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해미는 받는 선물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낮에 하동푸른다원에 상심했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동료들의 따뜻한 마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선물 포장지를 뜯으려는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노해미의 아버지 노경식이었다.
“어쩐 일이세요?”
노해미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곳에 온 뒤로 처음으로 온 전화였다.
“우리 딸 잘 지내는지 걱정돼서 전화했지.”
노경식은 일부러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수십 번을 참고 참다 한 전화였다.
딸의 생일인 오늘은 목소리라도 들어야 했다.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아빠는 밥 잘 챙겨 먹고 있어요?”
“오랜만에 전화해서 잔소리하기는.”
“내가 잔소리 안 하면 누가 해요.”
“그건 그렇지만.”
오랜만에 듣는 딸의 목소리가 여간 반가웠다.
“미역국은 먹었냐?”
“아니요, 아빠도 없는데.”
노해미의 어머니는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노경식은 딸을 힘들게 키웠다.
딸의 생일이면, 그는 항상 미역국을 끓였다.
“내가 지금이라도 끓여서 갈까?”
주방에 아침에 끓인 미역국이 있었다.
“됐어요, 그러지 말고 나 쉬는 날 놀러 오세요.”
“그럴까?”
노경식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염소들은 잘 있어요?”
“잘 있지. 닭하고 오리도 들였다.”
“왜 그러셨어요? 힘들게.”
“딸이 없으니까 적적해서 그렇지.”
부녀간의 긴 수다가 이어졌다. 노해미는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말했다.
노경식은 딸이 농부가 되겠다며 시골 회사에서 인턴을 하네마네 할 때 너무나 상심했었다. 도시로 나가 성공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딸이 행복한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 * *
노해미의 생일 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감동적인 생일 파티였다. 깜빡 잘못했으면 놓칠 수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이 하나로 뭉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해미의 말처럼 나 역시 모두에게 고마웠다.
난 노해미에게 선물로 다기를 주었다.
사소한 선물이지만 위로가 되길 바랐다.
가장 큰 선물은 임시백 선생을 설득하는 일일 것이다.
머릿속에 임시백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리부리한 눈과 나무처럼 단단해 보이는 이미지.
그를 설득해야 했다. 하지만 도통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았다.
목이 탔다. 물을 한잔 마시려던 순간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차가 보였다.
포도 농사를 짓는 임화수가 준 선물이었다.
포장이 어딘가 익숙했다.
그때 당시엔 자세히 볼 생각도 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난 종이봉투에 박힌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동푸른다원]
임화수가 내게 준 차는 하동푸른다원에서 나온 물건이었다.
임화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쩐지 임시백과 닮은 느낌이었다.
성도 같았다.
확인이 필요했다.
당장 임화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풀어야 할 숙제
예상이 들어맞았다. 임화수와 임시백은 형제지간이었다.
다음날 그가 우리 목장을 찾았다.
“잘 지내시지요?”
“덕분에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평소와 달리 임화수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임시백을 처음 봤을 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임화수와 대면한 경험 때문이었던 것 같다.
형제간에 외모가 흡사했다.
통화로는 선물로 준 차의 출처만을 물었다. 그는 형님이 재배하는 녹차라고 했다.
자세한 내용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한 상태였다.
“그런데, 저희 형님과 관련해서 상의할 게 있다는 게 뭔가요?”
그는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젯밤부터 많이 궁금했다는 눈빛이었다.
부리부리한 눈도 임시백과 닮았다.
“임시백 선생님에게 차를 배우려고 합니다.”
“저희 형님에게 차를요?”
임화수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문을 열었다.
“하동푸른다원은 저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입니다. 지금은 장손인 형님이 물려받아 운영하는 중이죠.”
“잘 알고 있습니다. 하동푸른다원이 4대째 이어지는 일이란 사실을요.”
“말씀대로 4대째 내려온 일이죠. 형님은 가업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높은 사람입니다.”
“저도 선생님을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가업에 대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거절당했겠네요.”
임화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거절하셨습니다.”
“그러고도 남았을 겁니다. 형님은 다원이 집안의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하나뿐인 아들에게 가업을 잇게 할 계획이기도 하고요.”
“임 선생님의 아드님이 차를 배우고 있군요.”
“그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임화수는 미간을 찡그렸다.
“문제요?”
“조카 녀석이 가업에 관심이 없어서요. 그 일로 부자지간에 사이가 틀어졌죠. 물론, 형님은 아직 욕심을 버리지 못했지만.”
“그렇군요.”
“그래서 더 싫어했을지도 모릅니다. 정작 가업을 이어야 할 자식은 오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외간 사람이 가업을 배우겠다니 역정이 나셨을 겁니다.”
임화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포도를 부탁했을 때도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했다.
지금도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솔직한 사람에겐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선이다.
“혹시, 제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말씀을 꺼냈을 때부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최대한 도울 방법이 없을지 말이죠.”
임화수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런데 차는 왜 배우시려고 합니까? 목장 운영도 잘 된다고 들었는데.”
“녹차와 유제품을 이용한 제품을 만들고 싶어서입니다.”
그에게 구구절절이 이유를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그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준이어야 했다.
“그런 이유 때문이군요. 당연히 큰 그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굳이 물었던 이유는 요즘 녹차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다들 힘들기 때문입니다. 포도 농사를 짓는 저보다 울상이니까요.”
“농약 파동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역시, 알고 계셨군요.”
임시백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며 함께 알게 된 사실이었다.
최근 불기 시작한 웰빙 열풍과 함께 차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농부들도 웰빙 열풍을 타고 상품을 만들었다. 잘나가던 녹차가 갑자기 추락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바로 녹차 농약 파동이다.
시작은 텔레비전 르포 프로그램에서 나온 한 장면이다. 차밭에 농약을 뿌리는 장면이 방영된 것이다. 그 뒤로 농약 논란이 일었다.
1kg에 3천 원이던 생엽이 8백 원까지 떨어졌다.
농가에선 인건비도 건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형님도 피해를 받았으니, 다른 농가는 아마 말도 못 할 겁니다.”
하동푸른다원은 친환경 인증까지 받았다. 친환경 인증을 받은 녹차 농가도 소비자들의 불신은 피해 갈 수 없었다.
농약 파동이 녹차 농가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전 개인적으로 김덕명 씨를 높게 평가합니다. 나이를 떠나서 말이죠. 김덕명 씨 같은 청년이 농촌에서 있어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요.”
“감사합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