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5. (125/205)

연화 스님은 친절하게도 전화까지 해주었다.

녹차를 재배하는 분은 하동 사람이었다.

하산과 동시에 찾아갈 예정이었다.

지리산에서 내려가는 발길이 가벼웠다.

노해미도 기분이 좋은지 웃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노해미에 대해선 단편적인 정보만 있었다.

무료함을 달랠 겸 그녀에게 물었다.

“해미 씨는 중어중문학과를 나왔죠?”

“그걸 기억하고 계셨어요?”

자기소개서에 쓴 글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귀농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지리산 농부와 한 식구가 되었다.

“중국에 관심이 많았나 봐요?”

“어릴 때 무협지를 좋아했어요.”

“무협지요.”

“아버지가 무협지 광팬이었거든요. 무협지 덕에 중국문화에 관심이 생겼던 거 같아요. 전공도 중어중문학과를 선택했으니까요.”

“전공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는데 아쉽지는 않아요?”

“전공과 하는 일이 같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건 해미 씨 말이 맞습니다.”

노해미가 가족 사항을 기재했던 게 떠올랐다.

가족은 오직 아버지 혼자뿐이었다.

무협지를 좋아하는 아버지였다.

“그럼 아버지는 지금 뭘 하시나요?”

“제가 어릴 때부터 산양를 키우셨어요. 지금도 녀석들과 씨름하고 계시겠죠.”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뭘요?”

노해미가 고개를 돌렸다.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미 씨가 농부가 된걸.”

“저희 아버지 꿈이 뭔지 아세요?”

“글쎄요?”

“제가 통역사가 되는 거예요.”

“그럼 아버지께서는 농부가 되는 걸 반대하셨겠네요.”

“반대 정도가 아니었어요. 만약 농부가 된다면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그런 일이.”

“시간이 지나면 아버지 마음도 풀릴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무척 화나 있는 건 사실이지만.”

노해미는 밝은 얼굴로 말했다.

힘들었던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해미 씨는 왜 농부가 된 거죠?”

그전에 묻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인턴십에 찾아온 사람들은 귀농학교의 추천을 받은 사람들로만 구성했다.

사연을 듣고 농부가 된 까닭이 궁금해졌다.

“대표님이 그런 질문을 하니까 이상하네요.”

노해미는 웃으며 말했다.

“농부가 된 이유는 단순해요. 어릴 때부터 흙을 밟고 살았어요. 대학 때문에 도시로 나갔지만, 아스팔트는 영 적응이 안 되더라고요. 도시의 바쁜 삶도 별로였고요.”

“농부가 더 바쁘지 않나요?”

엷은 미소를 띠고 그녀에게 물었다.

“바빠도 재미있어요. 지금은 내가 원하는 일까지 하고 있고요.”

노해미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순간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는 상상을 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대표로서 직원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이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 *

하동푸른다원에 도착했다.

야트막한 산을 배경으로 차밭이 펼쳐져 있었다.

다원 초입에 감나무와 탱자나무 등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여유롭게 아름다운 풍광이었다.

연화 스님이 추천서를 건네며, 다원을 운영하는 분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유서가 깊은 곳이었다. 4대째 내려오는 곳이었다.

하동푸른다원의 1대 대표는 한학자 임무호 선생이었다.

1938년 야산을 개간해 차나무와 과수를 심었다고 전했다.

현 하동푸른다원의 임시백은 임무호 선생의 증손자다.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차밭에 3만 평의 밭을 더 늘리면서 다원을 키웠다.

80년 넘는 긴 세월을 이어온 곳이다.

차밭의 규모와 달리 임시백의 집은 단출했다.

“그런데 이 선물 괜찮을까요?”

“제 감을 한 번 믿어보세요.”

노해미는 집으로 가는 길에 선물을 사자고 했다.

안동 소주였다. 50도가 넘는 독주.

그녀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술이라고 했다.

“실례합니다.”

“누구시죠?”

중년의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임시백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약속하셨나요?”

“네, 약속했습니다.”

“잠시만요.”

그녀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한 일이었다. 긴장감이 느껴졌다.

가방 속에 있는 연화 스님의 추천서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중년 남자가 등장했다.

“자네가 김덕명인가?”

임시백이었다.

“네, 제가 김덕명입니다.”

인사를 드리고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향긋한 차향이 느껴졌다.

처음 우리를 맞이했던 중년의 여자가 차를 내왔다.

