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바쁜 일과가 시작됐다.
지리산 농부들은 언제나 그렇듯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백민석은 쇼핑몰을 관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한기탁도 세무서에 보낼 서류를 작성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영호도 이 자리에 함께 하기를 희망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민석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새로 영입한다는 연구원은 만나봤어?”
“만나는 봤지.”
그 말에 한기탁 선배도 고개를 돌렸다.
동료들에게 이 시점에 연구원이 필요한 이유를 말했다.
양봉으로 얻어지는 천연물질은 밀랍만이 아니었다.
프로폴리스를 이용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전문 연구원이 필요했다.
한기탁과 백민석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을 우선적으로 들이고 팀의 인원을 늘려가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래서 그 연구원은 하동에 내려오겠대?”
“아직 생각 중이야.”
“언제까지 생각하는 건데?”
민석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한기탁도 두 눈을 모았다.
“2주 안에 결정을 내릴 거야.”
동료들은 내 말에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으로 정한 마감 시간이었다.
물론 동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이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 * *
일주일 뒤, 난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양봉 수업이 있었다.
오늘따라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이영호와의 통화 때문이었다. 그는 전화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얼굴을 본다고 해도, 말이 통하지 않을 거 같았다.
“선생님, 손이요.”
남아영이 놀란 눈으로 말했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다.
벌이 손가락에 침을 박았다.
내성 때문에 느낌도 없었다.
“힘을 주면 안 된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였어.”
웃으며 말했다. 남아영의 놀란 눈은 여전히 내 손가락을 향하고 있었다.
평소보다 수업을 일찍 마치고 나왔다. 뒤에서 누군가 날 쫓고 있었다.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남아영이 놀란 토끼처럼 서 있었다.
“왜? 무슨 일 있니?”
“오늘 이상해 보여서요.”
“뭐가, 이상해?”
“평소랑 달라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같아요.”
“도움?”
남아영은 남다른 느낌의 소유자였다. 가까운 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독특한 촉이 발동하는 것 같았다.
“그럼 아영이가 도와줄래?”
남아영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간만에 패스트푸드점으로 향했다. 시골에선 보기 힘든 햄버거가 눈앞에 있었다.
남아영이 햄버거를 맛있게 먹었다. 아영이에게 고민을 상담할 마음은 없었다.
머리를 식히고,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다.
햄버거를 크게 베어 먹었다. 아영이는 햄버거를 먹다 웃었다. 내 모습이 우스웠던 모양이다.
“아영은 시골에 살고 싶니?”
햄버거를 다 먹고 아영에게 물었다.
“네, 살고 싶어요.”
살아보고 싶다가 아니었다. 거두절미하고 살고 싶다는 말이다.
시골이 무서운 이영호와 달랐다.
“혹시, 그전부터 원했던 일이야? 시골에 사는 거.”
“아니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시골에 다녀본 적도 없어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만 살았으니까요.”
난 콜라를 한잔 마셨다. 탄산이 입에서 터졌다.
그녀의 생각이 변한 이유가 궁금했다.
“이유가 뭐지?”
“생각이 변했어요.”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꿈이 생겼거든요.”
“아영이 꿈이 뭔데?”
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앞에 맑은 얼굴의 소녀가 보였다.
이 순간엔 이영호에 대한 생각이 잠시 접어 둘 수 있었다.
그녀가 꿈꾸는 일이지 뭔지 알고 싶었다.
남아영이 귀엽게 손짓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몸짓이었다.
난 귀를 기울였다.
아영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학교를 짓고 싶어요.”
“무슨 학교?”
난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저처럼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이 돈 걱정 없이 다니는 학교요. 학비만 무료가 아니라, 밥도 옷도 용돈도 주는 그런 학교요.”
“그런 학교는 굳이 시골에서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아니요, 시골에서 해야 해요.”
“이유가 뭐니?”
“무조건 공짜는 아니니까요. 다 함께 양봉을 하고, 양초도 만들고, 먹을 것도 직접 길러 먹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도시보다 시골이 더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좀 이상한 생각이죠?”
“아니야. 훌륭해.”
멋진 아이디어였다.
남아영의 말을 들으며 감탄했다.
그녀의 꿈을 위해, 나도 거들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말도 있잖아요.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다.”
남아영의 말을 곱씹었다.
머릿속에서 잊고 있던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이영호와 관련한 기억이었다.
그가 해외로 떠나기 전에 카페에 올린 글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남아영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뭘?”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잖아요. 햄버거 값은 해야죠. 저에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세요.”
남아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해결됐어.”
“벌써요?”
“다 아영이 덕이야.”
난 웃으며 말했다.
이영호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알 것 같았다.
어떤 이의 꿈
꿈의 모습은 참으로 다양하다.
한 분야의 최고가 되는 것일 수도 있고, 그저 작고 평범한 희망인 경우도 있다.
하문 초등학교의 운동장 앞에 섰다.
난 이곳에서 꿈을 꾸었다.
‘지리산 농부들’이 처음으로 뭉쳤던 장소이기도 했다.
지금은 양초를 생산하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이제, 새 단장을 할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물건을 내리고 있었다.
난 그들에게 물건을 놓을 위치를 말했다.
운동장 한가운데 거대한 스크린이 펼쳐졌다.
“대체 이게 다 뭔가?”
양초 공장을 관리하는 이춘배 어른이 물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눈빛이었다.
“이곳에 극장을 세우려고요.”
“극장이라니? 그럼 양초 공장은...”
이춘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야외극장이에요. 양초 공장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트럭에서 음향 장비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웬 극장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과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어서요. 어르신도 극장 가 보신지 오래되셨죠?”
“오래되긴 했지.”
그는 웃으며 답했다.
운동장 한가운데 그럴싸한 야외극장이 만들어졌다.
음향 장비는 비를 피할 수 있게 방수처리를 했다.
그에게 정리를 맡기고, 난 사무실로 향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