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교동에서 약속이 있었다.
합정역 근처에 이호선의 사무실이 있었다.
혼자 쓰는 오피스텔이었다.
“직접 찾아오신 건 처음입니다. 보통은 제가 먼저 연락을 드리는데 말이죠.”
그는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로케이션 매니저, 이호선]
로케이션 매니저가 생소하던 시기였다. 그들은 드라마나 영화의 장소를 섭외하는 역할을 한다.
대본을 분석하고 최적의 장소를 찾는 전문가다.
장소 섭외는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관공서, 지자체, 개인에 이르기까지 장소와 관련해 합의를 봐야 했다.
장소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다.
“목장을 운영하신다고요?”
“사진을 가져왔습니다.”
그에게 목장 사진을 보여주었다.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젖소부터 울타리에 달린 바람개비까지.
“목장에 있는 집들이 풍경과 참 잘 어울립니다.”
이호선은 사진을 보며 말했다.
사무실과 임시 거주 시설로 쓰는 컨테이너 하우스였다.
보통은 회색의 차가운 컨테이너 하우스였지만, 목장에 있는 컨테이너 하우스는 초록색과 노란색으로 도색을 했다.
당장 집을 지을 수 없지만, 화사한 느낌만이라도 주고 싶었다.
그도 그 느낌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바람개비가 인상적이네요.”
이호선은 울타리에 달린 바람개비를 보며 말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하고 있었다.
로케이션 매니저 이호선의 개인 취향이었다. 그는 푸른 초원에 색색이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좋아했다.
그와는 광고기획자 시절의 인연이었다.
일일드라마 ‘눈부시게 빛나는 날’의 간접 광고를 집행할 때, 그는 로케이션 매니저로 함께 했다.
“그런데 좀 의외긴 하네요.”
그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물었다.
“보통 목장이나 과수원을 운영하는 분들이 좀 까다롭거든요. 일하는 데 방해된다고 장소 협조를 구하면 매몰차게 거절하는 경우가 꽤 많아서요.”
“목장에 체험 학습장을 만들 계획입니다. 이렇게라도 미리 눈도장을 찍어 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견지명이 있으시네요. 그 마음이라면 저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소개만 된다면 사람들이 정말 많이 찾을 거 같네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목장 장면이 있다면 무조건 1순위로 하겠습니다. 감사의 의미로요.”
이호선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현재 일일드라마 ‘눈부시게 빛나는 날’의 로케이션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드라마 ‘눈부시게 빛나는 날’은 세간의 인기와 달리 내부적으로는 문제가 많았다.
작가의 대본이 늦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러다 보니 급작스럽게 장소가 변경되거나 새로운 곳을 섭외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장면 중 하나가 목장 장면이었다. 여자 주인공이 갑작스레 목장으로 가게 되는 설정이었다.
조만간 있을 일이었다.
로케이션 매니저 이호선은 목장 섭외 때문에 애를 먹은 걸로 알고 있다.
드라마가 끝난 후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제는 그 일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드라마라 촬영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다시 뵙기를 희망합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조만간 볼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이호선이 웃으며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