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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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들과 이야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부모님께 말씀을 드릴 차례였다.

아버지는 내가 얼마를 벌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법인 통장에 돈을 넣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아버지 사업자로 하기로 모두와 협의했었다. 물론 곶감에 한해서였다.

“아버지. 어머니.”

난 마당에서 두 분을 불렀다. 불이 켜지고 부모님이 밖으로 나왔다.

“무슨 일이야? 너 술 마셨지?”

어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술 한잔했어요.”

난 부모님을 부둥켜안았다. 갑자기 감상적이 됐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감상에 빠져 보고 싶었다.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 있어?”

어머니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아니요.”

“그럼 무슨 일이야?”

“이제 빚을 갚을 수 있게 돼서요.”

난 조용히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다.

빚 때문에 힘들었던 과거가 떠올랐다.

빚이 빚을 만들어 올가미처럼 가족의 목을 조였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깊은 절망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땐 이런 순간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어머니가 말없이 날 안아 주었다. 아버지도 손을 보탰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의 눈가도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난 그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가장으로서 홀로 감당해야 했을 삶의 무게다.

오늘은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난 듯한 얼굴이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가슴이 외치고 있었다.

행운은 계획에서 비롯된다

마을이 설날 분위기로 훈훈했다.

난 차례를 지내고,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감나무들을 보며 지난 시간을 잠시 돌이켜 보았다.

회귀 후 부모님께 곶감을 만들겠다고 말했던 때가 떠올랐다. 가족이 살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과거의 악연이었던 황유신과 사제 간의 연을 맺고, 그의 비법을 전수받아 대봉감으로 곶감을 만들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곶감은 인기리에 팔렸다.

한 번 잘 됐다고, 다음에 똑같이 잘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동네 사람들도 곶감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내가 돈을 버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경쟁자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경쟁력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난 한 철 장사에 연연할 마음은 없었다.

‘곶감 다음을 준비한다.’

슬슬 다음 스텝을 밟아야 할 타이밍이었다. 어차피 곶감은 겨울에 집약적으로 하는 농사였다.

곶감 농사를 유지한다고 해도 남은 계절에 할 일이 필요했다. 곶감을 만들면서도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곶감은 가족 사업이었다면, 지금부터 시작할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농사였다.

지금 만나는 사람도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었다.

난 오래된 초가집 앞에서 차를 세웠다. 예전에 몇 번 와봐서 낯설지 않았다. 감 깎는 작업을 할 때 자주 왔던 집이었다.

난 트렁크에서 선물 상자를 꺼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할머니, 저 왔어요.”

“덕명이 왔구나.”

김꽃님 할머니가 날 반겼다. 나에게 행운을 가져온 사람이었다. 최고령 신춘문예 당선자. 처음엔 작은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할머니 덕에 곶감 마케팅이 순조롭게 풀렸다.

오늘은 곶감 마케팅보다 더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뭐 이런 걸 가져왔어.”

할머니는 내가 가져온 곶감을 보며 말했다.

“새해 인사 받으세요.”

“인사는 무슨.”

난 할머니에게 세배를 올렸다. 할머니는 세배를 받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왜 그러세요?”

“손님이 왔는데. 내가 이러고 있다니까.”

“괜찮아요. 집에서 많이 먹고 왔어요.”

“아니야. 그러면 쓰나. 잠시만 기다려.”

할머니가 부엌으로 간 사이 난 벽에 걸린 사진을 하나하나 보았다. 빼곡한 사진 속에 인생이 들어 있었다.

결혼부터 오랜 세월 함께 한 반려자의 죽음까지. 자식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중간에 아이 사진이 하나 있었다.

주름진 얼굴의 할머니가 소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어린아이치고 이목구비가 선명했다.

“혼자 살다 보니 내 입맛에 맞는 거밖에 없어. 입에 맞을까 모르겠어.”

난 할머니가 가져온 음식을 들여다보았다.

“약과 맞죠? 집에 직접 만든 수제 약과.”

“잘 아네. 어른들도 잘 모르는 데 한 번에 맞춘 사람은 처음이야.”

일반적인 약과와 달랐다. 작은 꽃송이 모양에 강정처럼 윤기가 흘렀다. 묘하게도 과자에서 독특한 향이 느껴졌다. 숲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향이었다.

“어서 먹어봐.”

난 약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엄청 달 거라고 여겼지만, 그리 달지만은 않았다. 고소함과 달콤함이 조화롭게 느껴졌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약과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 났다. 감탄의 표정이 저절로 나왔다.

“맛있어요.”

“전통 방식으로 만든 거야. 설날에만 해 먹는 음식이지.”

할머니는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이 약과는 미래의 스타를 배출하는 매개체가 될 것이다.

“할머니 이 약과 뭐로 만든 거예요?”

“꿀로 만들었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밀가루 반죽을 할 때부터 꿀을 넣고 버무린 음식이었다.

우리 밀에 꿀을 한가득 넣고, 반죽을 참기름에 튀겨 조청에 절여서 만드는 전통 방식이다.

수입 밀가루에 설탕을 넣고 팜유에 튀긴 약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꿀을 넣고 만들었다니 믿기지 않아요.”

“단맛이 귀한 시절엔 아무나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지.”

할머니는 기분이 좋았는지 웃으며 약과를 하나 먹었다.

“그 꿀맛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좋지.”

할머니는 거실에 나가 작은 유리병을 가져왔다. 유리병 안에 꿀이 반 정도 채워져 있었다.

보통 꿀이 투명한 황금색이라면 유리병 안의 꿀은 갈색으로 탁했다.

