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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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할머니의 편지를 품에 넣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지장사’였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에 마을 스캔하듯 한 바퀴 돌았다. 벌을 사육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감나무뿐만 아니라 과일나무가 넘쳤다.

마을 사람들은 농약을 치지 않고 친환경으로 과수를 재배했다. 벌을 키우기에 적합한 조건이었다.

농가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과일나무를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건, 꽃가루 수정 작업이었다.

수정이 되지 않으면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수정이 제대로 안 된 곳은 사람이 직접 붓을 들고 꽃가루를 발라줘야 했다.

‘천혜의 조건을 이용해 대규모 양봉농장을 만든다.’

그러기 위해 매화 스님의 벌이 필요했다. 벌을 분양받고 노하우까지 흡수할 생각이었다.

* * *

지장사는 지리산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찰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절이기도 했다.

그곳에 가는 방법도 만만치 않았다. 차로도 오를 수 없는 곳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곳곳에 눈이 쌓여 있었다. 준비한 아이젠에 스틱까지 완전 무장한 상태로 산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 높은 곳에서 절을 지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멀리 사찰의 지붕이 보였다. 무려 세 시간 넘게 등반을 해서 닿았다.

‘지장사(地藏寺)’

드디어 지장사에 도착했다. 승복을 입은 비구니들이 날 경계하듯 쳐다봤다.

나 역시 그녀들에게 눈을 뗄 수 없었다.

절의 분위기가 남달라서였다.

‘모두 미인이다.’

머리를 삭발했어도 미인은 미모는 여전했다. 다른 사찰과 달리 여자 수행자들만 있는 곳이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모두 여자 비구니가 있었다.

여자들의 세상에 잘못 들어온 이방인이 된 듯했다.

대웅전 앞에 멈춰 서자, 한 스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이곳을 찾으셨는지요?”

연세가 지긋해 보였다. 물을 때 잔주름이 보였기에 나이가 있다고 여겼다.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피부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화제가 됐던 것처럼 비구니들의 얼굴은 모두 동안이었다.

“매화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용건을 알 수 있을까요?”

“어머니의 편지를 전해주러 왔습니다.”

그는 별말 없이 날 안내해 주었다. 편지는 이럴 때도 도움이 됐다. 사찰은 구조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어떤 곳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찌개를 끓이는 것 같았다.

배가 고팠는지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인기척을 느낀 한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예전에 광고 일을 하며 연예인들을 마주칠 일이 있었다.

그때 연예인들은 얼굴값을 한다고 생각했다. 외모만으로도 인정이 되는 수준이었다.

눈앞에 있는 그녀는 그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바라보는 순간 잠시 배경이 사라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녀 말고는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이분이 매화 스님입니다.”

안내해 준 스님이 나에게 말했다.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난 매화 스님을 보고 물었다.

그 말에 안내했던 스님이 날 힐끗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외모에 취한 탓인지 그녀가 말을 못 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누구시죠?]

그녀는 종이에 글을 써서 내게 보여주었다.

목에 걸고 다니는 수첩이 의사소통 수단 같았다.

[어머니의 편지를 전하러 왔습니다.]

글을 써서 보였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이죠?]

[우선 편지를 읽어보시죠.]

문자로 의사소통하는 게 익숙하진 않았다.

가장 불편한 건, 내 옆에 있는 스님이었다. 안내해준 건 고맙지만, 장승처럼 서 있는 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매화 스님은 편지를 다 읽고 표정이 달라졌다.

차갑게 변한 매화꽃 같았다.

[저는 스님이지 누굴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단칼에 거절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최악의 경우였다.

그때 내 옆에 서 있던 비구니 스님이 매화 스님에게 수화를 했다.

수화가 끝나자 편지는 날 안내해준 스님의 손에 넘어갔다.

편지를 보여 줄 수 있냐는 뜻 같았다.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주지 스님. 여기 계셨군요? 지금 손님이 찾아오셨는데.”

문이 열리고 한 스님이 들어오며 말했다. 날 안내해 주었던 여자가 이곳의 주지 스님이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해. 내가 볼일이 좀 있으니까.”

주지 스님은 편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부엌으로 들어왔던 비구니는 나를 한 번 째려보고 밖으로 나갔다.

주지 스님은 편지를 다 보고,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덕명 씨, 사심이 있으셨군요.”

“네? 사심이라니요.”

