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농부들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민석과 가희 모두 만족스러운 눈빛이었다.
민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꿀이 기사가 돼서 나올지 몰랐어. 넌 이미 알고 있었던 거야?”
“나도 몰랐어.”
“아닌 것 같은데... 이렇게 될지 예상한 사람 같단 말이야.”
민석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개발을 부탁한 건 어떻게 됐어?”
“아직 작업 중이야.”
“언제쯤 끝날 것 같아?”
“빡세게 하면 며칠 안에 끝날 거야.”
“고생 좀 해줘.”
민석에게 요청한 것은 방문자 로그 기록이었다. 제품 구매와 상관없이, 사이트에 방문한 사람은 기록이 남게 마련이다.
로그 기록을 분석하면 사이트의 개선점이 보인다.
난 민석에게 로그 기록을 분석할 툴을 주문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요청한 사항이었다.
서버 일은 워낙 작업량이 많았다. 혼자 하기도 벅찼을 것이다.
“당장 제품을 판매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참고해.”
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당장 판매하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로그 기록을 분석하는 툴은 분명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이번 제품부터는 구매가 이뤄지는 패턴을 보고 싶어. 소비자의 마음을 알 수 있게.”
“알겠어. 며칠 안으로 끝내 볼게.”
구매자의 패턴만 분석해도 개선사항을 알 수 있었다.
곶감을 팔 때보다 전문적으로 사이트를 운영하고 싶었다.
민석은 곧장 작업에 돌입했다.
난 가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희야 준비는 잘 되고 있어?”
“나도 시간이 좀 필요해.”
“얼마나 필요하지?”
“빠르면 이틀 안에 끝날 거야.”
가희에게 밀랍 양초를 만드는 일을 주문했다.
토종꿀은 곶감보다 가격이 높았다.
농산품 중에서도 고가의 제품에 속했다.
난 꿀을 구매한 고객들에게 사은품을 주자고 제안했다.
선물 마케팅은 언제나 옳다. 고객들은 사소한 선물에도 반응한다.
밀랍 양초는 고급 사은품이었다.
그녀는 밀랍 양초 전문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곶감을 만들 때처럼 손이 빨랐다.
수작업인 만큼 시간이 걸리는 게 당연했다. 지금도 밤을 꼴딱 새우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작업실로 돌아가기 전에 물었다.
“그럼 사은품이 다 만들어지면 판매하는 거야?”
“그럴 거야.”
“얼마 안 남았네.”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곧장 작업장으로 돌아갔다.
부모님은 제품을 포장하는 일을 맡긴 상태였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나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양대호 선생과 만나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십니까?”
난 그에게 물었다.
양대호가 조용히 눈을 떴다.
“이번 일이 우리가 득이 될지 모르겠네.”
양대호와 난 여의도로 가는 길이었다. 오늘 방송이 잡혀 있었다.
‘모두의 토론’이란 토론 프로그램이었다.
유명 앵커가 진행하는 인지도 있는 방송이었다.
토론 주제는 토종꿀 논란이었다.
양대호는 토종꿀 협회를 만들고 활동 중이었다. 토종꿀 인증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서양벌을 키우는 농가에서 들고나온 것이다.
꿀이면 다 같은 꿀이란 논리였다. 토종벌을 키우는 농가보다 서양벌을 키우는 농가가 더 많았다.
방송국에서 이런 논란을 알고 토론을 제안했다.
서양벌을 키우는 농가는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자신들은 무조건 방송에 출연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먼저 싸움을 건 것이다.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꿀을 판매하기 직전 상황이었다.
난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네랑 함께 있어서 든든하네. 그런데 상대도 만만치 않을 거야.”
“상대라 함은?”
“서양벌 치는 박가 놈일세. 본인도 벌을 키우면서, 토종벌을 치는 사람들을 아주 우습게 보지.”
그에 대한 조사를 한 상태였다.
박문호란 중년 남자였다. 양봉 경력 20년으로 주로 이동식 양봉을 하는 자였다.
우악스러운 면이 있어서, 한번 흥분하면 제어를 잘 못 하는 성격이었다.
박문호는 혼자 출연하기로 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담당자를 자신의 편으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총 네 명의 패널이 확정된 상태였다.
“이거 하나 먹을 텐가?”
양대호는 우황청심환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았다.
난 받는 쪽을 선택했다.
약속한 시간에 방송국에 도착했다.
박문호는 양대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방송 전부터 기 싸움이 팽팽했다.
조연출이 모두에게 핀 마이크를 달아주었다.
“마이크는 손으로 치거나 만지시면 안 됩니다.”
그의 주의 사항을 말하고 피디에게 달려갔다.
담당 피디는 큐시트를 들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시다시피 저희 프로가 생방입니다.”
그는 상대를 비방하거나, 제품을 홍보하는 일 따위를 삼갈 것을 당부했다.
모두 담당 피디의 말에 수긍했다.
“자, 그럼 슛 들어갑니다.”
메인 카메라가 앵커를 잡았다.
