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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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절벽이었다. 드디어 도착했다는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그녀는 절벽 끝에 있는 작은 동굴로 들어갔다. 지리산 깊은 곳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입구가 좁고 작았다. 몸을 구부려야 간신히 들어갈 크기였다. 난 그녀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은 생각보다 넓고 쾌적했다. 벌통이 동굴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통나무로 만든 벌통이 스무 개가 넘었다. 제법 규모가 있었다.

난 종이에 감상에 적었다.

[대단하네요. 이런 곳에서 벌을 키울 줄은 몰랐습니다]

[큰 스님이 발견한 공간입니다]

큰 스님이라고 하면 연화 스님에 들었던 사람이었다. 이곳에서 최초로 양봉을 시작한 인물이다.

매화 스님은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가방에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녀가 가방에서 노르스름한 빛깔의 물체를 꺼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난 종이를 꺼내 글을 적었다.

[그게 뭔가요?]

[벌 밥입니다]

겨울에 채밀을 못 하는 벌을 위해 인공으로 만든 밥이다. 아무리 겨울잠을 잔다고 해도 당분을 흡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벌을 위해 꿀을 남겨 둔다고 해도, 인간이 꿀을 따가기 때문에 밥이 부족한 것이다.

보통은 설탕물을 먹인다고 들었다.

그렇게 설탕을 먹여 채밀한 꿀이 마트에서 흔히 파는 사양꿀이다.

하지만 그녀가 꺼내는 벌 밥은 설탕물 같지 않았다.

배낭에 든 벌 밥을 다 꺼냈을 때 난 그녀에게 물었다.

[벌 밥의 재료는 뭔가요?]

[차꽃과 야생화 그리고 잎사귀를 넣고 만들었습니다]

[설탕은 넣지 않은 거군요]

[제가 키우는 벌들에겐 설탕을 먹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제가 벌 밥을 주는 걸 잘 봐두십시오]

[이걸 저도 해야 하나요?]

[한꺼번에 다 주지 않을 작정입니다. 제가 가고 나면 매일 조금씩 떼어서 주십시오. 그 뒤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것도 숙제인가요?]

[숙제가 아니라 벌을 키우는 일입니다. 매일 같이 상태를 살피고 물도 갈아주십시오]

그녀는 동굴 구석에서 있는 상자로 다가갔다. 그곳에 양봉에 필요한 도구들이 들어 있었다. 벽에는 방충복이 걸려있고, 양봉 모자, 장갑들이 구비돼 있었다.

상자를 열더니 그 안에서 납작한 칼을 꺼냈다. 제빵사들이 밀가루 반죽을 자를 때 쓰는 빵 칼 같았다.

곧장 납작한 칼로 벌집 뚜껑을 땄다. 양봉할 때 입는 방충복이나 장갑 따위 끼지 않았다. 노련한 이들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는 빵을 자르듯 벌집 뚜껑을 잘라냈다. 벌들이 프로폴리스로 접착해 놓은 뚜껑이 한순간에 열렸다.

나도 그녀 옆에서 벌들을 바라보았다. 벌들은 얌전했다. 간혹 몇 마리의 벌들이 앵앵거리며 그녀의 손에 사뿐히 앉았다.

반갑다고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벌집 안에 천연 재료로 만든 벌 밥을 올려놓았다.

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작업은 반복적으로 이뤄졌다. 숙달된 그녀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일이 다 끝난 뒤에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종이에 글을 썼다.

[만약 자신이 없으면 벌 밥은 주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 정도 양이면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까요]

난 그녀가 어떤 의도로 이야기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벌 밥은 충분했다.

벌 밥을 주고 챙기는 건, 양봉의 기본이었다. 벌에게 애정을 주지 못하는 농부는 자격 미달이었다.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당신이 이곳에서 약속한 시각까지 지낸다면, 저도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이곳에 있는 벌도 분양할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건 뭔가요?]

[벌이 밖으로 나온다고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화장실을 가거나 다른 볼일이 있어서 나오는 거니까요]

화장실과 다른 볼일이라니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그녀는 종이에 그에 따른 내용을 적었다.

벌들인 겨울잠을 잔다 해도 생리 작용을 했다. 밥을 먹고 용변을 보는 것이다. 밥은 집안에서 먹지만 볼 일은 바깥에서 본다고 했다.

