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끝내고, 신촌으로 이동했다.
오늘은 특별한 모임이 있었다.
일명 ‘극장을 찾는 사람들’이란 모임. ‘극찾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학생 때부터 활동했던 인터넷 영화 동호회다.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띄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어디서 뭐 하고 지냈어?”
“지금은 하동에 있어요.”
동호회를 이끌어가는 선배가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모임 사람들 중엔 티브이에서 날 봤다는 이도 있었다.
“하동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들었어요. 덕명 씨가 농부가 되다니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생각도 못 한 기회가 찾아와서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모임도 안 오는 줄 알았는데...”
“서울에 왔다 시간이 남아서요.”
동호회 친구들과 유쾌한 대화가 오갔다. 난 사람들과 함께 극장으로 향했다.
신촌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단관극장이었다.
오늘 관람하는 영화는 동호회 멤버의 지인이 만든 독립영화였다.
부족한 예산에 스텝들과 라면을 먹어가며 제작한 영화라고 했다.
극적인 내용은 없었지만, 가족애가 돋보이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난 한 사람에게 주목했다.
영화보다 그와 만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나고 뒤풀이가 이어졌다. 신촌에 있는 작은 치킨집이었다.
치킨에 맥주를 시켜놓고, 다들 영화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동호회 사람들과 한담을 나누다 잔을 들고 이동했다.
구석 자리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오즈의 마법사님.”
그는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오즈의 마법사는 카페에서 그가 쓰는 닉네임이었다.
본명은 이영호, 현재 나이 28세로 나와 동갑이었다.
“저에게 볼 일이?”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어떤 모임에도 그림자 같은 사람이 있다. 함께 어울리는 듯싶지만 고립된 섬처럼 존재하는 사람.
이영호도 그런 사람이었다.
“김덕명입니다. 닉네임도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고요.”
“아, 김덕명 씨.”
그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나를 안다는 표정이었다.
모임에서 만나면 대화가 없었지만, 온라인에선 우린 제법 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처음 만났을 때도 이런 식이었다. 온라인과 달리 얼굴을 맞대고는 대화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지독하게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렇게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지만,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건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동호회 사람들도 그의 성향을 알고 대화를 강요하지 않았다.
이영호도 ‘극찾사’의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각자의 개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영호 씨에게 용건이 있어서요.”
“저에게 용건이 있다고요?”
“네, 용건이 있습니다.”
이영호의 이마에 벌써부터 땀이 흘렀다. 용건이 있다는 말에 당황한 눈빛이었다.
“무슨 용건이죠?”
“혹시, 에코컴퍼니에 입사하셨나요?”
에코컴퍼니란 단어가 나오자 그는 잠시 주저했다.
그는 시선을 떨구고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 최종 면접을 봤습니다.”
“다행이네요. 아직 입사를 안 하셨다니.”
“그런데 그걸 어떻게?”
그는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눈 밑이 떨리는 게 보였다.
긴장하고 있었지만, 눈빛에 호기심이 느껴졌다.
“이영호 씨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요.”
“저랑 일을요? 아니 무슨...?”
이영호는 올해 대학원을 졸업하고, 에코컴퍼니에 연구원으로 입사한다.
훗날, 광고 기획자로 일하던 나와 만나게 되는데, 당시 광고주가 천연 미용용품을 생산하는 에코컴퍼니였다. 회사 대표가 연구원 출신이라 그런지, 광고 기획자인 내가 제품에 대해 정확하게 알기를 원했다. 매일 쪽지시험을 보는 수준으로 질문을 해댔다.
회사 연구원까지 만나서 물어야 할 지경이었다. 그때 만난 책임 연구원이 이영호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영호는 에코컴퍼니가 성장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의 연구 덕에 천연물질을 이용한 비누와 화장품을 대중화할 수 있었다.
이영호는 프로폴리스를 이용한 비누와 화장품을 개발한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회사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모두 자신이 잘나서 이뤄낸 성과라고 여겼다.
이영호의 헌신은 무시당했고, 결국 에코컴퍼니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나중에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외국계 회사로 이직을 했지만, 이직은 그에게 불행을 안겼다.
해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 마지막 소식이었다.
난 이영호에게 지리산 농부들이 이뤄낸 성과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리산 농부들의 수석 연구원이 돼달라고 제안했다.
최대한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영호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정중한 거절이었다.
난 어렵게 대화를 이어가며 이유를 물었다. 그는 난감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낯선 곳에 홀로 가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는 겁쟁이 사자 같았다.
한기탁과 민석 그리고 가희를 동료로 영입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나와 단단한 실로 연결된 관계였다. 돈도 환경도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시골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한기탁은 귀농 전선에서 고군분투까지 한 인물이었다.
이영호는 그들과 달랐다. 그와 나는 가느다란 실로 연결된 사람이었다.
언제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의 불행한 미래를 반전시키려는 목적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것이다.
난 고민을 안고 하동으로 내려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