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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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턴십 기간 동안, 난 목장 일에 매달렸다.

방목형 목장을 만들기 위해 울타리를 쳐야 했다. 사람을 쓸 수 있었지만, 내 힘으로 하고 싶었다.

든든한 지원군도 있었다.

아버지였다.

“바쁘실 텐데 여긴 저에게 맡기고 들어가세요.”

“넌 모를 거다.”

“뭘요?”

“아들과 함께 일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돌이켜 보니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한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회귀 한 날, 아버지가 축사에서 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부자가 울타리 작업을 하는 동안, 축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자연 방목을 해서 젖소를 키운다고 해도, 축사는 필수였다.

축사뿐만 아니라 우유를 보관할 탱크부터 설비들이 많았다.

주거 시설도 마련해야 했다. 시설이 용이한 컨테이터 하우스를 설치했다.

목장이 만들어지는 동안, 지리산 농부들의 청년 인턴십도 끝나가고 있었다.

한 명의 낙오자도 나오지 않았다.

귀농학교의 추천은 정확했다.

그들은 지리산 농부들과 함께할 준비를 마쳤다.

목장에 젖소도 들어왔다.

“내가 잘 알아봤다. 아주 건강한 녀석들이다.”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눈매가 맑고 순해 보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젖소를 키우고, 우유를 생산하는 일만이 남았다.

난 인턴십 참가자인 설민주에게 전화를 했다.

“혹시, 오늘 시간 있어요?”

“주말에도 일을 하나요?”

“일이라기보다 사전점검이라고 해두죠. 앞으로 함께 할 일을 점검하는 시간.”

“그게 일이죠?”

그녀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부담스러우면 평일에 보도록 하죠.”

“아니에요. 어차피 할 일도 없었어요. 어디로 나가면 될까요?”

“숙소에 계시죠? 제가 픽업하겠습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설민주는 나와 함께 일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한기탁과 백민석의 팀원들도 정해진 상태였다.

인턴십 참가자 중에 목장을 방문하는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설민주와 함께 목장으로 이동했다.

푸른 목초지가 나오자 설민주의 눈이 커졌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건가요?”

“지리산 농부들이 새롭게 꿈꾸는 장소로 갑니다.”

목장이 가까워졌다.

넓은 농장에서 젖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여긴?”

설민주는 긴장한 얼굴이었다.

“목장 처음 보세요?”

“아니요.”

평소와 달리 목소리가 떨렸다.

우린 차에서 내렸다.

“지리산 농부들의 목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난 웃으며 말했다.

설민주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평소의 밝고 쾌활한 얼굴이 아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혹시 제가 여기서 일하게 되나요?”

“맞아요. 민주 씨랑 제가 함께 일할 공간이죠.”

그녀는 들판의 젖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죄송하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설민주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간절하게 말했다.

목장의 딸

설민주의 두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컨테이너 하우스로 들어갔다.

지리적 여건 때문인지, 컨테이너 안은 시원했다.

난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그녀는 말 못할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개인적인 일이라서...”

설민주는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녀에게 시원한 물 한잔을 건넸다.

시원한 유리잔 너머로, 그녀의 과거가 드러났다.

인턴 지원서에는 쓰지 않은 내용이었다.

설민주는 설가네 농장의 외동딸이었다. 어릴 때, 젖소들과 함께 푸른 초원을 뛰어놀던 소녀였다.

목장 일을 돕는 게 즐거웠다고 했다. 대학 생활 중에도 친구들과 함께 목장 일을 하러 올 정도였다.

설가네 목장도 우유 대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원유를 헐값에 팔아야 할 상황이 됐고, 사룟값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20년 넘게 운영하던 설가네 목장은 사라졌다.

“이 자리에서 목장을 하던 사람도 민주씨 가족과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결국, 목장 터까지 팔고 떠났죠.”

“아...!”

그녀는 창밖을 잠시 내다보았다. 풀밭을 거닐고 있는 젖소들에 눈이 가 있었다.

“여기서도 방목을 해서 젖소를 키웠나요?”

“맞아요. 보시는 대로 소를 풀어 놓고 키웠죠.”

“대표님도 그럴 생각인가요?”

“당연히 그럴 생각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목장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설민주는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곳에서 같은 일이 반복될 것 같아 두려워하고 있었다.

“저희 아버지도 마지막까지 버텨 보려고 애썼어요. 힘든 와중에도 젖소들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려고 했고요. 하지만...”

“우리 집도 소를 키웠습니다. 젖소는 아니고, 한우였죠. 약초를 먹인 지리산 한우는 아버지의 꿈이셨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거액의 빚을 떠안고 망했죠.”

“대표님 아버님도 소를 키우셨군요.”

“네, 소를 키웠습니다.”

물 잔 너머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민주 씨가 설가네 목장 딸이란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네...?”

“너무 놀랄 거 없습니다. 설가네 목장이 워낙 유명해서 그런 거니까요. 민주 씨 집에서도 ‘월간 축산’이란 잡지를 구독하지 않았나요?”

설민주는 생각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집도 그 잡지를 구독했습니다. 설가네 농장도 자연 방목으로 동물복지에 힘쓰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죠. 기사 속에 설민주 씨의 사진도 있었고요.”

“말씀을 들으니까 생각나네요. 잡지 표지까지 장식했던 게... 그런데 이상하네요?”

“뭐가 이상하죠?”

“저희집뿐만 아니라 목장을 하는 많은 분들이 문을 닫은 상황이에요. 그런데 대표님은 그걸 알고도 목장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으니까요.”

“망할 일이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유를 팔아서는 사료도 살 수 없어요.”

“우유를 팔지 않을 겁니다.”

“젖소 목장에서 우유를 팔지 않는다고요?”

설민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넋이 나간 것 같았다.

“지리산 농부 목장에선 우유를 팔지 않습니다. 주력상품은 요거트입니다.”

“요거트요?”

설민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란 얼굴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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