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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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에 도착했다. 고풍스러운 한옥이 보였다.

황유신 선생님의 집이었다. 마당에 있던 황정아 여사가 밖으로 나왔다.

“잘 지내셨어요?”

“덕분에 잘 지냈답니다.”

“그나저나 선생님은 어디 계시죠?”

“제자가 온다고 아까부터 밖에서 기다렸는데.”

그때였다.

등 뒤에서 호랑이 기운이 느껴졌다.

커다란 풍채에 호랑이 눈썹을 가진 남자가 앞으로 성큼 나왔다.

“왜 이렇게 늦은 거냐?”

늦지 않았다. 정시 도착이었다.

“어서 들어가자.”

황유신은 다짜고짜 내 등을 떠밀었다. 예나 지금이나 힘이 장사였다. 우린 따뜻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황정아 여사가 차를 내왔다.

“쑥차에요. 마시면 손과 발이 따뜻해질 거예요.”

황정아는 차를 놓고 자리를 피했다. 전에 왔을 때, 그녀가 쑥을 말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만든 차인 듯했다.

황유신은 내 옆에 놓인 보자기에 시선을 돌렸다.

“선물입니다. 선생님.”

난 그에게 선물을 건넸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이게 그 유명한 지장사 꿀이구나.”

“감로꿀입니다.”

“나도 말로만 들었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그는 당장 꿀을 맛보았다. 노인의 얼굴에서 해맑은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꿀에서 숲의 향이 나다니, 역시 탁월한 맛이구나.”

기분 좋게 시식을 마친 후에 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묻고 싶은 게 있는 표정이었다.

“앞으로 뭘 할 작정이냐?”

제법 진지한 말투였다. 곶감 농사를 배운 뒤에 바로 양봉을 한 까닭이 무척이나 궁금한 것 같았다.

“선생님은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시는지요?”

“무슨 말 말이냐?”

“도시의 청년들을 농촌으로 끌어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네 눈빛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황유신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는 표정이었다.

“곶감만 가지고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곶감은 겨울에 집약된 농사이기도 합니다.”

“네 말처럼 곶감은 단기간에 만든다. 그래도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작물이다. 도시 청년들이 양봉을 매력적으로 느낄지 모르겠구나.”

“제가 곶감 농사로 잘될 수 있었던 건, 농부의 자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의 가르침과 하동이란 지역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도시인들에게는 저와 같은 기반이 없습니다. 게다가 농업은 초기 비용이 많이 드는 일입니다. 선뜻 나서기 힘든 일이죠.”

황유신은 생각에 잠겼다. 동의한다는 얼굴이었다.

“양봉은 비교적 적은 자본으로도 시작할 수 있는 농업입니다. 심지어 도시에도 교육이 가능합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시에서도 가능하다는 말에 놀란 것 같았다.

“상품성으로 보면 곶감처럼 가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꿀을 가공한다는 말이냐?”

“벌은 꿀 말고도 프로폴리스와 밀랍, 화분, 로열젤리를 생산합니다. 이미 테스트 상품을 만들어 봤습니다. 밀랍 양초와 비누죠. 가공제품을 만들 수 있다면 수익은 더 늘어 날것입니다. 벌이 꽃을 찾듯 청년들이 농촌을 찾게 만들 계획입니다.”

“역시 너의 식견은 남다르구나. 숲과 나무를 다 보고 있으니 말이다.”

황유신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말씀인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곶감을 배울 때, 밀랍을 쓰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때 명인에게 구한 귀한 물건이라고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기억한다.”

“그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려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벌을 더 분양받을 생각입니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 말아라.”

황유신은 벌떡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당장 그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는 한번 결심한 일을 미루지 않았다.

난 운전석에 앉아 황유신을 기다렸다.

황유신은 통화를 마치고 차에 탔다.

“양가 놈하고 저녁 약속을 잡았다.”

황유신이 차에 타며 말했다. 추진력 또한 명인다웠다.

우리 교외에 있는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식당이라고 부르기에 아까울 정도였다. 거의 궁궐 수준이었다.

황유신이 들어가자 매니저가 그를 알아봤다.

“선생님 이쪽으로 오시죠.”

황유신이 내부로 들어갔다. 한정식집 특유의 단정함이 기분을 좋게 했다.

전통 문양 장식의 문을 열자 예약한 방이 나왔다. 조선 시대 귀족들이 식사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우린 자리를 잡았다.

“양가 놈은 언제나 느리다니까.”

황유신이 웃으며 말했다. 그가 느리다기보다 우리가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이 열리고 하얀 구레나룻의 남자가 등장했다.

황유신보다 체구는 작았지만 땅땅하고 다부져 보였다.