“단순히 어머니의 편지를 전해 주러 온 게 아니니까요.”

어떤 말을 해도 궁색하게 느껴질 순간이었다.

“배우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다른 마음은 없습니다.”

“다른 마음은 없다?”

난 그녀의 물음에 긍정으로 화답했다. 주지는 내 눈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곧 마음의 결정을 내렸는지 매화 스님의 수첩에 글을 적었다.

주지 스님이 수화를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굳이 글을 쓰는 건, 나를 보여주기 위함 같았다.

[매화 스님,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없나요?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는군요.]

매화 스님은 주지의 글을 보고 당황한 듯 보였다. 내가 부탁할 때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주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난 그녀의 전전긍긍하는 얼굴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고민하는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가 펜을 들었다.

[누구를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주지는 글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오늘은 안 되겠네요. 저와 함께 나가시죠.”

주지 스님까지 도왔지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난 주지 스님을 따라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나오는 길에 매화 스님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주지 스님이 나에게 물었다. 우린 차방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오셨다고 말했던 비구니가 차를 내왔다.

“한 가지만 묻죠.”

주지 스님이 나에게 말했다. 마주하니 온화하면서도 대쪽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무슨 이유로 그 많은 할머니에게 일자리를 준 건가요?”

김꽃님 할머니의 편지에 그 내용이 있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서 쓴 글이었다.

다른 할머니들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자세히도 쓰셨다. 무안하게도 일당 액수까지 언급했다.

“전 곶감 농사를 짓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일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일당도 후하게 주셨다고요?”

“정당한 돈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 과장해서 쓰신 겁니다.”

“내가 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는지 알고 계신가요?”

솔직히 나도 궁금했다. 주지면 이 사찰의 대장이나 다름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이상한 노릇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처음엔 이상하다고 여겼습니다. 이곳까지 양봉을 배우러 온 거며 편지의 내용까지도. 그런데 보면 볼수록 당신에게서 기이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이십 대의 청년에게 중년의 완숙미가 느껴진달까. 그 점이 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느낌만으로 내가 남다른 사람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오랜 수행의 결과 때문인지 일반인과 달랐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궁금하기도 하네요. 당신이 원하는 걸 가져갈 수 있을지 말입니다.”

“방법이 있나요?”

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몸이 많이 힘들 겁니다. 매화 스님에게 설득하는 일도 알아서 해야 하고요.”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예상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혹시, 백일 출가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백일 출가요?”

백일보다 출가라는 말이 거슬렸다.

난 평생을 무교로 살았다.

“종교를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그녀가 나에게 백일 출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백일 출가를 한다 해도 불자가 되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서 백일을 산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라고 했다.

다만, 사는 동안 밥값을 해야 했다. 지장사는 해발 1,500고지에 위치한 절이었다. 이곳으로 오는 모든 물자는 사람 손으로 옮겨야 했다.

먹어주고 재워주는 대가로 일을 하라는 뜻이었다.

“당신이 매화 스님에게 양봉을 배운다고 해도 이곳에 함부로 머물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고민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허락이 먼저였기에 미뤄둔 일이었다.

그녀는 가려운 등을 대신 긁어주고 있었다.

“그런 조건이라면 저도 좋습니다.”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혹시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그녀는 크게 웃었다.

“초면에 실례되는 질문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저도 스님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겨서요.”

“제가 당했군요. 말씀드리지요. 올해 진갑(進甲)이 됩니다.”

환갑이 지난 뒤 돌아오는 생일이 진갑이었다.

‘육십 하나라니...’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오십 대일 거라고 여겼다. 그것도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 외모에 육십이 넘었다는 게 놀라웠다.

“혹시, 스님도 매화 스님의 꿀을 드시나요?”

“네. 부끄럽게도 매일 먹고 있습니다.”

주지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 배우고 싶어졌다. 매화 스님의 꿀은 분명 회춘의 명약이었다.

보통 꿀과 다름이 틀림없었다.

“그럼 곧 뵙겠습니다.”

난 곧장 사무국에 들러 백일 출가를 접수했다.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남자는 이곳에 머물 수 없다고 말하는 눈치였다.

절이지만 수녀원과 다름없었다.

“아직 계획이 없습니다.”

사무국 직원이 나에게 말했다. 주지 스님에게 허락을 받았다고 하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전화를 걸어 확인하곤 접수를 받았다.

나를 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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