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이주 뒤 화창한 토요일 오후였다.
고대하던 체험 목장을 시험 운영했다.
커다란 셔틀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양초 공장 사람들의 발이 돼주고 있는 버스였다.
언제나처럼 이춘배 어른이 버스를 몰았다.
버스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모자에 선글라스를 쓴 할아버지부터 색색의 옷을 입을 아이들까지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을 초대했다.
금민서가 명연기를 펼쳤던 장소는 이제 명소가 된 듯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곳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목장 체험에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었다.
송아지에게 우유를 주는 것부터 유제품을 만드는 일까지 다양했다.
목장 체험의 백미는 요거트 만들기였다.
다 같이 모두 모여 요거트를 직접 만들었다.
주명희 여사와 설민주가 요거트 선생님이 되었다.
그들에게 요거트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티벳 버섯 유산균으로 우유를 발효시켜 만드는 방법이었다.
누구나 쉽게 집에서도 좋은 요거트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목장에서 갓 나온 우유에 티벳 버섯 유산균을 넣어 자기만의 요거트를 만들도록 했다. 목장에서 만들어 집에 가져가면 요거트로 먹을 수 있을 터였다.
요거트 체험을 마치고 우유 빙수가 나왔다.
물이 아닌 우유를 얼린 빙수였다.
그 위에 여러 가지 과일과 지리산 농부들의 꿀을 올려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블루베리, 수박, 포도, 복숭아 등 과일은 모두 제철에 먹을 수 있는 과일들이었다.
정길산을 비롯한 지역 농부들과 협업한 결과물이었다.
우유 빙수 위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올려 먹었다.
“연유 아이스크림보다 더 맛있네요.”
목장 체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한입으로 하는 말이었다.
과일 빙수는 인기가 좋았다. 목장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목장 체험은 체험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은 목장 제품의 판매였다. 목장 우유, 티벳 버섯 유산균은 한 세트로 팔았다.
목장에서 배운 대로 집에서도 요거트를 만들어 볼 것을 권했다.
더불어 꿀과 프로폴리스 그리고 블루베리도 함께 판매했다. 목장 체험은 성공적이었다.
처음엔 고정 고객들에게 잡겠다는 아이디어에 시작한 일이었다.
그 일은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에 학교에 유제품을 공급할 수 있었다.
우린 지역 기반으로 고정 고객을 만들어 냈다.
부산과 대구, 광주까지 우리 제품을 공급할 곳들을 늘려나갔다.
탄탄하고 견고한 바탕을 만든 것이다.
* * *
여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목장 안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체험을 온 사람이 아니었다.
모두 지리산 농부들의 식구들이었다.
사무실과 목장을 담당하는 동료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양초 공방의 사람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 인원이 한자리에 모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단합 대회이자 서로를 격려하는 자리였다.
“오늘 회식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난 동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목장의 고정 고객이 생겼고, 운영도 안정이 돼가고 있습니다. 모두 여러분들이 애써주신 덕분입니다.”
목장의 매출이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이런 상태라면, 나병수의 말도 안되는 조건도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땀으로 이뤄낸 결과였다.
“난 하나도 힘들이지 않았어. 목장이 잘 돼야 2호 목장도 생길 거니까.”
설강인이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의 말에 동료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드십시오.”
화기애애한 회식 자리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한기탁과 함께 술잔을 기울일 때였다.
비틀거리는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목장에서 블루베리를 키우는 김상철이었다.
“대표님의 꿈이 뭐라고 하셨죠?”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지만 발음은 꽤 정확했다.
“상철아, 취했으면 들어가서 자라.”
옆자리에 있던 한기탁이 말했다.
김상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청년들이 농촌에서 희망을 찾는 거라고 하셨죠?”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왜 청년을 안 모으세요?”
한기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괜찮다며 한기탁을 말렸다.
“괜찮아요, 취해서 그런 건데.”
김상철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들 이렇게 많으면 뭐 해요. 정작 청년들은 몇 명 되지도 않잖아요. 진짜 청년들을 모을 마음이 있기나 한 건가요?”
“야, 김상철!”
멀리서 보고만 있던 설민주도 나섰다.
설민주가 김상철의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김상철은 그 자리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천희석이 다가와 쓰러진 그를 업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철이가 주사가 있는 줄 몰랐네.”
한기탁이 혀를 차며 말했다.
“대표님 괜찮냐?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한기탁은 내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설마, 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 술 취한 김상철 말에.”
