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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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에 정가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얼굴 좀 볼까?”

“나보고 서울까지 올라오라고?”

“서울까지 올 필요 없어, 지금 하동이니까.”

“여긴 무슨 일이야?”

“집에 일이 있어서 들렀어.”

“양초 학교는?”

“문제없게 잘하고 왔지.”

밀랍 양초를 만들고 있는 하문 초등학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거의 같은 시간에 약속 장소에서 만났다.

그녀의 얼굴이 밝아 보였다.

“변비는 많이 좋아졌어?”

난 웃으며 물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

그녀는 가볍게 받아쳤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내일 할머니 제사가 있어서.”

“양초 학교 일은 어때?”

“아주 좋아, 가끔 이곳에서 일하던 게 그립기도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지 몰랐다.

아주 오랜만에 하는 산책이었다. 바람이 상쾌했다.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서 밥 먹을래?”

“무슨 일이야?”

“뭘 그렇게 놀래?”

갑작스러운 저녁 초대였다.

“아버지가 널 좀 보고 싶다고 해서.”

“아버님이 무슨 일로?”

“너에게 특별히 상의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셨어.”

“상의?”

정길산은 마을에서 가장 큰 과수원을 하고 있었다. 흠집 난 과일을 대신 팔아주고 인연을 맺었다.

곶감 농사를 할 때는 그의 감을 샀다. 친구의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사업 파트너였다.

저녁 초대까지 하는 것을 보면 문제가 큰 모양이었다.

그녀와 함께 집으로 갔다.

정길산이 날 반겼다. 저녁 자리에선 특별한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저 지리산 농부들의 근황만을 물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자네와 함께 보고 싶은 게 있네.”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는 과수원으로 향했다.

하우스 안에 낮은 키의 나무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이게 뭔지 아는가?”

그는 키 작은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열매는 딴 것 같았다. 나뭇가지만이 앙상했다.

“모르겠습니다.”

“블루베리라네.”

“블루베리요?”

그는 블루베리 나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블루베리를 올해 처음으로 수확했지. 4년 만에 성공했다네.”

정길산은 블루베리 묘목을 들여온 이야기를 했다.

토양이 맞지 않아 실패를 거듭했다고 한다. 고생 끝에 열매를 맺은 것이다.

“수확에 성공하면 뭘 하겠는가? 판로가 마땅치 않네.”

그가 날 보자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포도 농장의 임화수와 경우가 달랐다.

국산 블루베리는 도매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였다.

고가의 블루베리를 납품할 곳이 없었다.

어렵게 결실을 본 작물이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자네에게 의견을 구하고 싶어서 보자고 했네.”

목장에 포도를 심는 건, 매력적이지 않았다. 아이스크림에 넣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블루베리는 차원이 달랐다. 작물만으로 매력이 충분했다. 2007년인 지금, 거의 수입에만 의존하는 귀한 과일이었다.

국내산 블루베리가 경쟁력을 갖출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요거트와도 궁합이 맞았다.

“제가 어르신의 블루베리를 전부 사겠습니다.”

“내 블루베리를 다 사겠다고?”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저에게 블루베리 키우는 노하우를 알려 주십시오.”

“자네도 블루베리를 키우겠다는 말인가?”

“관심 있습니다.”

목장에 심을 작물을 찾은 것 같다.

블루베리나무다.

블루베리의 궁합

설강인이 독일 출장을 마치고 목장으로 돌아왔다.

나와 마주치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로봇 착유기는 정말 대단했어. 자네 말대로 목장 관리가 한결 수월해질 거 같았네. 소들이 알아서 젖을 짜니 말이야.”

아이처럼 신이 난 표정이었다.

그의 말대로 학습을 한 젖소들은 스스로 착유기 안으로 들어간다.

인간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젖을 짜지 않았다. 젖소들이 원하는 시간에 젖을 짜기에 스트레스도 최소로 줄일 수 있었다.

“로봇 착유기를 사기 전에 젖소 먼저 들였으면 좋겠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설강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요거트를 공급할 매장이 9군데나 되니까요.”

“매장이 그렇게 많이 늘었나?”

“연유 아이스크림까지 합치면 15개 매장이나 됩니다.”

설강인은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독일에 간 사이에 좋은 일이 있었나 보네.”

“목장에 30마리 정도를 더 들일까 생각 중입니다.”

“어르신 생각은 어떻습니까?”

“욕심 같아서는 젖소가 더 많길 바란다네. 그래야 자네가 빨리 성공을 해서 다른 목장도 낼 거 아닌가?”

그는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가 요거트와 아이스크림을 생산할 수량에 맞게 젖소의 수를 계산했을 거라고 생각하네. 건유기까지 생각해서 말일세.”

젖소는 1년 365일을 매일 젖을 짜진 않았다. 임신과 출산으로 젖을 짤 수 없는 시기가 있다. 이걸 건유기라 하는데, 소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략 5~60일 정도다.

“네, 건유기까지 고려했습니다.”

설강인의 말대로 매장에 나갈 제품에 맞게 계산했다. 요거트와 연유 아이스크림을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의 젖소를 들이기로 했다.

요거트의 반응이 좋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수제 요거트의 특성상 저장도 불가능했다. 제품이 남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자란 것이 나았다.

목장 요거트를 찾는 매장과 고정 고객들이 늘어날 때마다 점차적으로 젖소를 늘릴 계획이었다.

아직 목장엔 로봇 착유기를 들인 것도 아니었다. 시작부터 목장 식구들의 진을 뺄 생각은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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