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과 동시에 사무국을 찾았다. 사무국 여자는 날 알아봤다.
“백일 출가하는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연화 스님을 뵐 수 있을까요?”
연화 스님은 주지 스님의 법명이었다. 전에 왔을 때 알아둔 이름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밖으로 나가며 뜻 모를 미소를 보였다. 가희는 모든 게 신기한 듯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이곳엔 정말 여자 스님밖에 없어. 네 말대로 피부가 다 좋아.”
“미처 말하지 못한 게 있는데. 각오는 해야 할 거야.”
“각오?”
대답을 하려 했을 때 문이 열렸다. 지장사의 주지인 연화 스님이었다.
“정말 오셨군요.”
마치 안 올지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데 저분은?”
연화 스님은 내 옆에 있는 가희를 보며 물었다.
“함께 백일 출가를 할 사람입니다. 받아주실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이곳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마침 일손도 부족한 참이었는데, 아주 잘됐네요.”
주지 스님이 허락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녀의 마지막 말이 함정이란 걸, 그때 미처 몰랐다.
가희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당장 꿀부터 한 숟가락 먹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소풍 온 아이 같았다.
그녀는 백일 출가한다는 문서에 서명할 때까지도 들뜬 표정이었다.
출가를 템플스테이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다.
나 역시 우리에게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새벽 4시에 기상이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부터 사찰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린 청소를 하고 밥을 지어야 했다. 삼십 인분의 밥을 하고, 미로처럼 생긴 사찰을 청소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물론 밥을 하는 스님은 따로 있었다. 우린 그녀의 일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창고에 있는 쌀자루를 옮기고, 무, 배추, 감자, 당근을 씻고 다듬어야 했다. 산에서 흐르는 물을 끌어다 쓰고 있었다.
채소를 손질하다 손이 얼 정도였다.
백일 출가한 우리는 사찰의 막내였다.
막내는 거의 머슴과 같은 존재였다.
새벽에 일어나 밥하는 일을 돕고, 청소까지 한 뒤에야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그 뒤로도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지장사에선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밭에서 나는 채소를 기르는 일도 막내의 몫이었다. 겨울이었지만 비닐하우스엔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겨울이라고 해도 최대한 길러 먹어야 했다. 모든 식자재를 이고 지고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 감자를 심고 수확해야 했다. 저장 고구마 중에서 썩은 것들을 골라내야 했다.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화장실 청소였다. 새벽에 마당을 쓸고 방들을 닦는 일과는 차원이 달랐다.
깊은 산중에 있는 화장실이었다. 당연히 고전적인 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
인분을 거름으로 만들어야 했다.
냄새를 떠나 여러 가지로 힘들었다.
가희는 그 일을 한 번 하고 절을 떠나려고 했다. 그날 폭설이 내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떠났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을 매일 반복해야 했다. 우리가 오기 전까지 누가 어떻게 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내가 왔을 때 주지 스님이 깜짝 놀랐던 게 떠올랐다. 사무국 여자의 뜻 모를 미소도 이유가 있었다.
육체적으로 힘들 걸 각오했다. 강도가 군대보다 더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디 가?”
가희가 나에게 물었다.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웃음기 있던 얼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바보처럼 좀 멍해 보이기까지 했다.
“마을에 내려가려고.”
“너 혼자만 도망가려는 거지? 나도 데려가.”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우린 일만 하냐고 거의 만나지도 못했다.
난 절에 있는 유일한 남자였기에 숙소도 독립된 공간을 사용했다.
그녀와 며칠 동안 얼굴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만나자마자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마을에 물건 사러 가는 거야.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야 해.”
“다시 올라온다고?”
내가 배낭을 메고 있어 착각한 듯 보였다.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싶으면 말해.”
그녀는 침을 꿀떡 삼켰다. 포기하고 싶다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양봉은 언제 배우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곧 하게 될 테니까.”
“그게 언젠데. 차라리 벌들과 함께 있는 게 낫겠어. 나 너무 힘들어.”
그녀에겐 아직 허락을 받지 못 했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일이 바빴다.
“가희 씨.”
사무국을 관리하는 비구니 스님이 가희를 불렀다.
“조금만 참아. 내일모레 자유 시간이 있다고 하니까.”
“자유 시간.”
그녀는 허탈한 눈빛으로 말했다. 가희를 부르는 비구니 스님의 목소리가 커졌다.
“가봐. 찾는 거 같은데.”
그녀는 슬픈 얼굴로 사라졌다.
배낭을 메고 목적지를 향했다. 산 밑에 있는 마트였다. 쌀을 사다 날라야 했다.
다른 절은 작은 케이블카를 이용해 물건을 날았다. 짐을 나르기 위해 만든 특수 케이블카다.
국립공원에 위치한 지장사에선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손수 날라야 했다. 지장사에 가장 힘이 좋은 비구니 스님이 했던 일이라고 했다.
그 일은 이제 내일이 됐다. 40킬로그램 쌀자루를 이고 지고 날랐다. 비구니 스님들은 생각보다 활동량이 많았다. 그만큼 밥도 많이 먹었다.
난 쌀을 사고, 민석을 만나 부탁한 물건도 받았다. 떠나기 전에 말해 두었던 물건이었다.
민석은 나를 보더니 놀란 얼굴로 말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됐어.”
“일이 좀 바빠서.”
“고생이다. 가희는 어때?”
“죽어가고 있어.”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산을 올라야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