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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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난 가희에게도 그 사실을 공유했다.

비누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실습을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밀랍 양초 이야기를 꺼내자, 가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좋아. 그것도 내가 해볼게. 비누보다 쉬울 거 같기도 하고.”

“이번엔 싫다는 말 안 하네.”

“막상 해보니까 재미도 있고.”

“절 밥 먹더니 성숙해진 건가?”

“뭐라고!”

가희는 화장실 청소에서 벗어나고 여유가 생겼다. 밭일이며 청소, 밥하기 등은 여전했지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해내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비구니 스님들의 태도였다. 나와 가희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땐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가희보다 나를 보는 눈이 차가웠다.

주지 스님의 입김으로 들어왔다는 게 문제였다.

그것도 감히 남자가 말이다. 난 금남의 구역에서 홀로 꿋꿋하게 버텼다. 반전을 기다리면서.

밀랍 비누를 만들고 난 뒤 날 보는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굳게 걸어 잠근 마음의 벽이 무너지고 있음을 느꼈다.

평소엔 인사조차 하지 않던 사무국 비구니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했다.

“덕분에 밀랍 비누를 잘 쓰고 있습니다.”

난 그녀에게 프린트를 한 장 건넸다. 비누를 사용한 소감과 개선사항을 묻는 질문지였다.

사찰이 시장조사의 공간으로 변했다.

모든 비구니가 성심성의껏 질문에 응했다. 광고 기획자 시절이라면 수고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닌 조사였겠지만 이곳에선 달랐다.

아주 편안하게 반응을 점검하고 개선 사항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관련된 내용을 가희와도 공유했다.

“생각보다 무르다는 반응이 많네. 다음에 할 땐 더 단단하게 만들어야겠어.”

“할 수 있겠어?”

“당연하지.”

“넌 농부보다 비누 연구가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나 놀리는 거야? 지금!”

“느끼는 대로 말했을 뿐이야.”

괜한 성질을 부리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생활에 꽤 만족하고 있음을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양봉은 언제 배우는 거야?”

“조만간 배우게 될 거야.”

“나도 들었어. 매화 스님이 거절했다는 소리.”

가희에겐 자세한 사연을 말하지 않았었다. 절에 들어온 뒤로는 말할 틈도 없었다. 이제야 말할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비구니 스님들한테. 이곳에 있는 사람들 다 알고 있어.”

“그거 잘됐네.”

“잘됐다고?”

“정가희 씨는 연구에만 집중해 주세요.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가희는 내 마음을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초 만들 때 보자. 그동안 수고하고.”

그녀와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였다.

절 안의 모든 비구니가 다음 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비누보다 양초에 더 끌리는 눈치였다. 그럴 법도 했다.

양초는 명상할 때 쓰는 유용한 도구였다.

그 주는 바쁘게 돌아갔다. 산 아래서 받을 물건이 많았다. 민석에게 양초를 만들 심지와 형틀 밀랍 등을 주문한 상태였다.

절에서 사용할 곡식을 사다 나르고, 양초로 사용할 재료도 따로 날랐다

수업은 전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난 다시 비구니들의 앞에 섰다.

오늘은 묵언 수행 방에 들어갔던 비구니들까지 나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매화 스님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장 늦게 등장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안절부절못했다. 마음이 혼란스럽다는 걸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된 밥이었다.

“우선 지금 쓰고 계신 양초의 재료는 파라핀입니다. 석유의 찌꺼기죠. 심지가 타들어 가며 유해물질이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밀랍으로 만든 양초는 그럴 걱정이 없습니다. 머리를 맑게 하고 천식과 비염에도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묵언 수행을 하던 스님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하고 입을 막았다. 난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엄청난 치료제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인체에 무해하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말이 끝나고 가희가 앞으로 나왔다. 이번엔 노란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코웃음이 나왔지만 간신히 참았다.

가희의 실습이 끝났다. 다들 양초를 하나씩 손에 쥐고 있었다. 콘서트장에서 촛불을 쥔 팬들 같았다. 당장 초를 켜보고 싶은 마음마저 느껴졌다.

