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십이 끝나가던 무렵이었다.
한기탁이 조용히 불렀다. 회의실에 그와 나 둘뿐이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하고 싶은 말 있어요?”
“그게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 돼서.”
그는 목장을 걱정하고 있었다.
“양봉에서 차츰 일을 늘려가는 건 나도 동의해. 하지만, 말도 안되는 독소조항까지 걸고 모험을 하는 게... 게다가 젖소도 고작 10마리뿐이고.”
“젖소는 시제품을 완성하고 난 뒤에 늘려 갈 생각이에요.”
“시제품?”
공식 회의 때 꺼낼 안건이었다.
경영지원 팀장에겐 미리 귀띔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목장에서 나온 우유로 요거트를 만들 거예요.”
“요거트?”
“천연 요거트에요. 합성 첨가물이 들어가지 않은 요거트죠. 물론 지리산 농부들이 생산하는 중요한 첨가물이 들어가지만.”
“지리산 농부들이 만든 첨가물이 들어간다고?”
“꿀이에요.”
한기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요거트에 꿀을 넣다니 괜찮을 거 같은데, 궁합이 맞는 느낌이야.”
“우선 시제품이 먼저예요. 젖소를 늘리는 건 다음 문제고요.”
“요거트 아이디어는 좋아. 그런데 젖소가 늘어나면 인건비도 만만치 않을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인건비도 절감할 방법이 있어요.”
“인건비를 절감할 방법이 있다고?”
요거트를 만든다고 말했을 때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로봇 착유기를 이용할 생각이에요.”
“로봇 착유기?”
독일에서 본 물건이었다. 목장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일은 젖을 짜는 일이었다.
목장의 규모에 따라 인력도 늘어나는 이유였다.
유럽의 목장에선 로봇 착유기로 젖을 짜고 있었다.
로봇이라고 해서 젖소에게 스트레스를 주지는 않았다.
훈련만 잘하면 젖소들은 알아서 착유기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손으로 젖을 짜는 것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다고 했다.
독일을 떠나기 전 봐두었던 물건이기도 했다.
시제품이 반응을 얻으면, 젖소를 늘리는 일과 함께 첫 번째로 살 물건이었다.
“그런 기계가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네. 미리 말 좀 해주지.”
“바빠서 말할 시간도 없었잖아요.”
“바쁘긴 했지.”
이제 걱정하는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탁했던 일은 문제없죠?”
“전부 처리했어.”
낙농 시설에 따른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한기탁에게 허가에 관련한 일을 맡겼다.
목장 관련 일을 마치고, 노파심에 물은 것 같았다.
요거트는 시작에 불과했다. 자연 치즈와 아이스크림 등의 유제품으로 범위를 넓힐 생각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20억 매출은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 * *
지리산 농부의 인턴 프로그램이 종료됐다.
5명의 인턴 농부들은 모두 정식 사원으로 채용됐다.
식구가 된 기념으로 환영회가 있었다.
백민석은 팀별로 모여 앉을 것을 원했다. 그가 바라는 대로 팀별로 자리가 배정됐다.
경영지원팀엔 박태호가 배정됐다. 이 땅의 농업이 사라질 것을 걱정하는 청년이었다.
쇼핑몰팀에 천희석이 배정됐다. 게임도 농사 게임만 한다는 프로그래머였다.
한기탁과 박태호는 양초 공장을 책임지고 관리하기로 했다.
지금은 밀랍 양초만이 매달 수익을 내고 있다.
백민석은 천희석과 함께 쇼핑몰 강화에 나서기로 했다.
나머지 세 명은 나와 함께 했다.
설민주, 노해미, 김상철. 그들은 지리산 농부들 목장에서 일하게 된다.
이제부터는 팀별로 일을 하기로 했다.
양봉과 곶감은 일손이 필요한 시점에 함께 하기로 합의했다.
같이 힘을 합쳐야 할 때를 제외하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에 모두 동의했다.
축하 자리에 술이 빠질 수 없었다.
“지리산 농부들과 함께 일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기탁이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두 잔을 채웠다.
건배를 하고 술자리가 이어졌다.
“대표님, 민주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저희는 목장으로 가게 된다고.”
노해미가 말했다. 팀원 중 막내이자 분위기 메이커였다.
“네, 목장에서 저와 함께 일할 겁니다.”
“젖소를 키우는 목장 맞죠?”
“맞아요.”
“그게 아주 기가 막힌 거 같아요.”
난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궁금했다.
“저희는 양봉을 해서 꿀을 얻잖아요. 거기에 젖소를 키워서 우유까지 생산하면, 젖과 꿀을 만드는 농부가 되는 거고요.”
“그럼, 젖과 꿀이 넘치겠네.”
한기탁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말에 모두 웃음꽃을 터트렸다.
설민주도 함께 웃었다. 그녀는 요거트를 주력으로 하겠다는 말에 수긍했다.
공장에 납품하는 요거트가 아니었다. 단독 목장에서 생산한 요거트를 만들 계획이었다.
프리미엄 유제품 시장을 노리는 전략이었다. 설민주의 말대로 우유 시장은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유제품이라면 달랐다. 곶감이나 양봉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가공시장이었다.
광고기획자 시절, 유명 백화점의 유제품을 팔아본 경험이 있었다.
유럽에서 수입해온 제품으로 모두 고가였다.
광고 전략은 하나였다.
‘단일 목장에서 만든 유제품’이란 타이틀을 붙였다.
판매한 모든 유제품은 개인 목장들에서 제조한 것들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개인 목장에서 나온 유제품을 높이 평가했다.
하나의 목장에서 나온 우유로 유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스위스에선 규모가 작은 목장도 유제품을 수출했다. 그런 곳도 매출이 상당했다.
단일 농장이 아닌 경우는 여러 목장에서 나온 우유를 섞는다. 우유를 섞는 과정에서 신선도가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면 품질을 보증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농가마다 사육의 형태와 사료가 다르기 때문이다.
단일 목장에서 생산한 유제품은 신선도와 품질을 약속할 수 있었다.
그 유명 백화점의 고가 유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단일 목장에서 나온, 품질 좋은 유제품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 해외에서 들여온 상품들이었다. 제품들에는 ‘명품’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그때까지도 한국 낙농업은 프리미엄 전략을 구사하는 곳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낙농 농가들은 우유를 유가공 업체에 납품했다. 우유를 생산하는데 주력한 까닭이었다.
우유 대란과 쿼터제 등의 변수엔 대처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우유로만 승부를 볼 생각은 없었다.
단일 목장에서 만드는 프리미엄 유제품에 주력할 생각이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었다.
“대표님, 우유가 아닐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저희 목장에선 언제나 우유를 팔았으니까.”
설민주가 말했다.
그녀의 볼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께서 요거트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인터뷰 글에서 봤죠. 딸이 변비가 심해서 요거트를 만들기 시작했다던데...”
난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붉은 볼이 사과보다 더 붉게 변했다. 술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네. 저희 집에서 만들어 먹던 요거트가 있어요. 그런데 그건 파는 게 아닌데.”
“어머님 방식으로 요거트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저희 어머니의 방식대로요?”
“그런 걸 사람들이 먹으려고 할까요?”
설민주는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하죠?”
“맛이 좀 독특해요. 요거트를 먹으면 취하는 기분이 들어요.”
직접 먹어보진 못했지만, 알고는 있었다.
정말 취하는 기분이 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맛이 궁금하네요.”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실망할 수도 있어요.”
설민주는 수줍은 표정으로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