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다.
산양들이 녹차밭을 뛰어놀았다.
결혼식이 열리는 곳에서 보면 산양이 뛰어노는 모습이 그림처럼 보일 뿐이었다.
큰 규모를 자랑하는 하동푸른다원이기에 가능했다.
산양과 관련해서는 녹차밭 곳곳에 표시해두었다.
지역의 모든 농가가 산양을 이용해 유기농 녹차를 재배하고 있다는 표시였다.
녹차밭 결혼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정보였다.
이곳에 온 모든 사람이 산양을 이용한 유기농 녹차에 관심을 보였다.
노부부의 결혼식이 녹차밭에서 진행됐다.
하객들이 녹차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노부부의 결혼을 추천했던 사람들과 소문을 듣고 온 이들이었다.
결혼식이 아니라 성대한 축제를 방불케 했다.
녹차밭 한가운데 커다란 밀랍 양초가 있었다.
양초 학교 아이들이 모두 함께 만든 대형 양초였다.
숫자 100을 형상화한 모양이었다. 아이들의 아이디어였다.
백년가약을 상징하는 양초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할머니는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눈물을 흘리셨다.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었다.
푸른 녹차밭의 싱그러운 내음도 노부부의 결혼을 축하하고 있었다.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는 목장에서 펼쳐지는 피로연이었다.
메인 메뉴는 설민주의 목장 피자였다.
감자피자부터 버섯까지 지역에서 나온 농산물로 만든 다양한 피자가 준비돼 있었다.
그중에 단연 인기가 좋은 피자는 블루베리 피자였다.
정길산의 과수원에서 난 블루베리와 목장 우유로 만든 모짜렐라 치즈가 어우러진 피자였다.
설민주는 화덕에서 연신 피자를 구워내고 있었다.
“블루베리 피자, 생각도 못 했어요. 블루베리와 치즈가 이렇게 어울리는지 몰랐어요.”
방금 먹은 블루베리 피자를 떠올리며 말했다.
“특별히 신경 좀 써 봤어요. 참 아이스크림도 드셔 보셨어요?”
“아이스크림이요?”
“그건 저희 어머니 솜씨에요. 그때 주신 녹차 가루로 녹차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봤어요.”
“못 봤네요.”
“내놓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서 일 거예요.”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밖으로 나와 확인해 봤다.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녹차 아이스크림을 기다리는 줄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내놓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피로연장의 음식은 피자뿐이 아니었다.
국수도 있었다.
하동부인회관의 할머니들이 결혼 이야기를 듣고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난 피로연장에서 국수를 삶고 있는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김꽃님 할머니였다. 오랜만에 뵙는 반가운 얼굴이었다.
“쉬시지 왜 나오셨어요?”
웃으며 물었다.
“결혼식에 국수가 빠질 수 없으니까. 국수를 먹어야 신랑 신부의 연이 오래오래 이어지는 거야. 피자도 좋지만 말이야.”
김꽃님 할머니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녀의 말대로 국수는 결혼식에 빠질 수 없는 음식이었다.
국수는 부부의 연이 오래오래 이어지라는 바람이 담긴 음식이다.
결혼 생활 중 발생하는 갈등도 술술 넘어가라는 뜻도 있었다.
김꽃님 할머니와 더불어 하동부인회관의 할머니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잡채와 전 등 각종 음식을 만들어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대접했다.
무료로 음식을 먹는 것만은 아니었다.
목장에서 나온 유제품을 판매하는 공간도 있었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과 외부에서 온 인원들은 제품을 구매했다.
녹차 농가들도 함께 나와 녹차를 판매했다.
지리산 농부들이 기획한 대로 축제가 됐다.
* * *
두 번째 결혼식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첫 번째 결혼이 워낙 화제가 됐기 때문이었다.
처음과 달리 취재진까지 합류했다. 메이저 언론사부터 지역 신문의 기자들까지 수많은 사람이 장사진을 이뤘다.
