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석에게 부탁한 물건은 밀랍을 포함해 비누를 만들 재료들이었다.
수요일 저녁은 절에서 허용하는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다. 수행에 정진하는 비구니를 제외하곤 모두가 여가를 즐길 수 있었다.
일주일에 단 하루뿐인 자유 시간이었다. 뭘 하든 자유였다.
난 그 시간을 이용해 비누 만들기 프로그램을 운영해 볼 생각이었다.
사업 아이템을 미리 테스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주지 스님에게도 허락을 받았다.
“수제 비누라. 재미있겠네요.”
연화 스님은 큰 관심을 보였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비구니들이 사용하는 비누는 모두 공장에서 찍어 낸 싸구려들이었다.
주지 스님도 여자였다. 천연 재료로 만든 비누라는 말에 눈이 반짝였다.
“저도 만들어 보고 싶네요.”
연화 스님은 나 대신 사찰의 모든 비구니들에게 공지까지 해주었다. 아직 가희에겐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난 주지 스님에게 허락받고 가희를 만났다. 수행을 하는 공간이다 보니 같은 공간에 있어도 만남이 수월치 않았다.
수제 비누를 만들 거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퀭한 눈으로 날 노려보았다.
“뭐라고? 자유 시간에 쉬지도 못하고 교육까지 한다고?”
가희는 노발대발했다. 처음 이곳을 찾을 때 비누 사업을 맡아 달라고 말했다. 그때 들떠있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안식이 필요한 머슴처럼 보였다.
“이 일만 잘되면 화장실 청소에서 벗어날 수도 있어.”
“정말?”
가희는 격하게 반응했다. 얼굴만 봐도 승낙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당장 재료들을 체크하고 교육 자료를 만들었다.
화장실 청소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영혼까지 팔 것 같았다.
주지 스님에겐 특별히 부탁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쉴 구멍이 필요했다.
* * *
수요일 저녁, 주지 스님을 포함해 사찰 안에 있는 대부분의 스님이 모였다. 관심이 대단했다.
스님들은 화장품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그들이 쓰는 유일한 미용 제품이었다. 다들 꿀의 좋은 효능을 알고 있었다.
밀랍 비누는 호기심을 자극한 물건이었다.
특히, 벌을 키우는 매화 스님이라면 안 오곤 못 배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희와 난 역할을 나눴다. 이론은 내가 맡고, 그녀가 실습을 맡았다.
천연 비누를 팔아본 경험이 있어 이론적으론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럼 지금부터 밀랍 비누를 만드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난 비구니 스님들에게 시작을 알렸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석에서 문이 열렸다.
드디어 오늘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매화 스님이었다.
절에 있는 일주일 동안 한 번도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동안 영리한 다람쥐처럼 나를 잘도 피해 다녔다.
그녀를 쫓을 생각은 없었다.
제 발로 찾아오게 할 작정이었다.
매화와 사막여우
“비누는 인류를 구원한 특별한 발명품입니다.”
비구니 스님들은 내 말을 경청했다.
비누는 위생과 관련한 용품이다. 비누가 없던 시절엔 잿물이나 창포, 동물의 비계 따위를 이용해 몸을 닦았다.
비누 대용품들은 세정력이 좋지 않았다. 전염병이 돌면 집단으로 감염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서 식물의 기름을 이용한 비누가 등장했다. 그제야 인류는 집단 감염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감염병은 위생을 꼼꼼히 챙기는 것만으로 예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비누는 생활을 위한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비누의 소비 패턴은 다양해질 것이다. 단순히 세정력 좋은 비누만을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기능성 비누들이 등장한다. 그중 천연 비누는 고가의 비누 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시중에 판매하는 대다수의 비누에는 계면활성제와 방부제가 첨가돼 있습니다.”
내 말에 법당이 술렁거렸다.
“놀랄 거 없습니다.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 정도만 첨가하니까요.”
기준을 지켰다고 말했지만, 다들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자신이 사용하는 비누의 성분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이는 많지 않다.
성분보다 브랜드와 가격을 따지는 게 소비자의 심리다.
광고 기획자 시절, 난 천연 비누를 팔아 본 적이 있다. 깐깐한 광고주는 미팅 때마다 시험을 보듯 비누에 대해서 묻곤 했다.
기본적인 지식도 없는 마케터와는 일할 수 없다는 게 광고주의 입장이었다.
난 직접 비누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천연 비누의 재료부터 기능까지 두루두루 학습했다.
밀랍 비누도 그때 알았다.
“천연 비누는 자연에서 난 물질로만 비누를 만듭니다. 방부제 등의 화학 재료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특히, 프로폴리스가 성분이 녹아 있는 밀랍으로 만든 비누는 피부를 재생하는 힘이 있습니다. 항균과 항염 작용을 하기 때문이죠.”
밀랍은 일벌의 배 아래에 위치한 분비선을 통해 배출되는 천연 물질이다. 꽃에서 채취한 당분을 내장 기관의 독특한 반응을 통해 밀랍으로 바꿔버리는 것이다.
성분이나 구조는 플라스틱에 가깝지만 식물성 기름이다. 기본적으로 벌들의 집을 만드는 데 쓰인다.
일벌들은 벌집의 틈을 메울 때는 프로폴리스를 사용한다. 일종의 접착제다. 밀랍과 마찬가지로 내장 기관의 효소 반응을 통해 만들어 낸다.
