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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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사에 도착했다. 사무국 비구니가 반가운 얼굴로 맞았다.

“주지 스님을 뵐 수 있을까요?”

“잠깐 기다리세요. 제가 말씀을 드려보겠습니다.”

잠시 사무실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재미있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밀랍 양초였다. 몽당연필처럼 끝부분만 남은 양초를 마지막까지 알뜰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사무국장이 주지 스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주지 스님의 방은 언제나처럼 차향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그녀가 반가운 얼굴로 물었다.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앉으시죠.”

테이블에 차가 놓여 있었다.

“하시는 일이 아주 잘 되고 있다는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모두 주지 스님 덕분입니다.”

“이제 약조한 시간도 끝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매화 스님이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머릿속에서 지장사에서의 생활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처음 매화 스님을 소개한 이가 바로 주지 스님이었다.

“얼굴을 보니 감사의 인사만 전하러 온 게 아닌 듯합니다.”

그녀가 차를 들며 말했다.

역시, 주지 스님은 남다른 촉이 있었다.

“주지 스님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으십니다. 맞습니다. 오늘은 주지 스님과 상의 드릴 일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저와 상의를 할 일이라니 궁금하네요.”

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향이 깊고 그윽했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주지 스님도 아시다시피, 지장사의 양봉은 오랜 전통과 역사가 있습니다.”

“큰 스님 때부터 했으니 오래되긴 했죠.”

“지장사의 브랜드를 갖고 싶습니다.”

“뭘 갖겠다고요?”

그녀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저는 지장사에서 내려오는 양봉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장사의 벌도 분양받았죠. 그 사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실 겁니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그 사실을 밝힌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수준을 말하는 겁니까?”

“지장사 꿀이란 상표를 출원할 생각입니다. 지장사 양봉을 계승한 농부가 생산한 꿀이란 것을 밝히는 일이죠. 이게 제가 원하는 바입니다.”

“그 사실을 밝히면 덕명 씨에게 어떤 이득이 있습니까?”

주지 스님은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마음까지 들여다보겠다는 눈빛이었다.

“지장사의 양봉은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진 않았습니다. 몇몇 전문가들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는 일반 사람들도 알게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덕명 씨에게 큰 이익이 되겠군요.”

그녀의 말은 정확했다.

다가올 미래에 지장사 꿀은 유명세를 치르게 된다.

김꽃님 할머니가 방송을 통해 소개되면서, 자연스럽게 지장사 꿀에까지 세간의 이목이 쏠리게 될 것이다.

“김덕명 씨가 뭘 원하는지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절은 수양을 하는 곳입니다.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녀의 말대로 지장사는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니다.

지장사 꿀이 아무리 유명해진다고 해도, 살 방법은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농부 김덕명이 운영하는 쇼핑몰을 통해서다.

난 지장사의 벌과 양봉 기술을 전수한 유일한 농부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양봉 기술을 배웠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브랜드를 가져야 했다.

“지장사와 함께 장사를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출처를 밝히는 것뿐입니다. 이름을 빌리는 대가로 지장사에 매해 기부를 할 생각입니다.”

“역시 장사네요. 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주지 스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돈이 아닙니다.”

“돈이 아니라고요?”

돈이 아니라는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지장사에 필요한 물건입니다.”

난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주지 스님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밀랍 양초네요.”

가희에게 부탁한 물건이었다. 그녀는 지장사에서 양초와 비누를 만들었다.

양봉을 하는 중에도 심화 과정을 밟을 것을 권했다. 특히, 양초에 관련해서는 전문가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기대에 부응했다. 양봉 일이 끝나면 양초 만들기에 전념했다.

주지가 손에 쥔 물건은 특별한 양초였다. 지장사 벌이 만든 밀랍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이번에 수확한 밀랍으로 만든 양초입니다.”

주지는 양초를 보며 감탄한 모양이었다.

갖고 싶어 하는 눈빛이었다.

주지 스님의 방에 들어왔을 때, 난 촛대에 놓인 양초를 보았다. 그녀도 밀랍 양초를 아껴 쓰고 있었다.

“김덕명 씨는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군요.”

주지는 밀랍 양초를 한 손에 쥐고 말했다.

난 가방에 있던 밀랍 양초를 전부 꺼냈다.

“다음에 물건이 생산되는 대로 더 드리겠습니다.”

“말씀처럼 지장사 꿀이란 이름만 쓰는 겁니다. 그 일로 지장사에 피해가 온다면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물론입니다.”

준비해온 서류를 꺼냈다.

이름을 사용해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주지는 꼼꼼히 확인하고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이제 용건은 끝나신 겁니까?”

