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 (115/205)

마지막 촬영을 앞둔 상황이었다.

윤종후 피디는 대본을 살피고 있었다.

목장을 배경으로 여자 주인공이 혼자 밥을 먹는 장면이었다.

서울에서 살던 여자 주인공이 갑작스럽게 시골에 내려온 상황이었다.

여자 주인공은 서울에서 독립 영화를 제작 중이었다.

부족한 제작비에 떡볶이를 먹어가며 간신히 영화를 만들고 있던 상황에서 큰 위기가 닥쳤다.

주연 배우가 잠수를 타 버린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자친구에게도 이별을 통보받았다.

여자 주인공은 영화 제작을 잠시 멈추고 지인의 목장에 내려와 심란한 마음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준비는 다 됐어?”

윤종후 피디가 조연출 심형선을 보고 물었다.

“네, 준비됐습니다.”

푸른 초원 위에 어마어마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먹어도 될 정도 많은 양이었다.

윤종후 피디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심형선이 윤종후를 보고 물었다.

“아니야, 됐어. 배우들 스텐바이 시켜.”

“네, 준비하겠습니다.”

윤종후는 밥 먹는 장면이 영 내키지 않았다. 실패와 시련의 아픔까지 가진 여자 주인공에게 맞지 않는 설정이었다.

시청률이 잘 나와서 메인 작가에게 최대한 맞춰주고 있긴 한데, 이건 상식적으로 좀 아닌 것 같았다.

“준비됐습니다, 피디님.”

심형선은 윤종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오늘따라 윤종후가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었다.

촬영 일정이 빡빡했다.

심형선은 무사히 촬영이 끝나기만 바랐다.

여자 주인공 금민서가 준비를 마쳤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모두 피디의 사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액션.”

금민서가 불판에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이 스텝들의 침샘을 자극했다.

“컷!”

윤종후 피디가 컷을 외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금민서도 자신의 실수를 아는 것 같았다.

음식을 맛있게 먹다, 눈물을 터뜨려야 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릴 타이밍을 놓쳤다.

“죄송합니다.”

금민서는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카메라가 다시 돌아갔다.

“컷!”

계속 엔지였다.

윤종후 피디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인상이 험악해져 있었다.

그림이 영 나오지 않았다.

그는 금민서에게 다가갔다.

“뭐가 문제죠?”

“죄송합니다. 맛있어서 우는 건지, 슬퍼서 우는 건지 구분이 안 간다는 지문이 자꾸 걸려서요.”

“그냥, 슬퍼서 우는 걸로 갑시다.”

윤종후는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갔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다시 엔지가 이어졌다.

윤종후는 컷을 외치고, 대본을 움켜쥐었다.

그는 대본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촬영을 잠시 멈췄다.

윤종후는 쉐도우 작가 성은정을 찾았다.

“성작가, 이 장면 좀 바꾸자.”

피디가 쉐도우 작가를 쓴다는 건 메인 작가와 싸울 것을 감수하는 일이다. 피디가 쓸 수 있는 최후의 히든카드였다.

화면만 잘 나오면 작가도 그냥 넘어갔다. 피디도 그 정도 재량권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고 있었지?”

“네, 잘 보고 있었어요.”

“문제가 뭔지도 파악했고?”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영감을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우리 시간 없는 거 잘 알지? 최대한 빨리.”

성은정은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윤종후는 성은정을 신뢰했다. 성은정은 단막극 공모전을 통해 드라마 작가로 데뷔했다.

윤종후도 그녀가 쓴 대본을 봤다. 감각이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쉐도우 작가로 기용한 것도 바로 그였다.

“다 됐습니다, 피디님.”

성은정은 쪽대본을 윤종후에게 내밀었다.

윤종후는 대본을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메인 작가가 설정했던 것과는 스타일이 달랐다.

“이걸로 가보지.”

짜증만 내던 윤종후의 얼굴에서 미소가 보였다.

성은정의 표정도 밝았다.

윤종후는 조연출 심형선에게 쪽대본을 주며 상황을 설명했다.

심형선은 빠르게 일을 처리했다.

금민서도 대본을 보며 감정을 가다듬었다.

푸른 초원에 거하게 벌려 놓았던 밥상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장소도 목장의 하얀 울타리가 보이는 곳으로 바뀌었다.

색색이 돌아가는 바람개비가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냈다.

바람개비들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의자에 놓였다.

여자 주인공 금민서가 앉을 곳이었다.

의자 위에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성은정은 최대한 작가의 의도를 살리면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냈다.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슬프게 우는 장면을 만들었다.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배경을 등지고, 여자 주인공이 홀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이었다.

촬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연출 심형선이 아이스박스를 옮기고 있었다.

“조연출님.”

성은정이 심형선을 불렀다.

“무슨 일이죠?”

“아이스크림은 그거 말고 다른 거 쓰면 안 될까요?”