“오랜만일세.”

황유신의 인사에 그가 가볍게 웃었다. 그는 황유신보다 나에게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황 선생님이 자랑하던 그 제자요?”

양대호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맞네. 내 애제자지.”

황유신은 자랑스러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곧 음식이 나왔다. 황유신과 양대호는 그동안 못한 이야기를 나눴다.

난 옆에서 가만히 듣기만 했다.

본론은 식사가 끝난 뒤 꺼낼 생각이었다.

음식을 다 먹고 차가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불러낸 이유가 뭡니까? 제자까지 데리고.”

양대호도 눈치가 있었다. 이런 자리에 제자까지 데리고 나왔다는 건, 다른 목적이 있다고 여겼다.

“이 녀석이 양봉을 시작했다네.”

“그래요?”

양대호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게 오늘 만남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벌을 좀 분양해주게.”

양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유신의 마음을 읽었다는 표정이었다.

“그런 일이라면 어렵지 않죠.”

“부탁드립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였다.

“그래 몇 통이나 필요한가?”

“백통 정도면 될 거 같습니다.”

양대호뿐만 아이라 황유신도 놀란 표정이었다.

“내가 키우는 벌통이 서른 개 있네. 그중에 세 통을 분양해주지.”

“감사히 분양받겠습니다. 가격도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난 공손하게 말했다.

“그런데 많은 벌로 뭘 할 생각인가? 돈 욕심이 너무 큰 거 아닌가?”

양대호의 말에 황유신의 눈썹에 꿈틀거렸다.

“꿀만 딸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벌을 대규모로 키우는 건 다른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황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집에서 했던 말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는 눈치였다.

양대호와 황유신은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황유신은 농촌이 청년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랐다면, 양대호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다른 쪽에 있었다.

광고기획자 시절에 알아놓은 정보기도 했다.

황유신처럼 직접 부딪히진 않았지만, 그도 내가 관리하는 명인 중 하나였다. 당연히 정보를 알고 있었다.

양대호는 지독한 환경주의자였다.

“전 토종벌을 이용해 친환경 인증 제도를 만들 생각입니다.”

“친환경 인증?”

양대호가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토종벌은 서양벌과 달리 농약에 취약합니다. 유기농 공법을 쓴 곳에서만 살 수 있죠.”

“자네 말이 맞네.”

“벌은 식물들의 수분을 돕습니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농부들도 토종벌을 반길 겁니다. 토종벌로 친환경 농산물을 인증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토종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친환경 인증이라, 그런 일이라면 크게 벌여야지.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실언을 했네.”

“아닙니다. 제가 처음부터 잘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황 선생님, 제가 오해를 했습니다.”

양대호는 황유신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황유신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뜻을 전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내가 가진 벌을 다 분양할 수도 없고.”

양대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약속대로 세 통만 분양하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어쩔 생각인가?”

“저에게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조건 돕겠네.”

계획대로 일이 풀렸다.

그를 통해 최소 백통은 확보할 생각이었다.

함께 가야 멀리 간다

황유신은 양대호를 집까지 데려왔다.

식사가 끝나고 술자리를 가졌다.

“한잔 더 하고 가라고.”

“아무렴요. 그래야죠.”

황유신이 양대호에게 말했다. 그들은 제법 마셨다.

난 한잔도 입에 대지 않은 상태였다. 운전을 해야 했다.

양대호는 나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은 눈치였다.

그가 이곳까지 온 이유였다.

“정아야, 술상 좀 내와라.”

황정아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그녀는 우직한 소 같았다.

까다로운 오빠와 함께 살며 시중을 들고 있지만, 불평 한마디 없었다.

황정아 여사는 미리 준비라도 했다는 듯이 술상을 가져왔다.

“이제야 같이 한잔하겠네.”

양대호가 술잔을 건네며 말했다.

“네. 어르신.”

“어르신이라니. 그냥 편하게 불러. 양 선생이라고.”

“양 선생은 무슨, 그냥 양가지.”

황유신은 웃으며 말했다. 양대호도 미소로 받아쳤다.

양대호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황유신에 비해 술이 약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자네의 생각이 궁금하네. 어떤 수로 그 많은 벌을 분양받을 생각인가?”

술에 취한 얼굴이었지만, 흔들림 없는 말투였다.

“양 선생님이 양봉 농가와 연결이 돼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대부분 토종벌을 키우는 사람들이고요.”

“대부분이 아니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은 토종벌을 키운다네.”

심기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토종벌 신봉자였다.

토종벌만이 환경을 더 이롭게 한다고 믿고 있었다.

말을 이어갔다.

“토종벌이 꿀을 채밀하면 토종꿀이 나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심지어 토종꿀이라고 부르기도 힘드니까요.”

