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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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호가 독일 출장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가 돌아오는 날, 내가 직접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마중까지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감동한 표정이었다.

“출장 중에 별일은 없었나요?”

“좋은 일만 있었습니다. 이제 프로폴리스를 추출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그는 독일에서 겪은 일을 무용담 늘어놓듯이 말했다.

실험과 연구와 관련한 것들이라 반은 알아들 수 없었다.

수줍음 많던 이영호는 사라지고 없는 듯했다.

수다쟁이가 된 이영호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입을 열었다.

“이영호 씨는 종균을 배양해 본 적이 있나요?”

이영호는 두 눈을 모았다. 호기심을 보일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어떤 균을 말씀하시는 거죠?”

“티벳 버섯입니다.”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티벳 버섯이라면 배양해본 적이 있습니다.”

“마침 잘됐네요.”

“그런데 티벳 버섯으로 뭘 하려고 하시는 거죠?”

티벳 버섯은 유산균 종균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티벳 승려들이 즐겨 먹던 발효유에서 유래한 단어였다.

“요거트를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이영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독일에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일이 있었음을 알렸다.

“정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네요. 인턴십에 목장까지.”

“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연구는 좀 시간이 걸리는 게 흠이죠.”

“그게 무슨 말이죠?”

이영호에게 물었다.

조금 전까지 무용담을 늘어놓던 이영호가 아니었다.

의기소침해 있었다.

“프로폴리스를 추출할 수는 있어도 아직 제품을 만들 실력은 안 되니까요.”

이영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제품을 생산하는 데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당장 실력을 뽐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했다.

하지만,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종균을 배양하는 데 힘을 써주세요.”

“네, 티벳 버섯이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단순히 배양만 하는 건 아닙니다.”

이영호가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에 시선이 느껴졌다.

“단순 배양이 아니라면?”

“배양한 균을 분말 형태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이영호는 당황한 눈빛이었다. 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분말 형태로 있으면 요거트를 만들기에 훨씬 편리하겠네요.”

이영호는 웃으며 말했다.

“티벳 버섯 분말도 제품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맡겨만 주십시오. 독일에서 배워 온 기술을 아낌없이 사용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어느덧 하동에 도착했다.

이영호의 숙소 앞에 차를 세웠다.

“감사합니다. 마중까지 나와 주시고. 내일부터 말씀대로 종균을 배양하겠습니다. 분말 형태로 만드는 일까지.”

이영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리고, 내일부터 당장 프로폴리스를 생산할 수도 있을까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종균과 프로폴리스가 매치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생산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어디에 사용할 계획인지 궁금하네요.”

“요거트에 넣어 볼 생각입니다. 꿀과 함께.”

“프로폴리스와 꿀 넣은 요거트라.”

“맞습니다.”

“기발한 아이디네요. 당장 먹어보고 싶은 충동이 들 만큼.”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단일 목장에서 만든 유제품에 우리만의 색깔을 입히고 싶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개성을 살릴 물건이 필요했다.

핵심 역량은 토종꿀과 프로폴리스였다.

요거트에 넣을 천연 첨가물이다.

요거트의 효능

목장의 하루는 바빴다.

기르는 젖소는 10마리뿐이었지만, 사람 손이 필요한 일이 많았다.

설민주, 노해미, 김상철은 맡은 바 역할을 다 했다.

소들이 목초지에서 풀을 뜯을 땐 축사를 청소했다.

성장기 송아지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영양분이 풍부한 사료를 먹여야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젖을 짜는 일이었다. 젖소는 젖을 짜지 않으면 병에 걸릴 수 있다.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밀커라고 불리는 착유기를 이용해 생유를 받아냈다.

젖소가 수백 마리로 늘어나 로봇 착유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로봇 착유기는 젖소를 늘리는 시점에 구입할 예정이었다.

밀커로 짜낸 우유는 저온 살균을 거쳐 냉장 탱크에 보관했다.

“저온 살균을 하는 건 처음 봤어요.”

설민주가 냉장 탱크로 옮겨지는 우유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신기한 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저희 목장에선 생유를 곧장 냉장 탱크에 저장했거든요.”

그녀의 말대로 일반적인 낙농 목장에선 생유를 탱크로 옮기면 작업이 끝난다.

가공하지 않은 생유를 우유 가공업체가 수거하기 때문이다.

목장에서는 우유를 생산해 가공업체에 납품할 뿐, 가공이나 유통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유 대란과 맞물려 우유 쿼터제가 도입됐을 때 문제가 생긴 원인이기도 했다.

할당받은 우유만 제 가격에 넘길 수 있었다. 남은 우유는 헐값에 넘겨야 했다. 대다수의 목장이 망한 이유였다.

“우리 목장에선 완제품을 만들 거예요. 우유를 포함한 모든 가공제품도.”

단일 목장에서 생산한 최고의 유제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소가 너무 적은 거 아닌가요?”

설민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현재 젖을 짜는 젖소는 10마리 중 5마리였다. 모두 홀스타인종이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얼룩 점박이 소다. 나머지는 성장이 더 필요한 송아지들이었다.

“우선은 시제품을 만드는데 집중할 거예요. 그 뒤에 젖소도 늘려갈 거고요.”

“하긴, 시제품이 중요하죠.”

설민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부모님께는 연락을 드렸나요?”

설민주의 부모님에게 요거트 관련 자문을 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목장으로 직접 방문하신다고 했어요.”

“그거 잘됐네요. 혹시,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으시던가요?”

“아버지는...”

아버지란 말에 설민주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 목장 연구회를 만들기도 했던, 설강민이다.

그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조만간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거트를 만드는데 아버지도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어머니만 오셔도 충분합니다.”

설민주의 표정이 풀렸다.

“오후에 수의사가 오기로 했어요. 소들이 이상 없는지 잘 봐주세요. 수의사님도 잘 알아두고요. 급할 때 수시로 연락할 수 있으니까.”

“네.”

설민주가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녀에게도 목장의 정체성을 공유한 상태였다.

지리산 농부들 목장에서 키우는 젖소는 항생제와 호르몬제는 투입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연 방목과 유기농 사료를 먹인 젖소는 우리 목장만의 차별화 전략이었다.

전략을 유지하기 위해선 건강검진을 수시로 받아야 했다.

설민주의 아버지는 친환경 목장의 선구자였다.

그는 좁은 축사에서 젖소를 기르는 걸 반대했다.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은 젖소의 우유는 사람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녀도 내 의견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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