설민주의 요청으로 만든 효소복합체였다. 치즈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응고제였다.

이영호는 지리산 농부들과 합류해 여러 가지 성과를 이뤄냈다.

벌집에서 프로폴리스를 추출해냈고, 다양한 종류의 유산균을 배양하고 가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레닛까지 개발하고 있었다.

“혼자 일하는 게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습니다.”

이영호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언제나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수줍은 성격 탓인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일에 집중했다.

종종 그가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기회가 되면 연구소의 인원을 늘려주고 싶었다.

“혹시 저에게 할 말이 있으신가요?”

이영호가 나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내일 그와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이미 퇴근을 넘긴 시간이라 일 이야기는 삼가야겠다고 판단했다.

“아닙니다, 오늘은 업무도 끝났고.”

“괜찮습니다, 말씀해주시죠.”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말씀을 안 해주시면 잠도 못 잘 것 같습니다.”

이영호가 안경테를 매만지며 물었다.

“그럼 할 수 없군요. 말씀을 드리는 수밖에.”

“네, 말씀하시죠.”

“혹시, 유산균을 이용해 유기 비료를 만들 수 있을까요?”

“유기 비료요?”

앞으로 대세는 유기농 퇴비였다. 유산균과 미네랄을 포함한 유기질 비료는 양질의 녹차를 생산할 좋은 영양분이 될 것이다.

“바이오비탈 농법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이영호가 한 손으로 턱을 받치며 말했다.

바이오비탈 농업은 유산균 농법이라고도 부른다. 유산균에 의해 미네랄 등의 영양분이 작물에 흡수하도록 돕는 농법이다. 토양의 병균 발생을 방지하고 미생물을 증식시켜 토양을 개선한다.

그가 그렇게 쉽게 답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영호에게 맡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문분야도 아니었다. 연구기관에 의뢰할지 고민하고 있던 참이었다.

“영호 씨가 혹시 유기 비료도 만들 수 있을까요?”

이영호는 잠시 주저했다.

“관련한 책을 본 게 전부입니다. 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죠...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실망하지 않았다. 그가 최소한 지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의뢰를 맡길 때도 전문가가 필요했다.

그 순간 이영호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혹시, 서우영 박사라고 들어보셨나요?”

“서우영 박사라면?”

신문 기사를 통해 본 적이 있었다. 다국적 비료 회사를 고발한 장본인이었다.

다국적 회사가 개발한 제초제인 ‘글리디터’의 문제를 고발한 것이다.

제초제는 잡초를 억제하고 해충을 죽이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독극물이지만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안 됐다.

작물이 제초제 성분을 빨아들여 인체에 유해한 영향을 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서우영 박사는 다국적 회사의 제초제 안에 암을 유발하는 성분이 있다고 밝힌 인물이었다.

그 사건 때문에 피해를 봤다고 들었다. 회사의 압력으로 일하던 연구소에서 나와야 했다.

그 뒤로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분과 함께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서우영 박사님이 우리와 함께하려고 할까요?”

이영호의 말대로 그와 함께한다면 유기 비료 개발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서우영 박사와는 어떤 접점도 없었다.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이영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농담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심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방법이요?”

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떤 방법인지 궁금했다.

새로운 제품과 연구원

“서우영 선배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습니다. 가끔 서로 안부를 묻고 연락하는 사이입니다.”

이영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 선후배 사이로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라고 덧붙였다.

“아, 그렇게 의외로 가까운 관계인 줄은 몰랐습니다.”

기쁨과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이영호를 설득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우영이 이영호와 친분이 있다고 해도 우리와 함께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려고 할까요?”

“서우영 선배를 설득할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이영호의 얼굴에 여유가 느껴졌다.

“설득할 방법이 있다고요? 그게 뭔가요?”

“서우영 선배는 출세나 명성엔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워낙 뛰어난 사람이라 부르는 곳이 많았을 뿐이죠.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선배가 원하는 연구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원하는 연구요?”

“네, 그 부분을 대표님께서 해결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선배도 허락할 겁니다.”

“그게 뭔가요? 서우영 씨가 원하는 연구라는 게?”

“토종 씨앗을 복원하는 일입니다.”

“토종 씨앗이요?!”

해마다 200여 종이 넘는 토종 씨앗이 사라지고 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대표님은 토종 씨앗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이유를 아시나요?”

“토종 씨앗을 사용하지 않아서라고 들었습니다. 이유까지는 모릅니다.”

“맞습니다, 토종 씨앗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유는 농가의 소득과 연결돼 있습니다.”

“농가 소득이요?”

“토종 씨앗을 심으면 해마다 같은 품질의 작물을 되풀이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해가 되풀이된다고 수확량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죠. 그런데 외국에서 수입한 씨앗으로 키운 것보다 수확량 자체가 적습니다. 수확량은 곧 소득과 연결되는지라, 소득을 위해 작물을 키우는 농가라면 수확량이 많은 수입 씨앗을 선호하게 됩니다. 토종 씨앗이 점점 사라지는 이유죠.”

“그런 이유가 숨어 있었군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종자 은행도 있고, 토종 씨앗을 보존하는 일들은 꾸준히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알고 계셨네요. 혹시, 대표님도 토종 씨앗에 관해 관심이 있던 건가요?”

“우리 집도 작물을 키우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정도입니다.”

“말씀처럼 국가에서 토종 씨앗을 보존하는 목적으로 종자 은행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존만 할 뿐 농가에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다. 선배가 하고 싶은 일은 복원과 더불어 토종 씨앗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그렇군요.”

“대표님이 토종 씨앗과 관련한 연구 활동을 보장해 준다면 서우영 선배도 지리산 농부들과 손잡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영호 씨의 말대로 된다면 좋겠네요. 무엇보다 이영호 씨 혼자 연구소를 지키고 있는 게 마음에 걸렸으니까요.”

“아닙니다. 전 혼자여도 괜찮습니다만... 서우영 박사와 함께 일할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이영호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 문제는 저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에게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네, 얼마든지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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