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가 다시 돌아왔다. 일이 잘 안 됐다는 표정이었다.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지요.”
“그러시죠.”
“매화 스님의 제안을 거절하십시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매화 스님은 큰 스님의 유일한 제자였습니다. 큰 스님은 전 주지 스님이셨습니다. 아주 독특한 분이셨죠. 양봉을 처음 시작한 분이시기도 합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큰 스님은 죽기 전에 주지보다 양봉을 전수 받을 사람부터 구했다고 했다.
자질을 알아보는 방법으로 벌과 함께 먹고 자는 숙제를 내렸다.
몇 명의 희망자가 있었고, 매화 스님도 그중 하나였다. 매화 스님은 유일한 통과자였다.
문제는 테스트에 참여한 나머지 비구니들에게 발생했다. 매화 스님을 제외한 모든 참여자는 하나같이 절을 떠났다고 했다.
속세로 내려간 그들은 폐인이 되거나 미쳐버렸다고 말했다. 그 뒤로 한 두 번 같은 일이 반복돼서 금지시킨 일이라고 했다.
자살한 이도 있다는 말할 때 주지의 눈동자가 떨렸다.
“매화 스님과 함께 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그곳에 홀로 있던 사람들은 모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나요? 절을 떠나기 전에 무슨 이야기라도 했을 거 아닙니까?”
난 호기심에 물었다.
“벌이 문제라고 했습니다.”
“벌이 문제라고요?”
“보통과 다른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벌들이라고.”
“뭐가 이상하죠?”
“저도 그 이상은 모릅니다.”
역시 벌이 달랐다. 꿀의 맛이 다른 까닭도 벌이 다른 까닭 같았다. 어떤 벌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궁금했다.
생각도 못 한 시나리오였지만 흥미로웠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해보고 싶네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까지 제가 한 말을 제대로 들으신 게 맞습니까?”
“제대로 들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쩔 작정입니까?”
그녀는 완전히 흥분한 상태였다. 평소와 달리 이성적이지 못했다. 아마도 그때 미쳐 버린 사람 중에 그녀가 아끼는 이가 있던 것 같았다.
“스님,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보시죠.”
“말씀하시죠.”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스님들이 통신 수단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렇진 않았습니다.”
난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벌에 대해서 공부도 하지 않고 이곳을 찾은 건 아닙니다. 지금은 동절기입니다. 벌들이 동면에 들어간 시기입니다. 겨울잠을 자는 녀석들이 저에 무슨 해코지를 하겠습니까?”
“전 상식적인 문제를 말씀드리게 아닙니다.”
“그럼 어떤 문제를 말씀하시는 거죠? 그곳에 있는 게, 벌이 아니라 도깨비라도 된다는 뜻입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주지 스님은 말을 아꼈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이성을 찾은 것 같았다.
“말씀을 들어보니 제가 너무 흥분했던 것 같네요.”
“그럼 허락하시는 겁니다.”
“매일 연락을 하는 조건입니다.”
“염려 붙들어 놓으십시요.”
난 이틀 후에 떠나기로 했다. 주지 스님은 나를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해댔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 * *
떠나는 날 아침, 난 가희와 잠시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슬픈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사찰에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상태였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내가 말려도 갈 거지?”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나도 듣는 귀가 있다고. 누구처럼 귀를 막고 있는 게 아니라.”
그녀는 그 말을 하고 손을 내밀었다. 손에 초코바가 두 개 있었다.
“이거 먹어.”
“어디서 난 거야?”
“그냥 받아.”
난 초코바를 손에 쥐었다. 배낭 안에 2박 3일 동안 먹을 식량이 있었다.
초코바를 가방에 넣고 가희에게 말했다.
“잘하고 있어. 사고 치지 말고.”
“너나 잘하세요. 사고 치지 말고!”
그녀는 투정 부리듯 소리쳤다.
이제야 좀 정가희 같았다. 가희의 뒤에서 한 무리의 비구니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매화 스님과 지장사 최연소자인 면화 스님이었다.
“저기, 이거 가져가세요.”
면화 스님은 직접 짠 목도리를 나에게 주었다.
“고맙습니다. 잘 쓸게요.”
“몸조심하세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뒤통수가 따가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지장사에 있는 비구니들이 모두 나를 보러 나와 있었다.
가장 높은 곳에 주지 스님이 보였다. 그녀는 연신 손으로 전화를 거는 시늉을 했다.
다들 눈가에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난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손을 흔들었다. 숙연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까지 근처에 있던 가희가 보이지 않았다. 대열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처마 끝에서 쪼그리고 앉아 눈물범벅이 된 이가 보였다.
가희였다. 방금까지 심통을 부리더니 지금은 울음보를 터트렸다.
매화 스님은 앞장서 가고 있었다.
난 조용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깊은 산 절벽 끝
매화 스님의 체력은 대단했다. 지리산 다람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도 나만 한 배낭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더 놀라웠다. 헤지고 낡은 배낭은 배가 빵빵하게 불러 있었다.
산에서 2박 3일을 견뎌야 하는 내 배낭도 비상식량과 침낭 그리고 옷가지들로 가득했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녀의 가방에 뭐가 들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매화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토끼처럼 잘도 성큼성큼 나아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가는 길이 이렇게 멀고 험할 줄은 몰랐다.
“좀 쉬었다 갈까요?”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우린 한 시간 넘게 쉬지도 않고 길을 걸었다.
너무 힘들어서 쉬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걷고 있는 길을 정식 등산로가 아니었다. 정확히 길이라고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지형지물을 익혀둬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난 속도를 냈다. 토끼를 잡는 사냥꾼이 된 것 같았다.
“매화 스님.”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비구니 스님과 스킨십을 한다는 게 민망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런 거 저런 거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중에 길을 찾지 못해 난감한 것보다 나았다.
