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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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동에서 곧장 여의도로 향했다. 로케이션 매니저 이호선 다음으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내가 찾는 사람은 성은정이란 프리랜서였다.

아이스크림의 네이밍을 의뢰한 카피라이터였다.

광고기획자 시절에도 외주를 종종 맡겼던 사람이다.

전문 카피라이터는 아니었지만, 감각이 좋아서 자주 기용하곤 했다.

그녀의 본업은 드라마 작가이다. 나중에 대박 작가 반열에 올라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지금은, 보조 작가로 일하며 아르바이트도 해야 겨우 생활을 유지하는 실정이었다.

본업인 드라마 작가 수입이 너무 미미한 탓이었다.

그래서 프리랜서로 카피라이터 일도 겸업하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여의도 공원이었다.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그녀는 의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의뢰자와 공원에서 만나는 경우가 없었던 탓이다.

아이스크림 때문이라고 양해를 구하자 다행히 이해해주었다.

여의도 공원에는 더운 날씨에도 놀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편의점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고, 한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성은정이라고 합니다.”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성은정은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했다.

“커피 한잔 드실까요?”

“전 커피 말고 다른 걸 마시겠습니다.”

성은정은 편의점 냉장고에서 딸기 우유를 골랐다.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였다.

“우유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어릴 때부터 좋아했어요.”

알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회의를 할 때도 그녀는 우유를 마셨다.

그때 우유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부끄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키 때문이라고.

작은 키가 콤플렉스가 돼서 우유를 마셨던 게, 습관이 돼서 계속 먹게 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보다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많아서 우유를 마셔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동에서 오셨다고요?”

성은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네, 하동에서 왔습니다.”

“그럼, 아이스크림 이름 때문에 서울까지 오신 거네요?”

“마침 서울에 볼일이 있었습니다. 겸사겸사 왔죠. 물론 택배로 보내드릴 수도 있었지만, 직접 얼굴을 뵙고 의견을 묻고 싶기도 해서요.”

“하긴, 택배로 보냈다가 다 녹아버릴 수도 있겠네요.”

성은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말하는 사이에 그녀는 딸기 우유를 전부 마셔버렸다.

“말씀하신 아이스크림, 맛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 함께 가실까요?”

트렁크에 아이스박스가 있었다. 아이스크림이 녹는 걸 방지하기 위해 드라이아이스도 넉넉하게 챙겼다.

아이스박스를 열자 성은정은 놀란 얼굴로 말했다.

“어머, 많이 가지고 오셨네요. 혹시 이거 전부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모두 은정 씨 드리려고 가져온 거예요.”

“아이스크림 풍년이네요.”

그녀의 얼굴이 웃음꽃이 피었다.

“먼저 하나 먹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성은정은 아이스박스에 있는 연유 아이스크림을 하나 집었다.

그녀는 포도맛과 우유맛 중 우유를 골랐다.

“이 아이스크림을 김덕명 씨 목장에서 만들었다고 하셨죠?”

그녀는 한입 베어 물자마자 말했다.

흥분한 얼굴이었다.

“맞아요, 목장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럼 혹시 목장에서 만든 우유가 들어간 건가요?”

성은정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당연하죠. 제가 문서에도 적었는데, 단일 목장에서 나온 우유와 꿀을 이용해 만든 아이스크림입니다.”

“제가 우유 아이스크림도 많이 먹어 봤거든요. 그런데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우유의 풍미가 그대로 느껴질 정도예요. 맛도 좋고요. 저것도 한 번 먹어봐도 될까요?”

그녀는 포도 시럽을 넣은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입니다.”

아이스크림이 게 눈 감추듯이 사라졌다.

성은정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최근 먹어본 아이스크림 중에 최고예요. 이름까지 짓게 돼서 영광인데요.”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성은정을 만난 목적은 단순한 의뢰가 아니었다.

목장 아이스크림을 알리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그녀는 현재 일일드라마 ‘눈부시게 빛나는 날’의 보조 작가였다.

작가와 계약한 보조 작가가 아니었다.

연출부 밑에 있는 쉐도우 작가였다.

피디는 메인 작가의 대본이 마음에 안 들면, 쉐도우 작가를 시켜 대본을 바꾸게 했다.

작가는 촬영 현장에 나가지 않지만, 쉐도우 작가는 현장에서 피디의 지시에 따라 쪽대본을 만들어야 했다.

그 덕에, 쉐도우 작가 성은정은 ‘눈부시게 빛나는 날’의 명장면을 만들었다.

너무나 슬퍼하던 여자 주인공이, 기운을 차리겠다는 듯이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다 더 꺼이꺼이 우는 장면. 슬퍼서 우는 건지, 맛있어서 우는 건지 구분할 수 없던 명연기.

푸른 초원을 배경으로 색색이 돌아가는 바람개비, 목장의 아이스크림, 그리고 뛰어난 눈물 연기. 드라마 역사상 손꼽히는 장면 중 하나로 탄생될 것이다.

“이거 제가 아이스박스째로 들고 가도 될까요?”

성은정은 군침을 흘리며 물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먹을 기세였다.

“제가 배송해 드릴게요.”

“그럼 사무실까지 옮겨 주시면 고맙고요.”

“그러죠.”

쉐도우 작가 성은정이 만드는 명장면에 목장 제품이 사용될 것이다.

그녀는 이미 목장 아이스크림과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근처 오피스텔까지 아이스박스를 옮겨 주었다.

“감사합니다. 네이밍은 언제까지 하면 될까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아이스크림의 맛을 충분히 보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그렇게 말씀해주는 분은 없었는데, 제품을 이렇게 많이 주는 분도 없었고.”

“제가 너무 과했나요?”

“아니요, 좋아서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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