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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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하산을 하며 매화 스님을 떠올렸다. 스무 살에 출가해 이곳에서 8년을 지낸 여자였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올해 스물여덟이었다. 나와 동갑인 것이다. 외모만 보면 스무 살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지장사의 모든 비구니는 동안임이 틀림없었다.

‘젊음의 비결은 꿀단지 속에 있다.’

거절 당했지만 발걸음이 가벼웠다. 주지라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생긴 게 가장 컸다. 어쨌든 반은 성공한 것이다.

나머지는 그녀의 말대로 내 몫이었다.

곧장 집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저 왔어요.”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밥은?”

“아직이요.”

“아버지도 너 오면 먹겠다고 기다리고 계셨어.”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곶감 농사가 끝난 뒤 우리 집은 아주 평화로웠다.

씻고 나오자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부모님은 양상추 농사를 다시 시작한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 역시 공지할 내용이 있었다.

“저도 할 말이 있어요.”

“뭔데?”

“저 출가하려고요.”

“뭐라고?”

어머니의 입에서 밥알이 튀어나왔다. 부모님도 나처럼 종교가 없었다. 황당할 만 했다.

내 표정이 진지한 걸 알고 아버지가 물었다.

“출가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양봉을 배울 계획이에요.”

“그런데 출가는 왜?”

난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비교적 잘 이해하셨다. 양봉도 축산업에 들어갔다.

특히, 마을의 과일나무를 밀원으로 사용하겠다는 말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과일나무 수정을 위해 일부러 양봉하는 농부를 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깊은 산까지 들어가는 게 걸리는구나.”

“토종벌은 국내에서도 드물어서요. 기술뿐만 아니라 벌도 분양을 받아야 해서요.”

“토종벌은 키우기가 까다롭다고 들었다.”

“그래서 더 가려는 거예요.”

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셨다. 곧 수긍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위험하게 하필이면 양봉이냐? 쏘이면 어쩌려고?”

어머니의 반응은 아버지와 달랐다.

“위험한 건, 말벌이죠. 꿀벌이 사라지면 지구도 멸망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만큼 좋은 곤충이에요. 위험하지 않아요.”

“네가 하겠다면 난 응원해 주마.”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나랑 있을 땐, 덕명이도 같이 양상추 농사지어야 한다고 말해 놓고선.”

어머니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말했다.

“젊은 놈이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잘만 배우면 우리 마을에도 좋은 일이야.”

“이젠 덕명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겠어요?”

“그럼 믿지. 우리 아들인데.”

“두 부자끼리 잘들 해보세요.”

어머니는 내가 함께 농사를 짓지 않는 게 서운한 눈치였다. 난 어머니 마음을 달래고 자리에 누웠다.

* * *

다음날, 민석과 가희를 만났다. 그들에게도 상황을 공유해야 했다.

“잘 지냈어? 다들 얼굴이 좋아 보이네.”

“힘든 일을 하지 않으니까. 잠도 잘 자고.”

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그들의 근황은 대강 알고 있었다.

민석은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했다.

그는 최근 ‘하동부인회관’ 할머니들에게 컴퓨터 가르치고 있었다. 망한 PC방의 컴퓨터를 구입했다고 했다.

곶감 농사를 지을 때보다 웃음이 많아졌다.

우울증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아이러니했다.

인생의 의미를 새로 찾은 사람 같았다.

가희는 아버지의 과수원 일을 돕고 있었다. 그 외는 딱히 하는 일은 없어 보였다.

자신이 원하는 농사를 짓고 싶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앞으로 양봉을 할 계획이야.”

“벌을 키우는 양봉?”

“맞아. 그 양봉. 미리 말하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어. 벌을 키우는 일은 자유의사에 맞길 게. 이후에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할 때면 일이 많을 거야. 그때 합류해도 좋아.”

“무조건 벌을 키우겠다는 소리네.”

가희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우선 벌을 다루는 법부터 배울 생각이야. 어떤 식으로 할지는 이미 계획해 놓았고. 우선 내가 먼저 배우고 올 생각이야. 기술을 배우고 와서 너희들에게 알려주는 방식으로 진행할까 해.”

“왜 그렇게 하는 건데?”

가희가 물었다.

말투에 불만이 잔뜩 묻어 있었다.

“장소가 지리산 깊은 곳에 있는 절이야.”

“지리산? 그러면 곤란하지.”

민석이 손사래를 쳤다. 그는 군대 이후로 산에 오른 적이 없었다.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겠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었다.

가희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곤충을 무서워했다. 길에 지나가는 개미 한 마리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산과 벌이란 말만 나와도 질색할 거라고 여겼다.

“나도 배우고 싶어.”

그녀가 진지하게 말했다. 나와 민석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와 달리 표정이 굳어 있었다.

“가는 길이 험해. 게다가 네가 싫어하는 곤충이고. 괜찮겠어?”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봐.”

“간다니까. 몇 번을 말해!”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뾰로통한 얼굴의 그녀를 보며 산뜻한 영감 하나가 떠올랐다.

매화 스님을 마음을 사로잡을 아이디어였다.

그녀가 필요했다.

“그럼 나도 좋아. 당장 짐 싸서 나와. 부모님께 잘 말씀드리고.”

“조금만 기다려. 곧 올 테니까.”

난 그녀가 오기 전에 민석에게 몇 가지 사항을 전달했다.

비상시 연락을 취할 번호와 내가 없는 사이 준비할 것들이었다.

이야기를 끝내자 가희가 등장했다.

