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양대호가 우리 집을 찾았다.
“분양은 잘 됐다고 들었네.”
양대호는 기분이 좋아 보았다. 협회를 창립하겠다고 말하고 일주일 뒤 사이트를 오픈했다.
나의 일 처리 방식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모두 회장님 덕입니다.”
그는 토종벌 협회의 초대 회장을 맡았다.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토종벌을 키우는 사람들 사이에선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회장이라니 어색하군. 그냥 편하게 부르게.”
“알겠습니다.”
“그 벌을 볼 수 있겠나?”
양대호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내가 지장사에서 벌통을 가져왔다는 말에 호기심을 보였다. 감로꿀의 맛을 봤기에 궁금증이 더 커졌으리라.
그를 양봉장으로 데려갔다.
내색은 안 했지만, 큰 규모에 놀란 듯 보였다.
“이것입니다.”
지장사에서 가져온 벌통은 특별 보관 중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벌통 뚜껑을 열었다.
안을 살피고는 안색이 변했다.
흥분한 사람 같았다.
“이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의 토종벌은 순수한 종이 아니었다. 정식 명칭은 동양벌이었다.
한국, 중국, 일본에 서식한다는 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마주하는 벌은 그것과 결이 달랐다.
“사라진 줄만 알았던 토종벌 아닌가?”
그는 단번에 알아봤다.
“날개에 광채가 돌다니. 문헌에 나온 말이 사실이었어.”
책에서 읽거나, 전해 듣기만 했던 벌이었다.
날개에서 은은한 황금빛이 도는 벌.
멸종했다고 알려진 순수 토종벌이었다.
“기회가 생긴다면 나도 한번 키워보고 싶네만.”
양대호의 양봉 업력은 40년이었다. 벌과 함께 인생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토종벌을 키운다는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키운 벌은 순수 혈통이 아니었다.
동양에서 자생하는 벌을 토종벌이라 여기고 키운 것이다.
순수 토종벌을 보고 욕심이 날 만도 했다.
“고작 한 통이지만 안 될 것도 없지요.”
그는 아이처럼 들뜬 표정을 지었다.
“아시다시피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나도 잘 알고 있네.”
“저도 양 선생님께 도움을 청할 일이 많을 겁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게. 내가 자네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겠네.”
“말씀만 들어도 든든합니다.”
양대호는 간이라도 빼줄 것 같았다.
* * *
그날 저녁, 마을 회관에 모임이 있었다.
모임의 주최자는 바로 나였다.
자세한 내용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며칠 전부터 공고한 상태였다.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함께 의논하자고 했다.
마을 회관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하동에 있는 농부들이 다 모인 것만 같았다.
친숙한 얼굴도 보였다. 가희의 아버지 정길산이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문 초등학교 자리에서 농촌체험학습장을 운영하는 이춘배 어르신도 왔다.
심지어 하동부인회관의 할머니들도 몰려온 듯했다.
앉을 자리가 없어 서 있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엄청난 호응이었다.
난 단상으로 나갔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한순간에 멈췄다.
모두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농부 김덕명입니다.”
시작도 안 했는데,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처음 이 자리에 섰을 때가 생각났다.
지금은 여유가 생겼다.
“올해 곶감 농사는 풍년이었습니다. 모두 마을 여러분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용거래로 감을 샀던 일이 떠올랐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곶감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아시다시피 곶감은 겨울 농사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까지, 양봉을 할 생각입니다.”
양봉이란 말에 회관이 술렁였다.
양봉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제가 양봉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을에 풍부한 과일나무 때문입니다.”
내 말을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감나무에 열매가 열리는 이유는, 벌이 수분을 했기 때문입니다. 벌은 꿀을 따면서 꽃가루를 통해 수분합니다. 인간 대신 일을 하는 것이죠. 벌이 수분을 하지 않으면 사람이 붓을 들고 직접 해야 합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네.”
여기저기서 비슷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제야 조금 이해하겠다는 눈빛이었다.
“벌통을 여러분들에게 하나씩 드릴 생각입니다.”
벌통을 주겠다는 말에 회관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벌통을 사라는 말은 아닙니다. 벌통을 놓아드리는 건, 관리를 맡긴다는 뜻입니다.”