청결을 지켜 집을 보호하는 것이다.

[작은 미물이라고 깨끗함을 모르는 건 아니죠. 집을 지키기 위해 몸을 희생하기도 하니까요]

[그럼 다른 볼일 때문에 나오는 벌은 뭔가요?]

[죽기 위해서입니다]

[죽어요?]

여름에 태어난 벌의 수명의 45일 정도다. 밀랍으로 집을 만들고 꿀을 따는 노동을 하다 고작 한 달 넘게 사는 것이다.

반면 늦가을에 태어난 벌은 6개월이란 수명을 지닌다. 꽃이 없는 기간에 벌집을 지키며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다.

그렇게 벌들은 생명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겨울에도 수명이 다한 벌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죽음을 맞이할 걸 아는 벌들은 스스로 밖으로 나온다고 했다.

[역시 벌집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인가요?]

매화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벌은 썩기 마련이다. 자신의 시체로 벌집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 멀리 날아가 죽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사람보다 낫네요]

내 글을 보고 그녀의 눈동자가 반응했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왠지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보였다.

매화 스님은 가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이에 글을 썼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벌이 밖으로 나와도 절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미 머릿속에 넣었습니다]

난 글을 보여주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가리켰다.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든지, 그녀의 심각했던 표정이 지워졌다.

[벌들이 당신을 선택하길 빌겠습니다]

매화 스님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떠났다.

이제 동굴 안에는 나와 벌들만이 남았다.

동굴에서의 2박 3일

꿀벌이 꿀을 얻는 과정에서 과수와 채소, 수많은 식물을 수정시킨다. 그걸 돈으로 환산하면 세계적으로는 약 370조에 이른다.

한국의 과수와 채소만 계산해도 6조원가량이다.

작은 일꾼들이 전 세계 식량 수확물의 70%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수치와 달리 양봉 농가의 경쟁력을 높이려는 지원책은 턱없이 부족하다.

소나 돼지 등 가축을 키우는 농가에 비해 우습게 보는 경향마저 있다. 그저 벌을 이용해 꿀을 채취하는 농부로 치부하기 때문이다.

실제 다른 축산업에 비해 비용이 덜 드는 건 사실이다. 여러 가지 이점이 많아 귀농을 꿈꾸는 도시인들이 쉽게 알아보는 농사일이기도 하다.

광고 기획자 시절, 나 역시 양봉에 관심을 가졌다. 천연 물질로 만든 제품을 팔 때 꿀과 갖가지 부산물에 매력을 느낀 까닭이었다.

시골집, 감나무밭에서 벌을 치는 상상을 했다.

그때는 상상으로만 끝난 일이었다.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어 그저 꿈만 꾸고 있었다. 행동으로 옮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달랐다.

하동을 기점으로 한국 최대의 양봉장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양봉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저녁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이제 뭘 좀 먹어야겠다.’

난 배낭에서 먹을 것들을 꺼냈다. 오는 길에 매화 스님과 나눠 먹었던 고구마와 감자가 주된 식량이었다. 주먹밥도 여섯 덩이 있었다.

버너와 코펠을 이용한 요리는 할 수 없었다. 벌들이 냄새에 민감하다고 주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매화 스님은 출발 전 침낭 하나면 충분할 거라고 전했다. 돌아가신 큰 스님은 이곳에 한 달간 머문 적도 있다고 말했다.

밥은 해 먹을 수 없어도 움막 같은 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굴에서 벌들과 함께 지내야 할지는 상상도 못 했다.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먹을 것들을 한쪽에 잘 정리했다.

밥을 먹기 전에 물을 떠 와야 했다. 매화 스님은 동굴에 들어오기 전에 샘터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난 플라스틱 물병을 들고 좁은 동굴 입구를 빠져나왔다.

‘춥다.’

동굴은 그저 외풍만 막아주는 정도라고만 여겼다. 바깥이 이렇게 추울지는 몰랐다. 동굴은 어떤 면에서 벌에게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처음과 다르게 아찔함이 느껴졌다. 동굴 앞 절벽에 작은 돌길이 나 있었다. 절벽 위 바위로 오는 길이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길이 아니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누가 됐든 대단한 담력의 소유자였다.