“들어 보세요.”

임시백은 차를 권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임시백은 나무처럼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부리부리한 눈이 인상적이었다.

“그게 뭔가?”

임시백은 내 옆에 있는 종이백을 보고 물었다.

“제 작은 성의입니다.”

“성의라, 한번 봐도 되겠나?”

그에게 종이백을 건넸다.

노해미는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가 포장을 열었다.

“술이라, 그것도 독주라니. 잘못 짚었군.”

“네?”

“난 독주를 마시지 않네.”

노해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연화 스님이 추천서를 썼다고 들었네. 한 번 볼 수 있겠나?”

“여기 있습니다.”

그에게 연화 스님의 추천서를 건넸다.

밀봉된 편지였다.

김꽃님 할머니에게 추천서를 받았을 때처럼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가 밀봉된 봉투를 뜯고 추천서를 꺼냈다.

추천서는 읽을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리산 농부의 생일상

“지장사에서 양봉을 배운 사람이 자네인가?”

임시백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네, 제가 지장사에서 양봉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럼, 자네가 소동을 일으켰다는 장본인이군.”

“소동이요?”

“묘원 스님에게 자네의 이야기를 들었네.”

묘원 스님은 지장사의 이인자였다. 그가 말하는 소동은 내가 동굴로 갔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지장사 양봉 전수자 매화 스님이 낸 숙제였다.

동굴에서 나오던 날, 지장사 스님들이 모두 날 찾아왔었다.

묘원 스님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때의 상황이 스님에게는 못마땅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일이 소동으로 전달된 것을 보니.

묘원 스님도 어쩌면 임시백의 오랜 단골이라든지 하는 인연이 있는 모양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난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세한 사연을 말한다고 해도 변명처럼 들릴 수 있었다.

가급적 말을 삼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오해라, 그럴 수도 있겠지.”

임시백이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제가 선생님을 찾아온 이유는 녹차를 배우고 싶어서입니다.”

임시백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알고 있네. 연화 스님의 추천서에도 그 말이 적혀 있었으니까.”

임시백은 고개를 돌려 노해미를 바라보았다.

“자네도 같이 녹차를 배울 생각인가?”

“네, 저도 함께 배우고 싶습니다.”

노해미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젊은 사람이 녹차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궁금하군.”

“요즘 젊은 사람들도 차에 관심이 많습니다. 녹차를 이용한 다양한 상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다양한 상품이라니 그게 뭔가?”

“저희는 현재 목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녹차와 우유를 결합한 제품이나 치즈를 만들어 볼 계획도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도 녹차에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노해미의 말에 임시백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난 그런 제품엔 관심이 없네.”

“그래도 기회를 주신다면.”

난 노해미와 눈을 마주쳤다. 그만 말해도 된다는 신호였다.

“자네들 이야기를 들은 건 연화 스님과의 인연 때문이었네.”

임시백과 마주했을 때부터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마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자네들이 아는지는 모르지만, 하동푸른다원은 4대를 이어온 유서 깊은 곳이네. 지금까지 한 번도 외부에서 제자를 들인 적이 없네. 그래서 내 결론은.”

“정말 잘할 자신 있습니다. 저희에게 한 번만 기회를...”

노해미가 임시백의 말을 끊고 말했다.

난 그녀의 팔을 잡았다.

“더 할 말이 없고만. 난 일이 바빠서 먼저 일어나겠네. 그리고 이 선물은 도로 가져가게나. 우리 집에선 이걸 마실 사람도 없으니까.”

임시백은 선물을 물렸다.

우린 하동푸른다원을 나왔다.

일이 잘 풀리나 싶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과 부딪혔다.

연화 스님의 추천서는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화를 불러일으켰다.

사찰도 하나의 조직이었다. 그 안에서도 다양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을 터였다.

지장사 이인자 묘원 스님이 안 좋은 감정을 가졌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다원을 나온 이후 노해미는 말이 없었다.

낯빛이 창백했다.

“괜찮아요, 해미 씨. 너무 실망할 거 없어요.”

“죄송해요, 제가 다 망쳤어요.”

떨리는 목소리였다.

노해미의 시선이 선물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감을 믿어보라며 샀던 선물이었다.

“오늘은 목장에 잠깐 가 있을래요? 전 사무실에 들러서 할 일이 좀 있어요.”

“네.”

한숨 섞인 대답에 마음이 무거웠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