특별한 사연의 주인공들이기에 더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시각장애인 커플이었다.
신부는 하객들을 보며 말했다.
“비록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싱그러운 바람과 녹차의 향이 느껴지네요. 결혼식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신부는 본인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읽었다.
점자로 만든 편지였다. 촉감으로 한 줄 한 줄 글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하객들의 눈망울이 촉촉하게 변했다.
부모님의 염려와 걱정을 담은 내용으로 시작했다.
자신이 만들어나갈 행복한 삶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양가의 부모님들은 결혼식이 끝나는 시간까지 눈물이 마를 겨를이 없었다.
양초 학교 아이들은 그들을 위한 양초를 만들었다.
네모반듯한 밀랍 양초였다.
반반한 면에 아이들은 점자로 글을 썼다.
행복과 축복을 기원하는 글이었다.
‘그대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시였다.
결혼식 내내 눈물을 보이지 않던 신부가 양초에 새겨진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처음처럼 감동적인 결혼식이었다.
피로연의 음식도 여전히 좋았다.
설민주를 포함한 목장 식구와 하동부인회관의 할머니들이 하객들의 입을 즐겁게 했다.
목장에서 생산한 유제품과 녹차 농가 사람들이 들고나온 녹차도 인기리에 팔렸다.
두 번째 결혼식에 반가운 얼굴이 끼어 있었다.
한국신문의 배선아 기자였다.
“오랜만이에요, 김덕명 씨.”
“배 기자님은 잘 계셨나요?”
“저야 뭐, 항상 바쁘죠.”
“그래도 여기까지 오실 시간은 됐나 보네요.”
“녹차밭 결혼식이 워낙 화제가 돼서요. 안 올 수가 없었어요. 게다가 이 행사를 기획한 사람이 김덕명 씨란 사실을 알고 안 올 수 없었죠.”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행사의 취지며 의도가 아직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거로 알고 있어요?”
“맞습니다, 이렇게 관심을 받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요.”
“이 행사를 기획하게 된 이유가 뭔가요?”
“사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인식이라니요?”
“배 기자님도 보지 않았나요? 녹차밭을 뛰어다니는 산양들을.”
“네, 봤어요. 산양을 직접 본 건 처음인데, 정말 귀엽더라고요.”
“이곳의 모든 녹차 농가가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산양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거죠.”
“그럼 농약은 하나도 주지 않는 건가요?”
“산양은 농약을 먹으면 죽습니다.”
“아, 그렇군요.”
“모든 녹차 농가가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결혼식 이벤트를 벌인 것도 그 때문이죠.”
“목장에서 만든 유제품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도 아시죠?”
“의도치 않은 행운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내주셔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배선아는 녹음기를 껐다.
“그거 아세요?”
“뭐죠?”
“다음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못 하겠어요.”
그녀가 웃으며 인터뷰를 마쳤다.
배선아 기자 말고도 여러 언론사와 인터뷰했다.
그들은 나와 인터뷰를 마치고, 주변 녹차 농가 사람들과도 인터뷰를 했다.
녹차밭 결혼식과 함께 기사가 나갔다.
기대 이상의 성과가 있었다.
고개를 돌렸던 사람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녹차 농가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난 임시백의 집을 찾았다.
“자네 정말 대단하네.”
“아닙니다, 다 같이 이뤄낸 성과죠.”
“이제 나도 자네가 원하는 걸 내줄 차례군.”
“감사합니다.”
이제 녹차를 배울 시간이다.
4대째 내려온 임시백의 녹차였다.
황금 미네랄 녹차의 비밀
임시백이 우리를 다원으로 불렀다.
나는 노해미와 함께 다원으로 갔다.
임시백은 우리에 바구니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우리는 그를 따라 차밭으로 향했다.
임시백이 차밭 한가운데 섰다.