“공짜로 일을 부려먹는 거네.”
불만이 튀어나왔다. 그 말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공짜가 아닙니다. 관리해주시는 대가로 벌통을 하나씩 드릴 예정입니다. 벌통 하나당 하나를 더 드립니다. 공짜로 생긴 벌통에서 나오는 소득은 마음대로 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언제부터 할 예정인가?”
“일주일 안에 분양할 예정입니다. 상황을 봐서 해마다 벌통을 하나씩 더 드릴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당 하나를 주는 것도 모자라서 해마다 더 주겠다는 건가?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요?”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 뭔가?”
조건이란 단어가 나오자 모두 눈을 크게 떴다.
다들 긴장한 눈빛이었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농약을 치지 않는 겁니다.”
“설마 그게 다란 말인가?”
“물론 하나 더 있습니다. 벌통의 관리 상태에 따라 나머지 한 통을 더 줄지 말지를 판단할 것입니다.”
“그게 끝인가?”
“이게 전부입니다.”
“그런 조건이라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우린 친환경으로 하니까 농약을 칠 일이 없단 말이지. 그리고 자네 말대로 벌이 우리 대신 일하는데, 관리를 못 해줄 이유가 없다네.”
회관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사라졌다.
갑자기 신이 난 듯 웃고 있었다.
“그런 조건이라면 한통이 아니라 두통, 세통, 열통도 받을 수 있지.”
다들 그 말에 동의하는 눈빛이었다. 그래도 확인은 필요했다. 만약을 위한 조치였다.
“반대하거나 싫은 분은 지금 말씀하십시오. 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에게는 벌통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난 회관 안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쳤다.
“반대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모두 두리번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수에는 보여주기의 효과가 있다.
반대가 없다는 만장일치기 때문이다.
아무도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그럼 모두가 동의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분양 방법과 세부적인 일정은 차후에 공지하겠습니다.”
토종벌을 이용한 친환경 인증을 시험적으로나마 해볼 기회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모두 득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친환경 농산물 인증도 받고, 공짜 벌통이 생기는 일이었다.
물론 나에게도 득이었다. 인력을 쓰지 않고도 벌통을 늘리는 일이었다.
“덕명아, 나 좀 보자.”
아버지가 날 불렀다.
걱정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왜 그러세요?”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니냐?”
“큰일이라니요?”
“사람들에게 공짜로 벌통을 준다는 이야기 말이다.”
난 기분 좋게 웃었다.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방법이 있다는 거냐?”
“네, 방법이 있어요.”
“나에게 슬쩍 말해줄 수 있겠니?”
아버지는 귓속말이라도 해달라는 듯이 포즈를 취했다.
제법 궁금한 모양이었다.
난 아버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벌통을 두 배로 늘리는 방법이 있어요.”
두 배로 늘리기
남쪽의 봄은 빨랐다. 지구 온난화까지 더해져 꽃이 일찍 개화했다.
“여기저기 꽃향기가 진동하네.”
가희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배꽃부터 복숭아, 벚꽃까지 벌들을 유혹하는 화려한 꽃들이 지천이었다.
벌은 본능적으로 꿀을 채밀했다.
벌통에 꿀이 들어차고 있었다.
“신기하네. 곧 있으면 꿀이 가득 차겠어.”
민석이 벌통 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정성 들여 관리한 덕이었다.
집에 있는 양봉장뿐만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 분양한 벌통에도 꿀이 들어차고 있었다.
벌통을 받겠다는 사람들이 넘쳤다. 공평하게 한 통씩 분양했다.
나의 양봉장에 있는 벌통과 사람들에게 분양한 벌통을 합쳐서 모두 200여 통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할 생각이야?”
민석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벌통을 살피던 가희도 시선을 돌렸다.
얼굴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사람들에게 약속한 공짜 벌통을 말하고 있었다.
“약속대로 해야지.”
“더 분양받기는 힘들어.”
민석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토종벌 협회를 통해 100통을 더 분양받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힘들었다.
그것이 분양을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양이었다.
“더 분양받을 생각은 없어.”
내 말에 민석과 가희는 놀란 듯했다.
“분양받지 않고 벌을 구할 방법이 있다는 거야?”
“방법이 있어.”
“그게 뭔데?”
“곧 알게 될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