난 밑을 보지 않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산길을 오르자 매화 스님이 알려준 샘이 보였다. 샘은 꽁꽁 얼어 있었다.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야 했다. 추위가 뼛속까지 느껴졌다.

난 물통에 물을 가득 담고 다시 동굴로 향했다.

-휭휭.

칼바람이 불었다.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이 휘청거렸다. 절벽으로 이어지는 돌길을 걷는 일이 위험천만해졌다.

자칫 잘못하면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물통을 품에 넣고 재빨리 움직였다.

무사히 동굴에 도착했다. 바깥과 달리 고요하고 아늑했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긴장이 풀리자 허기가 밀려왔다.

‘밥이나 먹자.’

밥을 먹으려는 순간, 벌통에서 벌이 한 마리 빠져나오는 게 보였다.

‘화장실인가?’

난 감자를 손에 들고 벌을 가만히 지켜봤다. 벌통 밖을 빠져나온 녀석은 동굴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감자를 한입 베어 먹고 녀석을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화장실이 아닌 것 같았다.

‘혼자 죽으러 가는 건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했다. 난 감자를 한입에 먹어버리고 동굴 입구로 향했다.

그때였다. 벌이 다시 입구로 들어오고 있었다.

화장실을 멀리도 다녀온 모양이다.

가만히 보니 생김이 남달랐다.

매화 스님이 벌 밥을 줄 때는 벌의 생김을 자세히 볼 여유가 없었다.

‘이제 얼굴 좀 봐 볼까?’

난 장비를 갖춰 입었다. 벽에 걸린 방충복을 입고, 그물이 달린 모자와 고무장갑까지 착용했다.

초보 주제에 매화 스님처럼 전문가 행세를 할 마음은 없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이상해졌다는 소문도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동면 중인 벌이라고 해도 낯선 사람의 냄새를 싫어할 수 있었다.

우주복 차림으로 뚜껑을 들어 올렸다.

힘을 주었지만 쉽게 열리지 않았다. 벌들이 그사이 틈을 메꾼 것이다. 대단한 일꾼들이다.

매화 스님이 사용했던 납작한 칼로 뚜껑을 열었다.

‘예상대로였어.’

난 벌들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지장사에 들어오기 전 토종벌을 키우는 농가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사전 조사 차원이었다. 그곳에서 토종벌이라고 불리는 벌을 보았다.

백과사전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정식 명칭은 동양벌이었다.

한국을 포함한 중국과 일본에 서식한다는 벌이었다.

조선 시대 문헌인 [자연백서]에 한반도에서만 서식하는 벌의 특징을 자세히 서술했다.

중국과 일본에 있는 종과 다름을 표현했다.

‘동양벌이 아니야.’

지금 내가 보는 녀석들은 한반도에만 자생하는 벌이었다. 지장사에 오기 전 토종벌 농원에서 봤던 동양벌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동양벌과 마찬가지로 크기가 작은 것은 동일했다. 다만 날개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날개에서 발광하듯 빛이 났다.

은은한 황금빛이었다.

여러 전문가가 멸종했다고 말하는 순수한 토종벌이었다.

‘완전한 토종벌을 찾았다.’

이것이 내가 지장사를 찾은 진짜 이유였다.

지장사 벌은 순수한 토종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리산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 키우던 벌이었다. 꿀의 효능도 남달랐다.

개연성이 높았다.

벌들은 제법 온순했다. 소리를 내며 위협하지 않았다.

감로꿀을 만드는 순수한 토종벌들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니 더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다시 뚜껑을 닫았다.

온몸을 감싸고 있던 장비를 벗는 순간이었다.

-꼬르륵. 꼬르륵.

뱃속이 요동쳤다. 역시 감자 하나로 주린 배를 채울 수 없었다.

먹을 것을 살피다 초코바가 눈에 들어왔다.

떠날 때 가희가 준 초코바였다.

생전 먹지도 않던 초코바가 먹고 싶었다. 껍질을 까는 순간에도 입에서 침이 돌았다.

한 입 크게 물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대체 언제 산 걸까?’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물에 젖은 슬픈 얼굴이었다. 희극 속에 등장하는 과장된 캐릭터 같았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식량을 정리해 놓은 곳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랜턴은 비상시에만 사용해야 했다.

손에 잡은 건 밀랍 양초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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