벌들이 만들어 낸 밀랍과 프로폴리스는 신기하게도 천연 항생제 작용을 한다. 그래서 밀랍을 넣은 비누는 피부를 보호하는 능력이 있다.
광고 기획자 시절에 팔았던 천연 비누 중에서 밀랍 비누가 가장 인기가 좋았다. 특히 피부 트러블이 심하거나 아토피를 가진 사람들은 밀랍 비누를 애용했다.
장사가 잘되자, 광고주는 한술 더 떠서 꿀을 넣은 비누를 만들기도 했다.
나 역시 제품을 사용하고 효과를 느꼈다. 밀랍 비누를 사용하고 고질적으로 앓았던 피부 각질이 사라졌다.
연고나 화장품으론 듣지 않던 각질이 비누 하나를 바꾸고 치료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비누를 만들 차례였다. 이론 수업이 끝나자 뒤에 있던 가희가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구소에서 나온 과학자로 볼 거 같았다.
“이제부터 비누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제가 먼저 시범을 보인 뒤에 각자 만들어 보도록 할게요.”
가희를 중심에 놓고 비구니 스님들이 동그랗게 모였다. 모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비누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법당이 아니라 고등학교 화학 시간 같았다.
비구니 스님들이 비누를 만들 때, 난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주지 스님의 요구 사항이었다.
난 지장사의 유일한 남자였다. 수행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수녀원에 낯선 남자가 사는 격이었다. 한편으론 이해가 됐다.
실습한다고 몸을 움직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스킨십을 할 수 있었다.
주지 스님은 사소한 친절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난 주지 스님의 말에 따랐다.
가희는 열정적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화장실 청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은 마법의 약이었다.
그녀는 비누를 만들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소설도 지금과 같은 각오로 썼다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와. 진짜 비누가 뚝딱 나왔네요. 비누에서 은근 꽃냄새도 나고요.”
지장사에서 나이가 가장 어린 면화 스님이었다.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스무 살에 출가했다고 들었다.
환하게 웃은 모습이 스님이라기보다 풋풋한 대학생처럼 보였다.
매화 스님도 밀랍 비누에 푹 빠져 있었다. 주지 스님을 포함해 수화를 할 줄 아는 스님들이 몇몇 있었다. 돌아가면서 가희가 말하는 내용을 매화 스님에게 전달했다.
난 관찰자처럼 그들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누구도 나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주지 스님의 공지 사항에도 포함된 내용인 듯했다.
관찰자의 위치가 이렇게 편안한지 처음 알았다. 난 아주 편안한 자세로 사람을 하나하나 살폈다.
지금이 지장사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오늘에서야 절에 있는 스님들의 면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노역에 치여 이런 호사는 누려볼 수 없었다. 가희와 상의하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니 말 다했다.
‘산에 묻혀 지내기엔 아까운 인물들이다.’
난 비구니들을 보며 생각했다. 삭발한 것을 제외하면 수녀원의 수녀들과 비슷했다. 속세를 떠난 여자들이다.
저마다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을 것이다.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모두 미모가 출중했다.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매화 스님이었다.
가희가 매화 스님에게 다가가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가희의 얼굴도 아름다워 보였다. 매화꽃을 바라보는 사막여우 같았다. 하얀 가운을 입고 있어서인지 더 닮아 보였다.
정적인 매화 스님과 달리 가희는 활달하고 귀여운 동물이 어울렸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형틀에 넣었던 액체 상태의 비누가 고체로 변해 있었다.
밀랍 비누 만들기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반응은 뜨거웠다.
다들 손에 직접 만든 비누를 들고 싱글벙글했다.
수업이 끝나고 주지 스님이 나를 불렀다.
그녀는 테이블에 갓 만든 밀랍 비누를 올려놓았다.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주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얼마를 드리면 되죠?”
연화 스님이 나에게 물었다. 비누를 만드는 데 소비한 재료를 말하고 있었다. 코코넛 오일이 들어간 비누 베이스와 글리세린 그리고 밀랍이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전 공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도 공짜로 드릴 마음은 없습니다.”
“원하는 게 따로 있으시군요.”
“제가 원하는 걸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보기와 달리 여우같은 구석이 있으시네요.”
솔직히 비누는 공짜가 아니었다. 사찰 안에 있는 모든 비구니를 대상으로 반응을 조사할 계획이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매화 스님을 포섭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우린 차를 한잔하며 담소를 나눴다.
자리에 끝나갈 무렵에 난 주지 스님에게 제안을 하나 더 했다.
“다음번엔 양초를 만들까 합니다.”
“양초요?”
“밀랍양초입니다. 일반 양초와 달리 그을음이 나지 않습니다.”
“밀랍이 참 요긴하게 쓰이네요.”
밀랍 양초도 계획한 상품 중 하나였다. 시대가 아무리 첨단을 달려도 양초는 언제나 소비된다.
불교뿐만 아니라 천주교와 기독교 등의 규모가 큰 종교 집단에선 거의 필수품이다.
교황이 불을 밝히는 양초는 언제나 밀랍으로 만든 양초였다.
지장사의 비구니 스님들도 수행할 때 양초를 켰다.
밀랍 양초는 석유 찌꺼기로 만든 파라핀 양초와 비교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