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노해미와 약속장소에서 만났다.
등산화에 등산복 차림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산행은 정말 간만인 거 같아요.”
“저도 간만이네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반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를 가는 건가요?”
노해미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지장사라는 사찰에 가는 길입니다.”
“그 사찰에서 녹차라도 키우나요?”
“아니요. 녹차가 아니라 벌을 키우죠.”
“벌이요?”
지장사 주지인 연화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때 항상 녹차를 마셨다.
다른 사찰에서도 녹차를 많이 마셨지만, 연화 스님의 녹차 맛은 일품이었다.
녹차를 공급받는 곳이 따로 있다는 말을 들었다.
누구에게 공급받는 녹차인지 궁금했다.
확인해 보고 싶었다.
“저기 보이는 게 지장사인가요?”
노해미는 손가락으로 사찰을 가리켰다.
“네, 그곳이 바로 지장사입니다.”
곧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사무국 비구니가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오랜만이네요.”
“네, 잘 지내셨나요?”
“수행하는 저희야 매일 같은 날이죠.”
“연화 스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노해미는 신기한 듯 사찰을 살폈다.
“이곳 사람들을 잘 아시나 봐요.”
“네, 저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죠.”
주지 스님을 만나러 갔던 사무국 비구니가 도착했다.
“따라오시지요.”
우린 그녀를 쫓아 주지 스님의 방으로 갔다.
“김덕명 씨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셨나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같이 오신 분은 누구인가요?”
“저와 함께 일하는 동료입니다.”
노해미가 꾸벅 인사했다.
주지 스님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테이블에 여러 가지 모양의 밀랍 양초들이 놓여 있었다.
“양초는 아주 잘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뵙자고 했을까요?”
그녀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주지 스님과 오랜만에 차담을 나누고 싶어서 왔습니다.”
“차담이라!?”
녹차의 맛
“차를 마시고 싶어 왔다니 좀 의외네요.”
연화 스님은 엷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차를 대접해 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죠. 마침 저도 차를 마시려던 참입니다.”
연화 스님은 선반 위에 있던 다기를 꺼내 우리가 마주한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요즘에는 사찰에서도 편리하게 찻물을 끓이는 시대니까.
“잠시 기다리시지요.”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잠자코 있던 노해미가 입을 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차를 언제부터 마신 건가요?”
뜬금없는 질문인 것 같기는 하지만 노해미의 질문은 녹차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연화 스님은 조용히 웃다가 조근조근 차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때(828년)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온 대렴공이 녹차 씨앗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왕이 그 녹차 씨앗을 지리산 자락에 심게 했다는데, 그곳이 바로 지리산 남쪽 하동의 쌍계사 일대라고 한다.
연화 스님은 또 차나무가 원래 신라 땅에 자생했다는 설도 있다고 덧붙여 말해주었다. 중국에 신라 특산품으로 삽살개와 차를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우리나라의 차 역사도 이미 천 년을 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 들여왔던 우리나라에서 자생했던, 차는 이미 오랫동안 우리와 함께한 ‘문화’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차’는 일상에서 동떨어진 느낌이지만 지리산 농부들이 이제 차를 본격적으로 대중화시킬 예정이라는 거다. 품질 좋은 하동의 녹차와 지리산 농부들 유제품이 만나면 큰 시너지가 날 것 같았다. 녹차를 친숙한 아이템으로 개발해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는 의지가 불끈 솟았다.
“그런 기록이 있는 줄 몰랐어요.”
노해미는 신기한 듯 눈을 깜빡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연화 스님이 적당한 온도의 뜨거운 물을 다기에 넣고 찻잎을 우렸다.
그 사이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가 따라내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차를 마실 그릇을 데우는 일이었다.
찻잔을 데우면 일정한 온도로 차를 즐길 수 있었다.
“신라 사람들은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 차를 마셨고, 고려 사람들은 깨우침을 얻으려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욕심을 버리려고 차를 마셨답니다.”
연화 스님은 이야기를 마저 들려주셨다.
“요즘 사람들은 건강해지려고 차를 마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스님의 말을 받았다.
뭔가 진정한 차담을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첫 잔을 내주면서 마셔볼 것을 권했다.
코로 차향을 먼저 음미한 뒤 한모금을 마셔 보았다.
구수하면서도 쌉싸름하고, 조금은 시고 짭쪼롬하기도 한 복잡 미묘한 맛이었다.
차를 따라 주면서 연화 스님이 말했다.
“전 가끔 꿀을 넣어 마시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게 한번 마셔볼 수 있을까요?”
노해미가 궁금하다는 듯이 요청했다.
지장사 꿀을 넣은 녹차였다. 꿀은 단맛을 살짝 느낄 정도로만 넣었다.
녹차의 맛과 향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드시지요.”
연화 스님은 완성된 두 번째 녹차를 내주었다.