“차는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에 따라 그 맛과 향의 차이가 크지. 하동은 일교차가 크고 습도가 높은 편이라 차가 더 향기롭네. 차를 많이 마셔본 사람이라면 어느 지역에서 나온 차인지도 알 수 있지.”
임시백은 차 나무를 보며 말했다.
“본래 가을 찻잎은 따지 않는 편이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특별한 경우는 언제를 말합니까?”
“선친께서는 가을 잎으로 약을 짓기도 했네.”
“그럼, 이번 찻잎으로 약을 만드는 건가요?”
“아닐세, 오늘은 자네들에게 차를 만드는 법을 알려줄 셈이네. 다만 봄 잎이 아니라 상품이 되긴 힘들겠지. 자네들을 가르칠 목적이네.”
그는 찻잎을 하나 땄다.
“찻잎을 따는 것도 요령이 필요하다네. 내가 찻잎을 따는 모습에서 뭔가 발견한 게 있는가?
나와 노해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차 나무의 가지를 잡고 잎을 따셨어요.”
노해미가 정답을 말하는 학생처럼 말했다.
“자네는 본 게 없는가?”
“엄지와 검지만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찻잎을 따는 모습이 기억납니다.”
“둘 다 제법 눈썰미가 있군. 한 손으로 차나무 가지를 잡고 다른 한 손은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찻잎을 따야 하네. 그래야 찻잎이 다치지 않으니까. 손톱으로 따다 찻잎이 찢어지면 곧 산화가 일어나지. 따는 순간부터 차에 문제가 생기네.”
조심스럽게 찻잎을 거두었다. 그의 말대로 검지와 엄지를 사용하면 찻잎을 손상시키지 않고 딸 수 있었다.
따 모은 찻잎은 가열한 솥단지에 덖었다.
“온도는 250에서 300도를 유지해야 하네. 그래야 찻잎의 수분을 이용해 익힐 수 있네.”
임시백은 대나무 가지를 묶어 만든 솔로 찻잎을 덖었다.
가마솥에서 찻잎의 오묘한 향이 피어올랐다.
5분이 조금 안 됐을 때였다.
그는 솥에서 덖은 찻잎을 꺼냈다.
“초벌 덖음은 차의 거친 맛을 없애는 과정이지.”
그는 덖어 낸 찻잎을 왕골 돗자리 위에 깔아 놓고 힘차게 비볐다. 일명 비비기였다.
“이렇게 비벼줘야 찻잎의 수분 함량을 고르게 할 수 있지. 보통은 멍석에서 비비기도 하네만, 멍석으로 차를 비벼서는 안 되네. 찻잎이 주변의 냄새를 빨아들이기 때문이지. 찻잎에 짚 냄새가 스며들면 차 고유의 맛이 변질될 수 있네.”
찻잎의 조직을 적당히 파괴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차의 좋은 성분이 잘 우러나게 할 수 있었다.
그는 비벼낸 찻잎을 소쿠리에 편 후에 털어 냈다. 공기 중으로 수분을 날리는 일이었다.
덖고 식히는 과정이 반복됐다. 덖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온도도 점차 낮춰줘야 했다.
“향의 변화를 보고 온도가 맞는지 확인해야 하네.”
300도까지 올랐던 온도는 80도까지 떨어져야 했다. 그렇게 여섯 번을 반복한 끝에 차를 덖는 과정이 끝났다.
연두색이었던 찻잎은 덖을 때마다 색이 변했다. 짙푸른 색이었던 찻잎이 검푸르게 되고 나중에 검은색에 가까워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온돌방에 한지를 깔고 찻잎을 고르게 폈다. 말린 찻잎을 재우는 과정이었다.
“최종적으로 말린 녹차의 수분은 4% 정도라네. 그 정도 수분이면 최상급의 녹차가 나오지.”
임시백은 시연을 끝내고 말했다. 그는 일부러 적은 양의 녹차를 만들었다.