* * *

그렇게 한 주가 지나가던 무렵이었다. 사찰 안에 있는 대부분의 비구니 스님들이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유일하게 한 사람만이 아직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사찰 안에 묘한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매화 스님에게 모두가 한마디씩 했던 것이다.

그들은 보답할 방법으로 매화 스님 압박하고 있었다.

계획했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난 참을성 있게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고대하던 시간이 도래했다.

내 앞에 매화 스님이 등장했다. 지장사에 온 지 삼 주 만의 일이었다.

[밀랍 비누며 양초까지 모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리 준비한 쪽지를 내게 건넸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사소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가요?]

난 그녀에게 글을 적어 보여주었다.

[벌들이 허락해야 합니다]

벌에게 허락을 받다니 기막혔다.

그녀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다.

금단의 구역

[벌들에게 허락을 받는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난 마음을 차분히 하고 종이에 글을 썼다.

매화는 미리 준비한 종이를 꺼냈다. 뭘 물을지 알고 준비한 것 같았다.

[며칠 동안 벌집을 지키시면 됩니다]

[기간이 얼마인가요?]

[3일입니다]

벌들과 함께하는 3일이라니,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양봉을 배우는 데 그게 왜 필요하죠?]

[제가 키우는 벌들은 사람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처음 시작할 때 같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사람을 가리는 벌이 있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봤다.

문득 그녀의 양어머니인 김꽃님 할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말을 하지 못하지만, 곤충이나 동물과 소통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난 을의 입장이었다. 조건을 따져 묻기에 불리한 위치였다. 따지고 보면 여기까지 온 것도 큰 진전이었다.

[그럼 허락을 받아보죠]

[벌들에게 가기 전에 작은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물이요?]

[네, 지장사에 계신 모든 분이 두 분께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작은 성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내일 아침 식사 후에 뵙죠. 가희 씨와 함께요]

[그러죠]

* * *

다음 날 아침 가희와 만났다. 우리 둘이 먼저 나와 매화 스님을 기다렸다.

난 가희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드디어 양봉을 배울 수 있게 됐어.”

“정말? 축하해. 역시 사람들 말이 맞았어.”

“사람들 말?”

“매화 스님도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게 될 거라고 했거든.”

“그랬구나.”

“넌 사람 홀리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 같아.”

“아직 속단하긴 일러.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거든.”

“넘어야 할 산? 그게 뭔데?”

“벌들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

“그게 말이야? 방귀야?”

그때 마침 매화 스님이 등장했다. 그녀는 우리는 사찰 구석에 있는 창고로 안내했다. 한 번도 와보지 않았던 장소였다.

온갖 창고를 다 정리하고 청소했지만 이곳은 보지 못했다. 지장사의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매화 스님은 비밀의 문을 열었다. 우린 그녀를 쫓았다.

“이게 다 뭐래? 꿀단지 아니야?”

가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한 듯 단지들을 보았다. 선박에 투명한 유리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다수의 유리병 안에는 꿀이 담겨 있었다. 언뜻 봐도 수백 개가 넘었다. 엄청난 양이었다. 보관만 잘하면 꿀은 썩지 않는다.

아주 오래된 꿀이 있을 수도 있었다.

매화 스님이 사발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사발 안에 탁한 색의 꿀이 담겨 있었다.

김꽃님 할머니의 집에서 봤던 꿀과 같은 빛깔이었다.

[많이 먹으면 배가 아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숟가락을 주기 전에 글을 먼저 보여주었다. 맛을 보기 전에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나도 쪽지 글을 적었다.

[가장 오래된 건 얼마나 됐죠?]

[오십 년 된 꿀 항아리가 세 개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물건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다. 내 옆에 있던 가희는 숟가락을 들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지장사에 온 이후에 처음으로 먹어보는 꿀이었다. 난 가희에서 먼저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숟가락을 날렸다.

“와, 꿀맛이다!”

가희는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맛있다는 말을 연발하며 사발에 담긴 꿀을 퍼먹었다.

난 이미 김꽃님 할머니의 집에서 먹어본 경험이 있었다.

숟가락으로 한 입 먹어보았다. 할머니의 꿀처럼 이곳의 것도 숲의 향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보통 꿀과 확실히 달랐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 기분 좋은 단맛이었다.

