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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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민사를 나오는 길에 전화가 울렸다.

샘플을 보낸 곳에서 입질이 온 것이다.

사찰이 아니었다.

당장 달려간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가희에게 받은 종이백은 두 개였다.

하나는 효민사의 주지에게 건넸다.

난 다른 하나에 담긴 양초를 꺼냈다.

성모마리아 모양을 한 밀랍 양초가 나왔다.

마감이 깔끔했다.

난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양초 학교

지리산 농부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경영지원팀장 한기탁은 밀랍 양초를 만들 할머니들과 계약을 했다.

계약하는 과정에서 그의 인성이 드러났다.

글을 읽지 못하는 할머니도 계셨다. 그는 하나하나 계약 사항을 알려주었다.

상여금에 대한 항목도 그가 먼저 제안했다. 수익이 많이 발생하면 나누는 것이 옳은 방향이었다.

나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쇼핑몰 운영팀장 백민석은 새로운 쇼핑몰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원래 계획은 밀랍 양초 판매도 ‘지리산 농부들’ 사이트 안에 넣은 것이었다.

그는 별도의 독립적인 사이트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지리산 농부들’ 사이트는 흠집이 난 과일과 곶감 그리고 벌꿀을 판매했다. 농산물이 주력상품이었다.

밀랍 양초는 생활용품이다. 벌이 생산하는 천연물질로 만들었기에 이질감은 없다. 하지만, 차후 상품 개발과 추가 등의 관리를 위해 독립된 사이트로 운영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멤버들과 상의한 끝에, 밀랍 양초는 새로 만든 사이트를 통해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식품과 분리해서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거라고 여긴 것이다.

‘지리산 농부들’ 사이트는 농산물 전문 사이트로 자리매김을 한다, 밀랍 양초와 기타 생활용품은 새로운 사이트를 열어 판매한다는 것이 최종 결론이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민석은 치타처럼 달리고 있었다.

제품 생산팀장 정가희는 사무실에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녀는 하문초등학교로 출근을 했다.

가희 역시 밀랍 양초를 만들 재료와 도구를 챙기고 있었다.

그녀는 밀랍 양초 생산의 책임자였다.

생산도 생산이지만 교육이 먼저였다. 곶감을 만들 때처럼 할머니들이 아는 일이 아니었다.

하나하나 알려드려야 했다.

하문초등학교는 밀랍 양초 공장으로 변해 있었다.

공장이라고 해서 딱딱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웃음이 넘치는 교실 같았다. 위생을 위해 장갑과 모자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눈빛이 밝았다.

셔틀버스 운전과 관리를 맡은 이춘배 어른도 표정이 좋았다.

곶감을 만들 때처럼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곶감 작업 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단순한 알바로 잠깐 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한번 농사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일이었다.

* * *

한기탁이 작성한 계약서를 확인하고 사무실을 나서려는 때였다.

“어디 가는 거야?”

민석이 물었다. 회의 때를 제외하곤 말을 편하게 하기로 했다. 나도 그게 편했다.

“영업 좀 하려고.”

“영업? 또 절에 가려고?”

효민사를 포함해 5개의 사찰에서 주문 의뢰가 왔다.

추천과 소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만, 현재까진 불교계로 한정돼 있었다.

“오늘은 다른 곳.”

“어딘데?”

민석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성당.”

“나도 처음부터 성당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됐다.”

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뭐 도울 일은 없고?”

한기탁이 어깨를 펴고 물었다.

“형은 아직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잖아요. 나중에 시간이 날 때 부탁할 일이 있을 거예요. 이번 건은 혼자 다녀올게요.”

“네, 대표님 명에 따르지요.”

난 밀랍 양초 샘플을 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오늘 방문할 곳은 칠곡에 있는 가실 성당이었다.

천주교 순교자들의 성지이기도 했다.

낡은 건물에 오랜 역사가 느껴졌다. 소박한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화사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들이 저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신부님이 날 반겼다.

“미카엘이라고 합니다.”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들어가시죠.”

성직자의 방답게 아담하고 단출했다. 타다 남은 양초가 눈에 띄었다. 내가 샘플로 보낸 양초였다.

“밀랍 양초에 푹 빠졌습니다.”

“물건이 맘에 드셨다니 기쁘네요.”

난 종이백에 있는 양초를 꺼냈다.

성모마리아 모양을 한 밀랍 양초였다.

그는 밀랍 양초를 들고 기뻐했다.

“이건 불을 붙일 수 없는 물건이네요. 작품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아니요. 정말 대단하네요. 이렇게 멋진 양초는 처음입니다.”

준비한 물건이 하나 더 있었다. 종이백에서 포도주 한 병을 꺼냈다.

“이건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런 것까지.”

미카엘 신부님은 포도주를 받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일이 쉽게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불교뿐만 아니라 천주교, 기독교도 양초를 많이 쓴다.

참선과 수행이 목적인 불교에선 초를 켜는 건 오래된 관습이다. 미사 때마다 제단에 초를 밝히고 성모상 앞에서 컵초를 켜는 등 천주교에서도 양초를 많이 쓴다. 종교마다 초에 불을 밝히는 것은 나름의 상징이자 규범이었다.

그만큼 소비하는 양초의 양도 많았다.

“뇌물인가요?”

“선물입니다.”

“밀랍 양초를 더 팔고 싶은 생각이시겠죠?”

미카엘 신부는 웃으며 물었다.

“그럼 더 좋겠죠.”

“미리 말씀드리지만, 그 일은 힘들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개인적인 목적으로 소량의 밀랍 양초를 구매할 생각이니까요.”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물건을 단체로 구매하는 건, 대교구에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천주교는 금전과 관련한 모든 사항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하나로 연결된 집단이었다.

지금까지 종교를 이어온 힘이었다.

“실망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상 못 한 건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엄격하게 통제돼있는 줄 몰랐을 뿐이다.

“전 김덕명 씨가 만든 밀랍 양초가 마음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미카엘 신부와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나가려는 순간, 그가 날 불렀다.

“하실 말씀이 더?”

“스스로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미카엘 신부는 방긋 웃었다.

“신부님의 말씀처럼 스스로 일어나겠습니다.”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스스로 일어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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