“모두의 토론 장수길입니다. 오늘은 토종꿀 논란에 대해서 양측의 입장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토종꿀 논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요? 우선 토종꿀을 대표하는 측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양대호 협회장님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양대호가 카메라를 응시했다.
“토종벌 협회 회장 양대호라고 합니다. 제가 이곳에 나온 이유는 토종꿀에 대한 제대로 된 인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증이라고 하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앵커가 물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기준에 토종꿀이란 이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종꿀을 판매하는 농가는 ‘벌꿀’이라고 표기하고, 작은 글씨로 ‘토종벌이 모았습니다.’라고 적습니다.”
“몰랐습니다. 토종꿀이라고 적을 수가 없는 거군요. 양대호 협회장님의 말씀이 맞습니까, 노인성 사무관님?”
앵커는 식품의약품안전처 노인성 사무관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네, 양대호 협회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왜 그런 거죠?”
앵커는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저희 쪽에서는 둘 다 같은 꿀로 보고 있습니다.”
“같은 꿀로 본다.”
“성분이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서양벌을 키우는 쪽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마이크가 박문호에게 넘어갔다.
“양봉을 하는 많은 농가에선 대부분 서양벌을 키웁니다. 앵커님은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뭔가요?”
“토종벌은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서양벌은 채밀 양이 많고 키우기도 수월합니다. 반면 토종벌들은 채밀 양도 적고 키우기도 까다롭습니다. 방금 사무관님이 말한 것처럼 성분의 차이도 없습니다. 토종꿀이란 이름을 붙이려는 이유는 가격을 비싸게 붙이려는 수작입니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양대호의 안면 근육이 꿈틀거렸다. 우황청심환을 먹은 게 도움이 되지 않는 듯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건 모두 사실과 다릅니다.”
카메라가 나를 잡았다.
앵커가 나에게 물었다.
“본인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토종벌 협회에서 나온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모두 사실과 다르다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난 미리 준비한 유인물을 꺼냈다. 조연출이 나와 자료를 앵커와 패널들에게 나눠주었다.
“이게 뭔가요?”
앵커가 나에게 물었다.
“독일 양봉협회에 문의한 성분 분석표입니다. 이번에 제가 수확한 토종꿀의 성분을 분석했습니다. 서양꿀과 성분을 비교한 항목도 있습니다. 분석 내용을 보면, 토종꿀에 노화를 억제하는 항산화 성분이 많다는 게 보일 겁니다.”
“정말, 그렇네요. 당을 구성하는 성분은 비슷하지만 항산화 성분은 토종꿀이 탁월하게 많네요.”
앵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앵커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자료는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 이것이 내가 판매를 늦춘 이유였다.
지장사 양봉을 전수했다는 타이틀로 꿀을 팔고 싶진 않았다.
과학적 사실을 입증하고 싶었다.
소문만 듣고 오는 이는 고정 고객이 되기 힘들다.
단골을 만들기 위해서 객관적 근거가 필요했다.
그것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끄는 비결이었다.
“혹시, 토종꿀 성분이 다른 이유도 알 수 있을까?”
앵커뿐만 아니라 스튜디오 안의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박문호 선생님의 말씀처럼, 토종벌은 키우기가 몹시 까다롭습니다. 그 이유는 좋은 환경에서만 꿀을 채밀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농약에 취약합니다. 독성에 강한 서양벌과 다르죠. 1급수에서만 사는 물고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최상의 환경에서만 채밀하기에 성분 또한 다른 것입니다.”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노인성 사무관님은 이런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저희 쪽에서는 오래전에 검사를 한 사실이라. 이런 사실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자료 속에서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분석 내용은 정확했다.
노인성의 발언에 박문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앵커는 박문호에게 마이크를 넘기려 했으나 거부했다.
마이크는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전 싸우려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그저 토종꿀을 토종꿀로 부르고 싶어 나왔습니다. 서양벌을 키우는 일을 비판하러 나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힘을 합치기 위해 나왔습니다.”
“힘을 합친다는 게 무슨 뜻이죠?”
앵커가 물었다.
“정확하게 인증을 하는 일입니다. 토종꿀과 서양꿀을 구분해서 인증하는 일입니다. 그게 함께 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김덕명 씨가 목표로 하는 게 있습니까?”
“다음번엔 독일로 물건을 보내지 않을 작정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앵커가 강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하동에 연구소를 세울 계획입니다.”
“연구소요?”
“그런 일은 돈과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인 텐데요?”
“당장의 돈과 인력만을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목표가 있으면 달릴 힘이 생깁니다. 전 목표를 위해 달릴 뿐입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김덕명 씨의 목표를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송이 끝나고 양대호와 난 스튜디오를 나왔다.
박문호가 나에게 악수를 권했다.
난 그의 손을 잡았다.
“자네, 패기 한번 좋네. 마음에 들었어.”
박문호는 우악스러운 면이 있을 뿐이지, 나쁜 사람 같지 않았다.
양대호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