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박문호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나보다 손에 들린 물건에 관심을 보였다.
“손에 든 건 뭔가?”
“우유입니다.”
“우유?”
“웬 우유인가?”
“제가 직접 짠 우유죠.”
“자네가 우유를 직접...?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박문호에게 유리병에 든 우유를 건넸다.
맛을 보시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병에 든 우유를 마셨다.
“고소한 게 맛은 아주 좋네.”
말도 말이지만, 얼굴만 봐도 어떤 맛인지 알 수 있었다.
기분 좋게 하는 고소함이다. 신선한 우유가 주는 산뜻한 기운이기도 했다.
박문호가 곧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자네 목장이라도 차린 겐가?”
“네, 목장을 차렸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가?”
박문호는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이제 양봉은 안 할 생각인가?”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박문호의 머릿속엔 오로지 양봉밖에 없었다.
“양봉을 안 하다니요. 더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안심이네만...”
그는 독심술을 하듯 내 눈을 들여다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자네가 목장을 하는 이유를.”
“꿀을 더 팔기 위해서입니다. 토종꿀뿐만 아니라 서양꿀까지요. 어쩌면 서양꿀이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박문호의 눈이 빛났다.
“서양꿀을 더 판다니, 어떻게 말인가?”
“지금은 작게 목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얼마 안 되는 양이지만 매일 우유를 생산하고 있죠. 그 우유로 요거트를 만들 생각입니다.”
“요구르트 말인가?”
“맞습니다. 우유를 발효시켜 요거트를 만들 계획입니다.”
“요거트를 파는 게 꿀과 무슨 관계가 있나?”
박문호는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거트에 꿀을 넣을 생각입니다.”
“아!”
그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좋은 아이디어네. 역시, 젊은 사람 머리는 따라갈 수가 없고만.”
박문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테이블에 있던 우유를 한 모금 더 마시기도 했다.
“지금은 시제품을 만들고 있는 단계입니다.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죠. 오늘 회장님을 찾아온 이유는, 시제품이 완성되기 전에 상의를 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꿀과 관련한 내용이겠군.”
“맞습니다.”
박문호를 찾은 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요거트를 만드는데 꿀은 필수였다. 다만, 토종꿀을 사용하는 건 제한이 있었다.
국내에 있는 토종꿀을 모두 합쳐도 양이 부족했다. 한계가 있는 것이다.
꿀의 종류를 넓힌다면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히려 고가와 저가 제품으로 다양한 상품군을 구성할 수 있었다.
양초에 쓰는 밀랍도 서양벌 협회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었다.
밀랍 다음으로 협조를 구할 상품은 꿀이었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했군.”
박문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귀농학교에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했을 때, 계획한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네.”
“회장님 덕에 인재들을 얻었습니다.”
“꿀 문제는 나에게 맡기게.”
“감사합니다.”
용건을 마치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의 사무실 아래층에 양초 학교가 있었다.
난 양초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친구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정가희의 사무실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정가희, 선생님!”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다. 복도를 따라 교실로 이동했다.
수업을 하는 곳도 있었고, 양초를 만드는 모습도 보였다.
정가희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다.
휴일이 아니었다.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울 사람이 아니었다.
전화도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그때 거짓말처럼 정가희가 내 앞에 등장했다.
먹통이 된 전화기를 들고, 휴게실에서 나왔을 무렵이었다.
그녀가 좀비처럼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얼굴이 초췌해 보였다.
“정가희, 어디 갔던 거야? 전화도 안 받고.”
그녀는 반가운 듯 표정을 지었지만, 곧 안색이 창백해졌다.
“왜 그래? 어디 아파?”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한데.”
그녀를 안 이후로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힘들 땐 다짜고짜 투정을 부리는 사람 아닌가.
너무 아파서 말도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배가 좀 아파서.”
“배가?”
말이 끝나기 전에 그녀는 왔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갔다.
화장실로 가는 모양이었다.
난 휴게실에서 잠시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고 가려던 순간이었다.
휴게실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남아영이었다.
“선생님, 언제 오셨어요?”
남아영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독일에 가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온 지 좀 됐지. 일들이 많아서 이곳도 자주 못 왔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선물 가져오셨어요?”
내가 가만히 있자, 실망한 눈으로 변했다.
“정말로 없네요.”
어리광을 피울 때면 영락없는 소녀다.
“당연히 선물이 있지.”
그녀에게 열쇠고리를 건넸다. 벌통을 살 때 함께 산 열쇠고리였다.
꿀벌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아, 귀엽다.”
남아영은 금방 기분이 좋아졌다. 동료들에게도 선물로 준 물건이었다.
정가희에게 주려고 챙겨둔 것도 있었다.
“그런데 정가희 선생님 요즘 어떠니?”
“뭐가요?”
남아영은 열쇠고리를 요리조리 살피며 물었다.
“어디 아프다거나?”
“가희 선생님, 어디 아프세요?”
열쇠고리를 보던 시선이 내 눈을 향했다.
“그게 아니라. 좀 이상해서. 화장실에서 나온 모습을 봤는데 너무 창백해 보여서.”
그 말을 하자, 남아영은 갑자기 웃었다.
“왜 웃는 거지?”
남아영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변비 걸려본 적 없죠?”
“없어.”
“그래서 모르는 거예요. 변비 환자의 고통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