찻빛은 약간의 푸른색을 띈 노란색이다.
싱싱한 찻잎의 향에 꿀의 달콤함까지 느껴졌다.
“맛이 어떤가요?”
“정말 맛이 좋습니다. 처음 차는 녹차 본래의 맛이 기가 막히고, 두 번째 차는 지장사 꿀과 함께하니 더욱 풍미가 깊어졌습니다.”
지장사에 찾아오기를 잘 한 것 같다.
가끔씩 내어 주시던 차가 참 인상적이었다.
이 맛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다른 사찰에서도 차를 많이 마셔봤지만, 지장사의 녹차와 비교할 수 없었다.
“기본 맛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연화 스님의 말에 노해미가 눈을 크게 떴다.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이죠. 5원미라도 부릅니다. 여기에 떫은맛, 매운맛, 식감, 촉감 등이 더해져 차의 맛을 결정합니다. 그중에서 핵심은 감칠맛, 떫은맛, 쓴맛이죠. 그 맛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면서 녹차의 맛이 나는 겁니다.”
“처음 알았어요. 그런 맛들이 어우러져 녹차의 맛을 이루는지는. 꿀을 넣어서 그런지 제 입맛에 딱 맞아요. 머리도 맑아지는 느낌이고요.”
노해미의 말에 연화 스님이 미소 지었다.
연화 스님의 말대로 감칠맛, 떫은맛, 쓴맛은 차 맛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다.
특히, 감칠맛이 중요하다. 찻잎의 아미노산 성분이 감칠맛을 낸다. 떫은맛과 쓴맛은 카테킨과 카페인 성분 때문이다.
좋은 녹차일수록 감칠맛이 강하고 떫은맛과 쓴맛이 덜하다.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아미노산 함량이 높아진 것이다.
아미노산은 단백질을 구성하는 재료로 생명의 근원이 되는 영양소이다.
뇌 신경세포와 신경전달물질을 만드는 데도 아미노산이 필요하다.
노해미는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라고 했다.
단순한 기분이 아니다.
실제 녹차의 성분이 작용한 것이다.
“그나저나 하시는 일은 잘 되고 있나요?”
연화 스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차를 마셔서 그런지 마음도 넉넉해진 것 같았다.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두 염려해주신 덕분입니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일이 잘되는 건 다 김덕명 씨 때문이죠.”
“최근엔 목장 일도 겸하고 있습니다.”
“목장이요? 젖소를 키우는 목장 말인가요?”
“네, 젖소를 키우고 있습니다.”
“생각도 못 했습니다.”
연화 스님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목장에서 요거트와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습니다. 양봉에서 얻은 꿀을 넣어서요. 스님께서 녹차에 꿀을 넣듯이.”
“그렇게도 연결이 되는군요. 양봉으로 얻은 밀랍으로 양초도 만드시고, 아무튼 대단합니다.”
“연화 스님에게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가요?”
그녀가 차를 마시며 물었다.
“연화 스님이 드시는 녹차는 한 곳에서만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네, 오랜 단골이죠. 벌써 10년도 넘었으니까요. 그곳 녹차가 제 입맛을 사로잡았으니까요.”
“그곳이 어디인 줄 알 수 있을까요?”
연화 스님은 갑자기 껄껄거리며 웃었다.
“왜 그러시죠?”
웃는 이유가 궁금해 물었다.
연화 스님은 찻잔을 내려놓고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차를 키우실 생각입니까?”
“네, 맞습니다.”
“김덕명 씨는 독특한 매력이 있습니다.”
“매력이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매력이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지장사에서 양봉을 배울 때도 그녀의 협조가 있었다.
이번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지장사에서 양봉을 배웠던 것처럼 녹차도 배울 생각인가요?
“그럴 생각입니다.”
“이번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대대로 녹차를 만든 분입니다. 자식 말고는 제자를 두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런가요?”
“필요하다면 추천서는 써 드릴 수 있습니다. 김덕명 씨가 지장사에 처음 왔을 때처럼.”
그땐 매화 스님에게 양봉을 배우려고 했다.
매화 스님의 양모인 김꽃님 할머니로부터 추천서를 받았다.
연화 스님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스님께서 그리해주신다면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김덕명 씨와 지장사는 긴밀한 관계니까요.”
연화 스님의 시선이 밀랍 양초로 향했다.
연화 스님은 추천서를 썼다.
그녀가 추천서를 쓰는 동안 노해미와 난 사찰을 잠시 거닐었다.
비구니 스님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노해미가 놀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신기하네요?”
“뭐가요?”
“이곳에 있는 모든 스님이 대표님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요.”
난 그녀에게 지장사에서 양봉을 배웠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노해미는 매화 스님을 궁금해했다.
나도 안부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다. 벌을 보러 간 것이 틀림없었다.
연화 스님은 하얀 봉투를 건넸다.
“추천서와 연락처입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행운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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