“제가 그래 보여요?”
“응, 무척 그래 보여.”
한기탁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회식이 끝나고 회의 소집해 주세요. 지리산 농부들의 모든 간부님들을.”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기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운명을 바꿀 이야기요.”
농부들의 프레젠테이션
회식이 끝난 자리, 지리산 농부들의 간부들만 남았다.
“오늘 같은 날 무슨 회의를 하자는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긴급 간부회의였다.
참석자는 지리산 농부들의 간부들이었다.
양봉을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 젖소 목장의 설강인, 경영지원팀의 한기탁, 쇼핑팀운영팀의 백민석이 한자리에 모였다.
“새로운 농업에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방향에 대해 고민되는 지점이 있는데, 여러분들과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김상철이 한 말 때문에 그러는 거야?”
한기탁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꼭 그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닙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이 애써 주셨기에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애써줘서 가능하다고?”
설강인이 물었다.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르신 덕분에 젖소 목장이 안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인정해준다니 나야 고마운 일이네만, 내 덕이라기보다 자네의 공이 크지. 단일 목장이며 유제품까지 모두 자네의 아이디어였으니까. 그리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걸세.”
그가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네 말대로 목장과 양봉장 그리고 양초 공방도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건 사실이야. 새로운 일을 구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이유가 궁금해. 어떤 이유로 새로운 농업에 도전하고 싶은지?”
한기탁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곶감 농사로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황유신 선생님에게 곶감을 배울 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부자 농부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이 도시가 아닌 농촌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죠.”
“이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한기탁이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듯이 말했다.
모두 수긍한다는 눈빛이었다.
“이 상태로 가면 부자 농부의 꿈을 이룰 순 있겠지요.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요한 게 뭔데?”
“청년들이 농촌에서 희망을 찾을 구체적인 방안입니다.”
“구체적인 방안?”
“매력적인 일자리와 교육 시스템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희망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그게 지금 가능한 일인가?”
한기탁이 의문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지금 당장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목표를 세우고 준비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일을 준비하겠다는 거야?”
백민석이 물었다.
“맞아. 지금까지는 기반을 닦는다고 생각하고 열심히만 해왔는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으니까. 새롭게 시작하는 일은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하고 방향을 같이 만들어 갔으면 좋겠어.”
“그럼 뭐 새로운 일을 하자는 건데... 생각해 놓은 거라도 있어?
“이번엔 제가 정하지 않을 겁니다.”
모두를 바라보며 말했더니 놀란 표정들을 지었다.
“그럼 누가 정하는데?”
“아이디어를 받아 함께 고민해 봤으면 합니다.”
“아이디어? 누가 아이디어를 내는데?”
“인턴십에 참여했던 청년 농부들이요.”
다들 생각지 못했는지 저마다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이디가 채택되면 그 일을 하는 건가?”
“사전 조사와 준비 기간을 가져야겠지요.”
“그럼 그 일은 새로 사람을 뽑을 생각인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경영지원팀장 한기탁이 궁금한 게 많은지 질문을 쏟아 냈다.
“가장 좋은 아이템을 우리가 함께 뽑고, 뽑힌 아이템 당사자와 내가 함께 시작해볼 생각이야.”
“그럼, 박태호가 뽑히면 내 팀원은 없는 거네.”
한기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럴 수도 있죠.”
난 웃으며 말했다.
“천희석을 뽑아 가면 쇼핑몰운영팀에 나 혼자 남는 거고.”
백민석의 목소리는 갑자기 힘이 빠졌다.
“설민주를 뽑아 가면 나도 좀 서운하겠군.”
설강인도 거들었다.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상의를 하는 것이고, 함께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동의를 구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도 심사를 같이 하는 거겠지?”
설강인이 물었다.
“네, 여기 모인 모든 인원이 함께 심사를 하고 결정하길 희망합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동의를 못 할 것도 없네.”
설강인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동의가 이어졌다.
이렇게 지리산 농부들의 모든 간부는 새로운 일을 하는 것에 동의했다.
한기탁이 청년 농부 인턴십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공지사항을 알렸다.
새로운 사업 아이템 준비를 과제로 주었다.
처음에 공지를 듣고 다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의지에 불타올랐다.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데 동기부여가 되는 것 같았다.
자신이 꿈꾸는 농업 분야를, 지리산 농부들의 이름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대표와 함께.
전폭적인 지원이 있을 거라는 말에 눈빛을 반짝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