가희가 먹고 있는 사이 난 매화 스님과 필담을 나눴다.

[맛있네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백일 출가가 끝나시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두 분께 다요]

[그런데 벌과 합숙은 언제하나요?]

[주지 스님에게 허락만 받으신다면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지장사의 모든 일은 허락을 받아야 가능했다.

사찰의 절대 권력자인 주지 스님이었다.

창고에서 나오는 길에 가희가 배를 잡고 미간을 구겼다.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난 모양이다.

그녀는 화장실로 쏜살같이 뛰어갔고, 난 주지 스님에게 향했다.

* * *

주지 스님은 밀랍 양초를 켜놓고 명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마치 내가 들어올 걸 알고 있던 사람처럼.

“이 시간에 무슨 일이 십니까?”

난 매화 스님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잘됐네요. 원하는 대로 하시면 되겠네요.”

“그게 아직 끝난 게 아니라.”

주지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벌통을 지키는 조건입니다. 그곳에서 2박 3일을 지내야 한다는군요.”

그 말을 하자 주지 스님의 안색이 변했다. 흥분한 얼굴이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았던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하기로 했나요?”

“별수 있나요? 배우는 입장이니. 시키는 대로 해야죠.”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매화 스님에게 볼 일이 좀 있어서요.”

“그러시죠.”

이상한 노릇이었다. 처음엔 약간 흥분한 듯 보였지만, 지금은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녀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갔다.

어떤 답을 가지고 돌아올지 궁금했다.

* * *

연화는 무서운 얼굴로 대웅전을 향했다. 보통이면 아주 부드러운 얼굴로 매화 스님을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수화도 건너뛰고 매화 스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들은 묵언 수행 방으로 향했다.

주지 연화는 거친 손짓으로 수화를 했다.

[김덕명 씨에게 이야기 듣고 왔습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매화 스님은 평소답지 않은 주지를 보며 동요하지 않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손짓했다.

[그런 일은 하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 말씀이죠?]

[오늘따라 짜증이 올라오려고 하네요. 벌통 옆에서 잠을 자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 매화도 그렇게 양봉을 시작했습니다]

주지 연화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큰 스님은 매화를 각별하게 챙겼다.

큰 스님의 벌을 물려받을 유일한 비구니였기 때문이다.

연화는 무서워서 벌 옆에도 가지 못했지만, 매화는 그곳에서 일주일을 버텼다. 큰 스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그녀가 양봉을 물려받았다.

간혹 배우고 싶다는 비구니가 있었다.

매화는 큰 스님이 했던 대로 숙제를 냈고, 그때마다 일이 터졌다.

그곳에 홀로 지낸 이들에게 사고가 터진 것이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주지인 연화도 몰랐다. 정확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꿀은 좋지만 벌은 싫었다.

김덕명은 절에 소속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런 일을 시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김덕명 씨가 양봉을 배우더라도 가볍게 배우길 원했습니다. 그는 우리 절의 비구니도 아닙니다. 그에게 그 일을 시킨 건 옳지 않습니다]

[지장사의 양봉은 가볍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솔직히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지장사에 있는 모든 스님이 저에게 한마디씩 했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감사한 일을 한 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특혜를 주고 싶진 않습니다]

주지 연화는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매화를 바라보았다. 다른 비구니라면 한 번에 고집을 꺾을 수 있었다.

매화는 달랐다. 나이도 어리고 지위도 낮았지만, 벌에 대해서는 그녀의 말이 우선이었다.

큰 스님의 유언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만이 유일하게 벌을 키우고 꿀을 생산해 낼 수 있었다.

[모두 큰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입니다. 만약 그가 시험에 통과한다면, 모든 기술을 전수하고 벌도 분양할 생각입니다. 그럴 자질이 있나 확인하고 싶습니다]

매화의 말에 주지는 침묵했다.

연화는 더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는 매화였지만 고집이 대단했다. 주지인 자신도 꺾기 힘들 정도였다.

연화는 매화가 저렇게 된 게 큰 스님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조용히 대웅전을 빠져 나갔다.

김덕명이 그 일을 해낼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그를 말리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여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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