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문 초등학교에 야외 조명이 켜져 있었다.
조명 아래 500인치 스크린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이영호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교인가요?”
“오래전엔 학교였죠.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지만.”
민석과 기탁이 팝콘을 튀기고 있었다.
“팝콘 좋아하세요?”
이영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팝콘 한 봉지요.”
난 민석에서 말했다. 그는 고깔 모자를 쓰고 팝콘을 튀겼다. 제법 어울렸다.
“여기 있습니다.”
민석이 팝콘 두 봉지를 건넸다. 고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한기탁은 콜라와 사이다를 챙겨주었다.
이영호는 돈을 내려 하자, 한기탁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지리산 영화제는 ‘지리산 농부들’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영화제입니다. 모든 게 무료입니다.”
한기탁은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이영호도 기분 좋게 웃었다. 아직 영화 상영 전이었다. 그럼에도 이영호는 평소와 달리 내성적인 성향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마도 스크린의 마법인 것 같았다.
“곧, 영화가 시작합니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아주세요.”
이춘배 어른이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할머니들과 마을 주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꼬마 아이들도 보였다.
모두의 손엔 팝콘이 들려 있었다.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나와 이영호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크린 옆에 있던 조명이 꺼졌다.
빔프로젝터에서 영상이 흘러나왔다.
하얀 스크린에 영화가 나왔다.
오늘의 상영작은 ‘시네마 천국’이었다.
1988년에 공개된 이탈리아 영화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영화지만, 영화팬들의 가슴에 남은 명작이었다.
“이럴 수가.”
영화가 시작하자 이영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혼잣말이 소리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가 소리친 이유는 사운드 때문이었다.
더빙판이었다.
“이 영화 어디서 구한 겁니까?”
이영호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송국에 요청했습니다.”
“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사와 방송국에 허락을 받았다.
비영리의 목적이라면 허락하겠다는 답을 얻었다.
더빙판을 고른 이유는 노약자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자막을 눈으로 읽는 게 불편한 분들도 계셨다.
그런 이유로 영화를 못 보시는 분들도 많았다.
다 같이 즐길 방법을 찾다, 더빙판을 구하게 됐다.
허락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만족스러웠다.
다들 즐거운 표정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영화 속에서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장면이 있었다.
영사 기사인 알프레도가 사람들을 위해 야외에 스크린을 만들었다.
이영호는 그 장면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영화가 끝나고, 즐거운 저녁 식사가 이어졌다.
모두가 함께 만드는 식탁이었다. 다 같이 고기를 굽고 영화 이야기를 나눴다.
이영호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에게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사실은 이 극장의 운영자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영호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분들이 운영하는 거 아니었나요?”
그는 민석과 기탁을 보며 말했다.
“자원 봉사자들이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극장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직 없습니다.”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 사람은 행운아네요.”
“행운아라니,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죠?”
“이 극장을 운영하는 사람이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운영자를 구하고 있는데, 이영호 씨가 그 행운아가 되어 주면 어떨까요?”
“제가요?”
그는 당황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눈빛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이영호 씨가 맡아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연구원으로 일도 하면서요.”
“제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 애쓰는 이유가 뭐죠?”
그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이곳에 계신 분들 대부분이 저희와 함께 하는 분들입니다. 이영호 씨뿐만 아니라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정성을 들여 모셨습니다. 모두 대단한 분들이세요. 이영호 씨도 마찬가지고요.”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기분 좋게 음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저에겐 꿈같은 일이네요. 이런 극장을 운영해 보고 싶어서요.”
“물론 주업은 연구입니다. 극장은 주말에 자유롭게 운영하시고요.”
웃으며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영호가 ‘지리산 농부들’의 수석 연구원이 되는 순간이었다.
출장의 목적
이영호가 하동으로 내려온 건 일주일 뒤였다.
한기탁의 도움으로 쉽게 숙소를 얻을 수 있었다.
하동 농업지원센터와 가까운 곳이었다.
그가 사무실로 첫 출근을 했다.
“동료들 앞에서 소개 부탁드립니다.”
