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 (52/205)

분봉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벌통에 꿀이 가득했다.

“덕명아, 이제 꿀을 따도 되는 거냐?”

아버지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네, 이제 따도 될 거 같아요.”

매화 스님을 통해서도 확인을 받은 상태였다.

내가 키우고 있는 벌통은 두 배로 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분양한 벌통도 마찬가지였다.

총 400개의 벌통에서 꿀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중 100개는 마을 사람들의 몫이었다.

“엄청난데, 이렇게 많은 꿀을 언제 다 물어온 거지?”

가희가 신나게 꿀을 따며 물었다. 부모님과 민석 그리고 매화 스님도 열심히 꿀을 땄다.

마을 사람들도 콧노래를 부르며 꿀을 따고 있을 터였다.

토종벌은 수확량이 많지 않아 꿀도 적었다.

한 통 당 많아야 18킬로그램이었다.

난 벌 밥을 맹신하진 않았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10킬로그램씩 꿀을 땄다.

꿀은 벌들이 먹는 식량이기도 했다. 그들이 잘 살아야 더 많은 꿀을 딸 수 있었다.

꿀을 따기 전, 마을 사람들에게도 주의를 줬다. 사람들도 수긍했다.

마을 사람들의 꿀 작업은 하루 만에 끝났다.

전부 합치면 200통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지만, 개별적으로 하면 고작 2통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채취한 100통 분량의 꿀과 부산물들이 창고에 쌓였다.

모두 정량을 맞춰서 꿀을 채취했다. 내 벌통까지 관리하고 있지만, 모두 즐거워 보였다. 자신들도 그만큼의 꿀과 부산물을 소유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달리 우리 집은 하루만에 일이 끝나지 않았다.

부모님, 매화 스님을 비롯해 모두가 함께 작업했지만, 벌통의 개수가 워낙 많았다.

곶감 작업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묵묵하게 일을 했다.

지리산 농부들도 군말 없이 작업에 임했다.

매화 스님도 자신의 일처럼 도왔다.

며칠의 고생 끝에 작업이 모두 끝났다.

곶감을 넣었던 창고에 꿀이 가득 찼다.

“이게 다 몇 통이야?”

가희가 창고 안에 있는 꿀 병을 보고 물었다.

300개의 벌통에서 10킬로그램씩 꿀을 땄으니, 총 3,000킬로그램의 꿀을 딴 것이다.

무려 3톤이었다.

1킬로그램짜리 유리병에 소분해서 저장해 두었다.

“전부 3천 개야.”

민석이 가희를 보며 말했다. 부모님도 흐뭇한 표정으로 창고 안에 가득한 꿀 병을 바라보았다.

지장사 벌이 만든 꿀은 특별히 고급스러운 도자기에 담아 봉인했다.

“이제 판매만 남은 건가?”

민석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는 꾸준히 ‘지리산 농부들’에 글을 올리고 있었다.

양봉을 하는 전 과정을 회원들과 공유하고 있었다.

회원들의 대부분은 설에 곶감을 샀던 사람들이었고, 입소문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 농부들 꿀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판매 공지도 올리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게시판에 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꿀을 사고 싶다는 요청들이었다.

“그나저나 이름은 뭐로 할 거야?”

“무슨 이름?”

“꿀 이름.”

“지리산 농부들의 꿀인 건가?”

민석은 꿀 이름을 고민한 듯 보였다. 유리병에 꿀이 가득했지만, 라벨은 붙지 않은 상태였다.

“브랜드와 판매에 관련해서는 조만간 일정을 공유할 예정입니다.”

난 부모님과 멤버들에게 말했다.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니?”

어머니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꿍꿍이라뇨? 계획이죠.”

* * *

그날 오후, 난 매화 스님과 함께 지장사로 향했다.

그녀는 지장사와 하동을 오가며 벌을 돌봐주었다.

양봉에 관련한 기술도 아낌없이 전수했다.

이제 그녀와의 시간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녀와 약속한 기한은 1차 수확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그녀와 볼 일은 없는 것이다.

오랜만에 나누는 필담이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즐거웠습니다]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그땐, 무조건 거절부터 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친구 같은 스승으로 변했다.

[다른 건 못해도 어머니 소식은 종종 전하겠습니다]

그녀가 펜을 들지 못했다.

이곳에 오기 전 김꽃님 할머니를 뵀다.

할머니의 눈이 젖어 있었다.

그저 잘 가라는 말뿐이었다.

[감사하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마음이 이해됐다. 속세와 인연을 끊은 사람이었다.

이제 비구니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제가 괜한 말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말씀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나에게 인사를 했다.

마지막 작별 인사였다.

그녀가 돌아서서 떠나려 할 때였다.

난 차에 있던 배낭을 꺼내 그녀에게 달려갔다.

매화 스님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용건이 더 남은 겁니까?]

매화 스님은 목에 걸린 수첩에 글을 적었다.

[매화 스님에게 더는 용건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절 따라오십니까?]

[지장사에 용건이 있습니다]

난 그녀와 함께 산에 올랐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땐 한겨울이었는데, 지금은 사방에 푸른 기운이 가득하다.

산뜻한 기분에, 지장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즐거웠다.

매화 스님과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같은 길을 걸어도 각자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