“신기한 꿀이야. 꿀에서 숲 향기가 난다니까.”

난 수저로 꿀을 한 입 떠먹었다. 보통 꿀과 달리 꽃 향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숲의 기운이 느껴졌다. 은은하면서도 뒷맛이 강렬했다.

말로만 들었던 물건이었다. 직접 맛보니 진가를 알 수 있었다.

“할머니, 이 꿀은 어디서 난 거죠?”

내 질문에 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굳었다.

“그 꿀은 파는 물건이 아니라서.”

“살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뭘 하려고?

“이 꿀을 만든 분을 뵙고 싶어서요.”

“만나서 뭘 하려고요?”

“꿀 따는 법을 배워보려고요.”

할머니는 방송에서 약과의 비밀은 꿀이라고 말했다.

사람들도 어떤 꿀을 사용하는지 궁금해했다. 할머니가 사용한 꿀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딴 꿀이었다.

특별한 사람이 만드는 진귀한 꿀이었다.

난 대화 중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고 싶었다.

생각과 달리 할머니는 부담스러운 얼굴이었다.

“그게 우리 딸이 딴 꿀이긴 한데.”

“할머니에게 따님이 계셨군요.”

난 방 안에 있던 액자에 고개를 돌렸다. 어린 소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야. 뒤늦게 얻는 수양딸이지.”

“그러셨군요. 그럼 따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죠?”

“절에 있어.”

“절이라면 스님이신가요?”

“맞아. 비구니가 된 지 벌써 8년도 넘었지. 그래서 쉽지는 않을 거야. 워낙 바쁘기도 하고, 남들과 좀 다르거든.”

“뭐가 다르죠?”

“말을 하지 못해. 듣지도 못하고.”

“청각장애가 있군요.”

“듣지는 못해도 작은 동물이나 곤충과 잘 지냈지.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벌을 키우는지도 몰라.”

할머니는 회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혹시 추천서 한 장 써 주실 수 있나요?”

“추천서?”

내가 할머니를 찾은 목적이기도 했다.

할머니의 수양딸인 매화 스님은 곶감의 명인 황유신과 달랐다.

수행자에 장애까지 가진 인물, 공략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양봉은 왜 배우려는 거야?”

할머니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곧 봄이 오잖아요. 다른 일도 해야죠. 곶감을 다시 하려면 근 일 년을 기다려야 하잖아요. 여러 가지 고민하다 할머니 약과 이야기를 들었어요. 꿀로 만든 약과가 있다고. 그 꿀맛이 그렇게 좋다는 말까지도요.”

“노인네들이 별 이야기를 다 했네. 그럼 다 알고 온 거네.”

“말로만 들었지 꿀맛은 못 봤죠.”

난 웃으며 답했다. 하동회관 할머니들의 입을 통해 어느 정도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김꽃님 할머니의 수양딸 매화 스님에 대해서.

물론 할머니들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매화 스님의 꿀이 방송을 타고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물론 그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단순히 맛만 좋아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건 아니었다. 그녀의 꿀이 회춘의 비결이라고 알려지면서부터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기거하는 사찰은 비구니들만 사는 곳이었다. 그곳에 사는 비구니들의 외모가 화제의 대상이었다.

스님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하나같이 피부가 좋고 동안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매화 스님의 꿀이 동안의 비결이라고 믿었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녀의 외모도 소문이 퍼지는데 한몫했다.

매화 스님은 눈을 뗄 수 없는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가 모든 취재와 인터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화제에 올라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당사자는 침묵했다. 속세와 인연을 끊은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녀의 꿀을 맛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매화 스님의 꿀은 전설로 남았다.

난 곶감 다음으로 양봉을 할 계획을 세웠다. 황유신에게 곶감을 배울 때도 밀랍을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때도 느꼈지만, 양봉은 단순히 꿀만 따는 일이 아니었다.

프로폴리스, 밀랍, 로열젤리, 화분 등 온갖 천연 물질을 채취할 수 있었다. 난 그 천연 물질을 이용해 고부가 제품을 만들 작정이었다.

광고 대행사에 일할 때도 천연 물질을 이용한 뷰티 용품을 팔았던 경험이 있었다. 화학 첨가제가 없이 만든 제품들이었다.

난 그것들이 불티나게 팔리는 걸 두 눈으로 목격했다. 이제 조만간 열릴 시장이었다. 내가 선점할 시장이기도 했다.

한국에선 아직 프로폴리스와 밀랍을 이용한 천연 비누, 샴푸, 치약, 화장품을 생산하지 않았다.

매화 스님의 꿀은 회춘의 명약으로 입소문이 났다. 그 벌들이 만들어 낸 천연의 물질도 명약과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다.

꿀뿐만 아니라 천연 물질을 이용한 제품도 만들 계획이었다.

양봉은 다른 축산업과 다르게 기술뿐만 아니라 키울 벌도 분양받아야 했다.

내가 그녀를 스승으로 선택한 까닭이다.

국내에선 대부분 서양벌로 꿀을 채밀했다. 그녀는 토종벌을 키웠다. 토종벌은 키우기 까다롭고 분양받기도 어려웠다.

그녀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유일한 무기는 양모의 추천서였다.

“추천서만 써 주시면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내 딸이긴 하지만, 장담할 순 없어. 거절한다고 해도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염려 마세요.”

할머니는 종이와 펜을 들고 와서 글을 썼다. 글을 쓴 뒤 나에게 보여주기까지 하셨다.

추천서라기보다 엄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이런 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

“이 정도면 충분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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