가냘픈 어깨에 손이 닿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난 두 손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는 포즈를 취하고 종이에 글부터 썼다.
[잠시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그녀는 글을 읽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자리를 잡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깊은 산엔 아직 눈이 쌓인 곳이 많았다.
마침 적당한 장소가 있어 손짓했다. 그녀와 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난 가방에서 고구마를 꺼냈다. 아침에 구운 군고구마였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드세요.”
그녀에게 고구마를 건넸다. 나도 고구마를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갑자기 먹어서인지 목이 멨다.
“무무.”
그녀가 나에게 보온병을 주며 말했다.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이제 막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의 말처럼 들렸다.
물을 마시니 한결 가벼웠다. 그러고 보니 이런 여유를 느껴 보는 게 참 오랜만이었다.
곶감 농사가 끝나자마자 지장사로 들어왔다.
이곳에서 생활은 곶감 농사보다 배는 힘들었다. 지옥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주지 스님이 기이한 이야기를 하며 뜯어말렸지만, 솔직히 2박 3일의 산행은 매력적이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전력 질주를 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그곳에 어떤 일이 벌어지던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세상 최악이란 최악은 다 경험한 나였다. 심지어 회귀라는 엄청난 일도 겪었다. 귀신을 만난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를 맑게 했다.
난 종이에 글을 적었다.
[어떻게 양봉을 시작하게 된 거죠?]
그녀에게 쪽지를 보였다. 고구마를 들고 글을 읽는 모습이 아이처럼 해맑아 보였다.
[벌들과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서요]
자연스러운 대화의 시작이었다. 오늘만큼은 그녀도 나에게 마음을 여는 듯 보였다.
매화 스님과의 필담은 그렇게 시작됐다.
[어떤 꿀이죠?]
가장 궁금한 내용 중 하나였다. 토종벌은 서양벌과 다르게 한 가지 꽃에서 꿀을 채밀하지 못한다.
환경에 민감해서 이동 양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아카시아 꿀이나 밤 꿀은 전부 서양벌이 딴 꿀이다.
토종벌은 여러 가지 꽃에서 채밀한 잡화 꿀을 생산해 낸다. 그래서 한 가지 꽃 향이 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꽃의 향이 동시에 난다.
하지만 그녀가 키우는 벌이 채밀한 꿀은 숲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꽃 향은 미비하게 느껴졌다. 단맛도 다른 꿀과 확연히 차이가 났다.
[감로꿀입니다]
[감로꿀은 쉽게 얻어지는 꿀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감로꿀에 대해서 알고 계시네요]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날 바라봤다.
광고 기획자 시절, 천연 물질을 공부했기에 알고 있었다.
감로(甘露)는 달 감에 이슬 로였다. 하늘에서 내린다고 하는 이슬.
보통은 환경이 척박한 곳에서 일벌이 진액을 먹고 소화 시켜 만들어 내는 꿀이었다. 고로쇠액을 30배 응축한 맛이 난다고도 한다.
일반적인 꿀에 비해 강력한 항산화 작용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럽이나 북미에서도 그 진가를 알고 고가로 판매되는 꿀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생산이 불가능한 단점이 있다. 벌은 기본적으로 꽃을 찾기 때문이다. 나무의 진액을 빨아들이는 것은 꽃이 없을 때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예상대로 그녀가 사육하는 벌들은 일반적인 벌과 다름이 분명했다.
그녀의 벌을 분양받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아는 내용을 말하자 그녀의 태도가 달라졌다. 무작정 양봉을 배우러 온 사람은 아니라고 느낀 모양이다.
감로꿀은 자연이 선물한 완벽한 선물이라고 말하자, 기분 좋은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내친김에 사적인 질문을 하나 던졌다.
[출가한 이유가 뭔가요?]
매화처럼 아름답던 얼굴이 일순간에 굳었다. 겨울을 모르고 피어난 꽃이 순간 얼어버린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녀는 펜을 들었다. 그녀는 한 단어로 출가의 이유를 설명했다.
[인연과보입니다]
모든 것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기에 업보 또한 자신이 받는다는 뜻이었다.
난 매화 스님의 사연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매화 스님의 양모였던 김꽃님 할머니를 찾아갔을 때 이야기를 들었다. 김꽃님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말하기를 꺼려했다.
그때는 매화 스님과 관련한 모든 게 궁금했다. 비밀을 지키겠다는 서약을 한 뒤에야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김꽃님 할머니는 무겁게 입을 뗐다. 매화 스님은 할머니의 먼 친척이었다. 가족이 모두 사망한 뒤에 그녀를 양녀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비극적인 사건으로 가족이 모두 사망했다고 전했다. 동반 자살이었다. 식구 중 누가 어떤 이유로 그리했는지, 할머니도 모른다고 했다.
매화만이 홀로 살아남았다. 듣지 못하는 아이라 살아났을 거라고 했다. 워낙 혼자 놀기를 좋아하던 아이라고 했다.
고양이처럼 숨는 능력도 탁월했다고 말하며 눈시울 붉혔다.
매화 스님은 말만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지닌 여자였다.
할머니는 매화는 그 사실을 모른다고 확신했다. 사건 당시 그녀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장애까지 있어 알 수 없었을 거란 의미였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사실이라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재차 당부했다.
비밀을 이용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치졸한 짓은 할 생각이 없었다. 다른 방법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으로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한적한 숲에서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되자, 가슴에 품어 두었던 궁금증이 살아난 것뿐이었다.
난 더 캐묻지 않았다. 물어봐야 대답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녀의 말대로 운명이 만들어 낸 자신만의 숙제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내가 풀어야 할 숙제와도 마주할 차례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