“너 손에 든 거 뭐야?”

“가방.”

그녀는 캐리어를 들고 나타났다. 분명 산을 오른다고 말했다.

캐리어라니, 그녀는 뭐가 잘못됐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지리산으로 가는 길에 배낭부터 사야 했다.

우린 지장사로 향했다.

설산에서 살아남기

눈발이 날리는 궂은 날씨였다.

난 배낭을 메고 산길을 올랐다.

가희가 끙끙 소리를 내며 뒤쫓고 있었다.

“좀 쉬었다 갈까?”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오는 길에도 우린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마냥 갈 수는 없었다. 마침 사람이 없는 구간이었다.

“잠깐 말 좀 해.”

가희는 말도 없이 앞질러 나갔다. 난 팔목을 잡았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째려봤다.

“이거 놓고 이야기해.”

난 잡았던 팔목을 놓았다. 새하얀 함박눈이 그녀의 붉은 뺨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유가 뭐야?”

“무슨 이유?”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로 울렸다.

“화가 난 이유를 말해보라고.”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우린 지금까지 무난하게 잘 지냈다.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까닭이 궁금했다.

그녀는 무서운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솔직한 게 좋잖아. 게다가 여긴 우리밖에 없다고.”

“나 벌레 싫어해.”

“벌레가 아니고 벌이야. 곤충이지.”

“곤충이든 뭐든 싫다고.”

개미 새끼 한 마리에도 화들짝 놀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난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곶감 일을 할 땐 기분이 좋았어. 성취감도 느꼈고. 살면서 그런 감정을 느껴본 건 처음이었어.”

“그런데?”

“기대하고 있었던 거 같아.”

“뭘 기대했지?”

“더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벌을 키우겠다고 한 거네. 네가 싫어하는 일을 골라서 말이야.”

내가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회피했다.

“난 반대로 생각했는데.”

그녀가 젖은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너에게 중요한 미션을 줄 작정이었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까지 울 것 같던 얼굴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변했다.

“미션을 준다고?”

“정가희의 특기를 발휘할 일이 있거든.”

“내 특기?”

그녀는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희야. 벌은 꿀만 생산하는 게 아니야. 프로폴리스부터 밀랍까지 다양한 천연 물질을 만들 수 있어.”

“그런데?”

“너에게 비누 사업을 맡길 생각이었어.”

“비누?”

“맞아. 밀랍으로 만든 천연 비누.”

밀랍 비누는 서양에서도 진귀한 물건이었다. 항염증 성분 때문에 중세에는 민간약으로도 사용됐다.

자연 치유력이 있어 피부트러블을 줄이고 천연 항생제 역할을 한다. 아토피 등의 피부염뿐만 아니라 화상 치료제로도 쓰인다.

“네가 비누 사업을 맡아 줬으면 해.”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황유신 선생님에게 곶감을 배울 때, 아로마 공방에 다닌 적 있다고 했잖아. 그곳에서 비누 만드는 법도 배웠고. 아로마 오일 대신 밀랍을 넣는다고 생각해.”

“난 전문가가 아니라서.”

“누구나 시작은 있는 법이야.”

가희가 수제 비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습작소설 중에 비누와 관련한 것도 있었다.

‘비누 인간’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단편이었다.

소설 속에 비누 제조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밀랍 비누는 생소하겠지만, 그녀가 흥미를 느낄 것이라고 여겼다.

가희뿐만 아니라 절에 있는 비구들도 전부 관심을 가질 물건이었다.

그녀와 동행한 이유였다.

“진작 말하지 그랬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여전의 정가희로 돌아와 있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양봉과 관련한 정보를 묻기 시작했다.

단순한 면이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 몰랐다.

“아직 멀었어? 얼마나 더 가야 해?”

그녀의 토라진 마음은 달랬지만, 뒤이어 투정이 이어졌다.

“꼭 이런 곳에서 배워야 해? 그 사람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그전의 삶이었다면, 곧 짜증을 냈을 것이다. 삶의 경험은 사람을 유연하게 만든다.

난 화제를 바꿨다.

“아무에게나 벌을 받고 싶지 않아.”

“벌을 받아야 한다고?”

소를 키우기 위해 소를 사는 것처럼, 벌을 키우기 위해서도 벌을 분양받아야 했다. 대부분 선배 양봉업자에게 분양받는다.

스승의 벌을 물려받는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항생제를 먹인 벌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런 벌들은 면역력이 약해 강한 세력을 생산하지 못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강하고 건강한 벌이 좋은 꿀과 밀랍 등을 만든다.

양봉에 실패하지 않으려면 좋은 벌이 있어야 한다.

어떤 면에선 기술보다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녀에게 기초적인 지식을 전달하자 고개를 끄떡이며 수긍했다.

스승이 되는 사람이 동갑내기 비구니라는 사실을 말하자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젊은 사람이라고?”

매화 스님이 청각장애인이라고 말하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마음을 잡고 산을 올랐지만, 여전히 힘겨워하고 있었다.

기운이 날 만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절에 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모두 동안이야.”

“동안?”

“모두 그 꿀 덕분이라는 소문이 있어. 이곳을 선택한 이유기도 하고.”

“정말 꿀을 먹고 젊어졌다고?”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직접 확인해봐. 다들 피부가 좋았으니까.”

그녀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이제 군소리도 하지 않았다.

젊고 예뻐진다는 말이 그녀를 자극한 것 같다.

멀리 사찰의 지붕이 보였다.

우린 ‘지장사(地藏寺)’에 도착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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