주지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다른 사찰에도 샘플을 보내고 싶습니다. 주지 스님이 추천을 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김덕명 씨는 농부가 아니라 사업가 같습니다.”

“농부라고 해서 농산물만 생산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자신의 물건을 홍보하고 판매할 수 있어야 진정한 농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지장사 브랜드를 갖게 됐다.

게다가 밀랍 양초의 판로개척까지.

이제 물건을 파는 일만 남았다.

화제의 중심을 옮기다

“오늘의 게스트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최고령 신춘문예 당선자이기도 하시죠. 김꽃님 시인을 스튜디오로 모시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아나운서의 말에 김꽃님 할머니가 스튜디오로 나왔다.

김영미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매일 그대와’라는 아침 방송이었다.

“멀리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하동에서 왔습니다.”

아나운서의 말에 김꽃님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의 주제는 ‘시인의 요리’입니다.”

아나운서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방청객들이 환호했다.

“김꽃님 시인께서 오늘 아주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주 특별한 요리입니다.”

“어떤 음식이죠?”

“전통방식으로 만드는 약과입니다.”

“전통방식으로 만든 약과요? 시중에 있는 것과 다른 점이 있나요?”

“제 약과는 꿀로 절여서 만듭니다.”

“아니, 꿀을 절여서 약과를 만든다고요? 어떤 맛일지 정말 궁금한데요. 자 그럼, 시인이 사랑하는 음식을 직접 만들어 보겠습니다.”

스튜디오 안에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정말, 밀가루 반죽을 하실 때 꿀을 넣으시네요.”

“이 꿀이 약과 맛의 비결이랍니다.”

아나운서의 질문에 김꽃님 할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전통의 방식을 그대로 따른 김꽃님 할머니는, 밀가루 반죽을 참기름에 튀겼다.

꿀의 향과 고소한 튀김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마지막으로 튀긴 반죽을 조청에 절여 약과를 완성했다.

아나운서를 포함해 방청객들도 입맛을 다셨다.

“하나 맛봐도 될까요?”

김영미 아나운서 꽃 모양으로 찍어낸 약과를 보며 물었다.

“그럼요. 얼마든지 맛보세요.”

스텝이 나와 방청객들에게도 약과를 나눠주었다.

“와, 이거 정말 맛있어요.”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전 정말 달 줄 알았거든요. 반죽에 꿀이 들어가는 걸 보고요. 그런데 생각보다 달지 않아서 놀랐어요. 기분 좋은 단맛이네요.”

과장된 표정이 아니었다. 방청객들도 감탄한 얼굴로,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인께서 비결은 꿀에 있다고 하셨는데, 이게 대체 무슨 꿀인가요?”

“우리 딸이 직접 딴 꿀이에요.”

스튜디오 뒤, 화면에서 사진이 등장했다.

김꽃님 할머니와 매화 스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비구니가 되기 직전 사진이었다.

“따님이 정말 미인이세요. 그런데 직업으로 벌을 키우시는 건가요?”

“양봉은 취미로 하는 거죠.”

“아, 그렇군요. 그럼 지금은 뭘 하세요?”

“출가를 했답니다.”

“그럼, 스님이시라고요?”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방청객들도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 * *

방송이 나가고 인터넷 게시판이 불이 났다.

-꿀 따는 비구니, 그녀는 산에 사는 요정인가?

-약과의 맛의 비밀은 꿀이다.

-전통방식 약과 어디서 구함?

-비구니들만 사는 사찰이 있는지 전혀 몰랐음.

-방송에 나온 꿀은 어디서 구하는지?

-미모의 비결은 꿀?

한국 신문의 배선아 기자도 게시판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배선아의 사수인 김만석이 물었다.

“선배 이거 기삿거리 좀 될 거 같지 않아요?”

김만석도 게시판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아침 방송에서 별걸 다했네. 시인의 요리라니, 그런데 반응이 왜 이렇게 뜨거운 거야? 양봉하는 여자 사진 볼 수 있나?”

“잠시만요.”

배선아는 방송에 나왔던 사진을 찾았다.

“이거 그림 나오는데, 인물도 좋고.”

“선배 생각도 그렇죠?”

“사찰 위치는 어디야?”

“그런 내용은 방송에 나오지 않았고요.”

“빙고, 아직 다른 곳에서 입질 없지?”

“당장 움직여 볼까요?”

“소재 파악은 문제없는 거지?”

“방송국에 아는 후배가 있어요. 부탁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역시, 배오지랖이야. 갈 때 사진기 잊지 말고.”

“네, 그럼 전 이만.”

배선아는 신문사를 나왔다.

매화 스님의 소재 파악은 어렵지 않았다.

배선아는 매화 스님이 있는 지장사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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