난 이영호를 보며 말했다. 그의 이마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지리산 영화제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때와 달랐다. 숫기 없는 이영호로 돌아와 있었다.
“이영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앞으로 잘 해봐요.”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민석은 악수를 청했다.
이영호가 워낙 숫기가 없어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나섰다.
“이영호 연구원은 양봉으로 얻은 부산물로 천연 제품을 연구하게 될 겁니다.”
이영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난 이영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는 집 근처에 있는 양봉장이었다. 그는 엄청난 규모의 양봉장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다 벌통인가요?”
“맞습니다.”
이영호는 벌통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꿀을 채취한 벌들이 벌통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벌통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네요.”
그는 벌통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영호는 날아오는 벌에게 손을 내밀었다. 벌 한 마리가 그의 손등 위에 앉았다. 무서워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차분했다.
“두려워하지 않으시네요.”
“제가 곤충에 관심이 많아서.”
이영호가 조용하게 말했다.
그는 학부에서 생명과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화학을 전공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엔 두려움이 많았지만, 곤충이나 다른 생명을 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손 등에 있던 벌이 날아갔다.
그는 날아가는 벌을 바라보며 물었다.
“프로폴리스를 채취하실 건가요?”
“단번에 맞추시네요.”
그에게 양봉으로 얻은 천연 물질을 이용할 것이라고만 말했다.
프로폴리스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대학원에서 항산화 물질 연구를 진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프로폴리스를 알게 됐죠. 벌이 생산하는 독특한 물질입니다. 벌집을 지키고, 외부의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기능을 하니까요.”
“잘 알고 계시네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요?”
“국내에선 프로폴리스의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않습니다. 프로폴리스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궁금하네요.”
전문가의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졌다.
만족스러운 질문이었다.
“프로폴리스의 항산화 물질은 피부 노화를 지연시키고 면역력을 강화시킵니다.”
“프로폴리스를 이용한 미용제품을 만들 계획이군요.”
“예리하시네요. 프로폴리스를 이용한 미용제품을 생산할 계획입니다. 비교적 생산이 용이한 비누부터 화장품, 치약, 샴푸 등으로 범위를 확장할 계획입니다.”
“재미있겠네요.”
이영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전문 지식을 말할 땐,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프로폴리스는 아무나 추출할 수 있는 물질이 아니었다.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관련학과를 전공하고 석사이상의 학력이 필요했다.
이영호 같은 전문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는 것도 필수였다.
일반 양봉 농가에선 불가능한 것이다. 이영호를 영입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지장사에서 비누를 만들 때는 밀랍을 이용했다. 밀랍이 비누의 효과를 좋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안에 녹아 있는 미량의 프로폴리스가 피부의 탄력을 유지시킨 것이다.
그때는 프로폴리스를 이용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영호라는 전문 연구원이 내 앞에 있었다.
“극장 이벤트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가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수줍음 많은 이영호가 아니었다.
“김덕명 씨의 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감상에 젖어서만은 아닙니다. 연구자로서의 욕심도 있습니다.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내가 찾던 연구원이었다.
“오늘부터 연구에 집중하겠습니다.”
이영호가 벌집을 바라보며 말했다.
농업지원센터에 있는 연구 장비를 확인한 상태였다.
그는 센터에 있는 장비만으로 충분히 연구가 가능하고 말했다.
이영호의 눈에서 투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와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어머니가 양봉장으로 오고 있었다.
“사무실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니?”
어머니의 시선이 이영호에게 이동했다.
“새로운 동료에요. 이영호 씨라고.”
이영호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방금 전 여유롭던 표정의 이영호는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숫기 없는 이영호로 변해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성격이었다. 한눈에 그가 어떤 타입인지 알아본 듯했다.
질문은 하지 않고, 따뜻한 미소로 답했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어디 가긴, 양초 공장에 가셨지. 아들이 하도 바빠서 그곳에서라도 얼굴을 보겠다고.”
어머니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괜찮다고 말씀드렸는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매일 새벽까지 일해 놓고선.”
머릿속에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구원뿐 만아니라 다른 팀원도 필요한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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