“자네가 그걸 어떻게?”

양대호는 술이 확 깬 얼굴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이때만 해도 토종꿀을 토종꿀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다.

식품안전의약청 기준에 토종꿀이란 이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토종꿀을 판매하는 농가에선 ‘벌꿀’이라고 표기한 뒤에 그 밑에 작은 글씨로 ‘토종벌이 모았습니다.’라고 적었다.

토종벌에 대한 자세한 연구와 기준이 없는 탓이었다.

“토종꿀에 대한 인식을 개선할까 합니다.”

“그건 아주 반가운 이야기네만, 자네가 벌통을 분양받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큰 연관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드리면, 토종벌 농가들의 힘을 합치고 싶습니다. 그 일에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힘을 합친다?”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황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조직적으로 뭉치면 토종꿀 인증 시스템을 만들 수 있습니다.”

“토종꿀 인증 시스템이라...”

“토종벌을 분양하고 분양받을 수 있는 장치도 만들 생각입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돈은 많이 들지 않습니다. 단지 기술이 필요할 뿐이죠.”

“어떤 기술인가?”

“토종벌 협회 사이트를 개설하는 일입니다.”

이번 일은 ‘지리산 농부들’의 사이트를 개설한 일과 결이 달랐다.

난 토종꿀 인증 시스템과 분양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을 구상했다.

그에게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방법을 공유했다.

양대호는 이해력이 빠른 사람이었다.

“당장 사람들을 모아보겠네.”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입니다.”

“최대한 빨리 일을 진행해 보겠네.”

“감사합니다.”

그는 마음이 급했는지, 술도 빠르게 마셨다. 결국 술에 못 이겨 잠이 들고 말았다. 주사는 없는 사람이었다.

난 황유신 선생과 눈을 마주쳤다.

황유신은 술상을 물리고 양대호를 자리에 눕혔다.

“술도 깰 겸 바람이나 쐬자.”

“네, 선생님.”

난 황유신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었다.

그는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그를 쫓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빛나는 달이 하나로 뭉친 눈처럼 보였다.

“넌 사람을 놀래는데 재주가 있구나.”

“그게 무슨 말씀인지...”

둥근 달을 바라보던 그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양가에게 그런 말을 할 줄 전혀 몰랐단 뜻이다.”

황유신은 제법 술을 마신 상태였다. 지금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어디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신비한 능력으로 취기를 떨쳐낸 사람 같았다.

“실은 선생님이 양 선생님과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황유신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 그와 대면했을 때도 ‘오늘의 농부’에서 인터뷰했던 말을 언급했다. 인터뷰는 황유신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양대호도 있었다.

황유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눈치였다.

“나에겐 친환경과 관련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까닭이 뭐냐?”

그다운 질문이었다.

“선생님께는 제가 당장 해야 할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곶감 이후에 제가 양봉을 선택한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양가 놈에겐 그런 이야기는 쓸모가 없었겠지.”

“양 선생님이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만 묻자.”

“네, 선생님.”

“그럼,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냐? 토종벌을 이용한 친환경 인증 말이다.”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친환경이 농업의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 초석을 다지기 위해 양봉을 시작하는 것이고요. 선생님께는 구체적인 계획이 섰을 때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대단하구나. 네가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 내가 훌륭한 제자를 뒀구나.”

“과찬이십니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자자.”

다음 날 아침 양대호는 숙취에 시달렸다.

다 같이 아침밥을 먹을 때도 힘들어했다.

황유신은 그를 보며 말했다.

“양 선생, 술이 그리 약해서야.”

“어제 제가 좀 무리를 했습니다.”

“내가 귀한 걸 드리리다.”

황유신은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손에 꿀 병이 있었다.

“내 제자가 가져온 꿀이요. 이걸 먹으면 한결 나아질 거요.”

양대호는 꿀의 명인이었다. 내가 가져왔다는 말에 그 맛을 궁금해했다.

황유신은 적당한 비율로 꿀물을 만들었다.

양대호가 꿀물을 들이켰다. 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꿀을 마시던 도중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게 무슨 꿀입니까?”

나를 보고 물었다.

“지장사, 감로꿀입니다.”

“어쩐지 다르다 했더니, 말로만 듣던 그 꿀이었군요.”

양대호는 꿀물을 기분 좋게 다 마셨다.

“꿀물 덕인지 머리가 맑아졌습니다.”

그는 정말 숙취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였다.

작별을 고할 때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자네 말대로 사람들을 모아 보겠네. 곧 연락을 함세.”

“감사합니다.”

조만간 양봉장에 벌통이 가득 차게 될 것이다.

그 전에 미리 준비해야 할 일이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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