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수가 나가고, 노해미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임시백 선생님에게 차를 배우고 싶은 생각은 변하지 않으셨죠?”
“그렇습니다.”
그녀가 잠시 뜸을 들였다.
“안 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럴 수도 있겠죠.”
“그래서 말씀인데 저도 한번 알아봐도 될까요?”
“뭘 알아볼지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시겠어요?”
“녹차 기술 말고도 여러 가지 정보들이 있으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나름대로 사람을 만나고 조사를 해 보고 싶어서요.”
노해미가 프레젠테이션 때 발표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시장조사며 관련한 상품까지 다방면으로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임화수와 대화를 끝내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은 내용이기도 했다.
노해미의 능동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조사해도 좋습니다. 조사에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경영지원팀에 요청하시면 됩니다. 제가 말해 두겠습니다.”
“그럼 저도 외근 나가도 될까요?”
노해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든지요. 교통비도 지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디에 갈 계획이죠?”
그녀가 어디로 튈지 궁금했다.
“서울이요.”
* * *
노해미가 서울로 가고, 난 상주로 향했다.
곶감의 명인 황유신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와 올해 곶감 농사를 상의해야 했다.
황유신에게 곶감을 배울 사람들에게도 예고한 상태였다.
곶감 농사를 핑계 삼아 그에게 묻고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상주 황유신의 집은 언제나처럼 편안함을 줬다.
황정아 여사가 반갑게 맞았다.
“선생님은 안에 계시나요?”
말이 떨어지자 무섭게 황유신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냉큼 안 들어오고 뭐 하는 거냐?”
황정아 여사에서 목장에서 나온 선물을 건넸다.
“네, 금방 들어가겠습니다.”
황유신과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다른 스승들과 다르게 편안한 느낌을 줬다.
따지고 보면 과거에 인연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황유신은 목장을 운영하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그의 사전엔 목장, 초원, 젖소, 요거트란 단어는 없었다.
최근 지리산 농부들의 프레젠테이션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말하자 껄껄 웃기도 했다.
그리고 난처한 상황에 직면했음을 고백했다.
“새로운 사업으로 녹차를 결정했습니다. 하동 지역에서 4대째 차를 다루는 분에게 협조를 구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습니다.”
“이름을 말해 보아라.”
황유신은 목청을 높였다.
“하동푸른다원의 임시백이라고 합니다.”
“녹차 명인 임시백이라.”
“선생님도 아시는 분인가요?”
“이름만 들어봤다.”
황유신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순간 황유신이 잘 아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래도 유쾌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황유신이 뜬금없이 말했다.
“내가 너를 왜 제자로 받았는지 아느냐?”
황유신을 이곳에서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무조건 그의 제자가 된다고 자신했다.
“도시 청년을 시골로 끌어들인다는 말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너를 제자를 받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게 뭔가요?”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너에게서 힘을 느꼈다.”
“힘이요?”
“사람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 그 힘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농사는 뛰어난 한 사람의 힘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셨네요?”
그가 가만히 날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처음엔 나도 의심했지.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이 들었다. 너에게 그런 힘이 있다고.”
황유신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네가 걱정하는 일도 문제없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한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니까 기분은 좋습니다. 든든하네요.”
황유신을 보며 새삼 느꼈다. 농촌에 젊은이들이 유입돼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처럼 오랜 경험과 관록이 있는 인물이 필요함을.
진정한 힘은 한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경험이 많은 중장년층과 패기가 넘기는 젊은이들이 어우러져야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가 나에게 말한 힘은 바로 이것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