“자네들도 한번 해 보게.”
나는 녹차의 명인이 알려준 방법대로 녹차를 만들었다. 임시백은 우리가 녹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을 고쳐주기도 했다.
가장 많이 실수가 나는 부분은 차를 덖는 과정이었다.
“9번이나 찻잎을 덖는 이유가 뭔가?”
임시백이 날 보며 물었다.
“구증구포라는 말을 의식했나 봅니다.”
“자네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 하지만 구증구포를 9번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네. 정성을 다하라는 뜻이지. 찻잎을 많이 덖는다고 좋은 녹차가 되는 것은 아니네. 찻잎에 열을 많이 가할수록 차를 탁하고 저급하게 만든 다네. 중요한 것은 찻잎의 변화를 관찰하는 일이네. 빛과 향의 변화를 보고 덖는 일을 마무리해야 하네.”
한번 차를 만들었다고 기술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었다.
꾸준한 연습이 필요했다. 매일 그의 다원에서 차 만들기를 반복했다.
임시백은 우리가 만든 차의 향을 맡기만 하고도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찾아냈다.
찻잎을 비비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덖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정확하게 집어냈다.
녹차를 만드는 기술이 익숙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자네는 홍차와 우롱차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는가?”
임시백이 나를 보고 물었다.
“찻잎을 발효해서 만든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발효가 아니라 산화네.”
“산화요?”
“차에서 발효란, 차의 떫은맛을 내는 폴리페놀이라는 성분이 가공 과정에서 산화 작용에 의해 다른 성분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네. 이 산화 작용으로 황색이나 홍색을 띠는 성분으로 바뀌면서 색, 맛, 향 등이 변화되는 과정이지. 얼만큼 발효시키느냐, 즉 얼마나 산화시키느냐에 따라 녹차, 홍차, 우롱차 등등으로 부르는 걸세”
임시백은 말을 마치고 시범을 보였다.
녹차를 만들 때와 달리 찻잎을 딴 이후에 바로 덖지 않았다.
찻잎을 한 시간 정도 햇볕에 말리고 난 뒤, 통에 넣고 흔들었다.
“이렇게 흔들어 주면 찻잎이 상처를 입지. 그 과정에서 산화가 일어난다네.”
찻잎을 완전히 부숴 넣으면 산화가 급속하게 일어났다. 완전히 산화된 잎은 홍차가 된다.
잎이 부서지지 않게 약하게 상처를 주면 부분 산화가 되고 이걸 우롱차라고 했다.
채엽과 산화의 과정을 겪고 난 뒤의 과정은 기존의 녹차를 만드는 과정과 동일했다.
한 달 동안 난 임시백의 다원에서 녹차, 우롱차, 홍차를 만드는 법에 대해서 배웠다.
차를 만드는 실력도 한층 나아졌다. 아직 미숙한 실력이었지만, 임시백에게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차 맛이 좋았다. 단순히 실력이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그의 녹차 밭에서 나오는 찻잎이 좋기 때문이었다.
선조 때부터 내려온 유기농을 고수하는 게 비결 같았다.
임시백의 다원에는 유독 그가 정성을 쏟는 구역이 있었다. 다른 녹차 밭과 달리 실로 구분을 해 놓았다.
녹차 밭에서 일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우리가 녹차를 만들 때도 그 구역의 녹차는 딸 수 없었다.
오직 임시백만이 그 구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섬세한 손길로 그 구역에 뭔가를 뿌리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다.
비료는 아닌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액체를 뿌리고는 녹차의 상태를 살폈다.
“그곳에 있는 녹차는 선생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녹차인가요?”
난 궁금한 마음에 임시백에게 물었다.
“내가 특별히 관리하는 녹차 나무지.”
“뭐가 특별한지 물어봐도 될까요?”
“나중에 때가 되면 알려주겠네.”
더 물을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