“다른 거요? 여긴 아이스크림 가게도 없는데.”

“이 목장에 있어요. 그리고 그걸 먹어야 엔지가 나지 않을 거예요.”

“엔지가 나지 않는다고요?”

“진짜 맛이 좋다는 얼굴이 나올 거예요. 그러다 슬픈 연기를 지으면 한 번에 끝날 수도 있어요. 직접 먹어보고 하는 소리예요. 제 말 한번 믿어보세요.”

심형선은 엔지가 나지 않을 거라는 말에 눈을 번쩍였다.

처음 목장에 도착했을 때, 아이스크림을 권했던 남자가 떠올랐다.

로이케션 매니저에게 소개받았던 남자였다.

심형선은 당장 그를 찾아갔다.

미리 준비라도 하고 있듯이 남자는 아이스크림을 주었다.

심형선은 아이스크림을 받아 현장으로 달려갔다.

곧 촬영이 시작됐다.

카메라가 돌아갔다.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금민서가 홀로 앉아 있었다.

카메라는 클로즈업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았다.

그녀는 슬픈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너무도 맛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이스크림에 한 맺힌 사연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슬퍼서 우는 건지, 맛있어서 우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드라마 역사상 손꼽히는 명장면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간접광고의 효과

할리우드 영화에서 우연히 노출된 한국 제품이 있다.

남태평양에서 전복당한 원양어선이 해변에서 발견된 장면이다.

주인공이 난파선의 잔해를 뒤지다가 모래 속에서 참치 통조림을 발견한다.

다국적 기업이 만든 참치 캔과 한국의 참치 캔이 뒤섞여 있었다.

주인공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든다. 광고나 협찬도 하지 않았던 한국 제품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참치 캔의 라벨 때문이었다.

외국의 제품들은 캔에 라벨이 붙은 형태였는데, 한국 참치 캔만이 알루미늄과 라벨이 일체인 제품이었다.

전복당한 원양어선에서 멀쩡해 보이는 제품은 한국 제품밖에 없었다.

개연성의 문제 때문에 한국 참치 캔을 선택한 것이다.

우연한 간접 광고는 제품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지리산 농부 목장을 배경으로 촬영했던, 일일드라마 ‘눈부시게 빛나는 날’도 비슷한 사례로 손꼽힌다.

금민서가 목장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 ‘이엘로’가 화제에 올랐다.

처음부터 목장 아이스크림이 화제가 된 건 아니었다.

시작은 명연기를 펼친 금민서로부터 시작된다.

방송이 나간 뒤, 금민서에게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금민서는 바쁜 촬영 일정 때문에 인터뷰를 거절했지만, 기자들이 촬영 현장까지 쫓아와 인터뷰를 요청했다.

“금민서 씨, 요즘 장안의 화제입니다. 금민서 씨의 눈물 연기가 정말 대단했습니다. 비하인드 스토리나 관련된 내용이 있으면 말씀 좀 해주시죠?”

연예계와 관련 이슈를 다루는 ‘스타덤’의 오수아 기자가 물었다.

“피디님과 작가님 덕이죠. 좋은 대본과 연출이 있었기에 탄생한 장면이니까요.”

“그런 이야기 말고 감춰진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연기하는데 힘들었던 점이나 곤란 상황들이요.”

오수아 기자는 그날 현장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금민서도 오수아의 눈빛을 보고 느낌을 받았다.

그녀도 대강의 사실을 알고 있음을.

이런 상황에선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싶었다. 시간문제일 뿐 어차피 알려질 사실이었다.

“실은 좀 힘든 점도 있었어요. 처음에 먹었던 건, 아이스크림이 아니었으니까요.”

“아이스크림이 아니었군요. 그럼 먹는 게 바뀐 거네요.”

“네, 현장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알고 있어요.”

“아,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네요.”

오수아 기자는 눈을 반짝였다.

금민서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사실은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이었어요. 고기를 구워 먹으며 연기를 해야 했는데, 감정이 잘 안 살아서.”

“아~ 그래서 아이스크림으로 바뀐 거군요.”

“감독님의 아이디어라고 알고 있어요.”

“그 장면은 저도 참 인상적으로 봤어요. 아이스크림을 정말 맛있게 드시더라고요. 그 뒤에 나오는 눈물 연기는 감탄스러울 정도였고요. 맛있어서 우는 건지, 슬퍼서 우는 건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요.”

오수아 기자의 말에 금민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으세요?”

“근데, 아이스크림이 정말 맛있었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요.”

“정말이요?”

“기자님도 직접 드셔보세요. 그럼 알게 되실 거예요.”

“그 아이스크림 이름이 뭔가요?”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좀 독특한 아이스크림이었어요.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다고요?”

“촬영했던 목장에서 직접 만든 아이스크림이라고 했어요.”

“목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요?”

“저도 그게 신기하더라고요. 목장에서는 우유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오수아 기자의 관심이 아이스크림으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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