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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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나가고 이주일 사이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홈쇼핑에서 물건을 팔고 싶다는 제안도 들어왔다.

티브이 홈쇼핑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던 시기였다.

돈이 될 거라고 판단했지 나에게도 연락이 온 것이다.

“죄송한데 다음 기회에 하겠습니다.”

난 홈쇼핑 판매 제안을 거절했다. 물건을 팔아주는 대가로 수수료를 30%나 떼어 갔다.

아무리 고액의 쇼호스트를 고용하고 좋은 장비로 촬영을 해준다지만 날강도나 다름없었다.

만약 물건이 적당히 팔렸다면 도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너무 잘 팔리고 있었다. 홈쇼핑에 대줄 물건도 없을 지경이었다.

“배선아 기자예요. 그때 후속 보도는 저와 한다는 말 기억하시죠?”

그녀가 다시 찾아올지는 생각도 못 했다.

외출 준비를 하던 중 배기자가 찾아왔다.

“삼십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언제나 바쁘시네요.”

그녀는 방송에서 미처 말하지 못했던 부분을 캐물었다. 특히, 황유신 선생에게 곶감 기술을 배우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난 황유신 선생님과 협의된 내용을 정리해서 말했다.

“그렇게 기술을 공개하면 곶감 가격이 떨어지지 않나요?”

그녀는 인터뷰가 끝나고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을 물었다.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 언젠가는 가격이 떨어지겠죠.”

“그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시네요. 방송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네. 돈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처럼 당장 가격이 당장 떨어질 일은 없었다. 농사는 프랜차이즈 치킨 집을 하는 것과 결이 다르다.

돈만 낸다고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법을 배우려면 단단히 각오해야 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가격은 점차 하락할 것이다. 결국, 좋은 제품만이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녀는 마지막 질문이라며 말했다.

“곶감 말리던 창고도 찍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난 그녀를 감을 말리던 창고로 데려갔다. 그때와 달리 사진기자는 대동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접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게 전부인가요?”

그녀가 놀란 만도 했다. 근 삼 주 전, 그곳에서 25만개의 감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그땐 사방이 주황빛으로 가득했다.

지금은 정반대였다.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구석에 몇 개의 박스가 있을 뿐이었다.

“혹시 그 많은 게 다 팔린 건가요?”

“네 덕분에 많이 팔았습니다.”

텅 빈 창고에 셔터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완판의 기쁨도 느낄 틈이 없었다. 그 정도로 정신이 없고 바빴다.

설을 삼 일 앞두고 남은 물건이 전부 나갔다.

* * *

계좌에 큰돈이 쌓여 있었다.

무려 25만개의 곶감이 완판됐다. 돈으로 따지면 7억 5천 정도였다. 감 대금과 수수료, 기타 잡비를 떼고도 5억 5천의 순이익이 생겼다.

난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며 눈을 의심했다.

처음 바랐던 액수보다 두 배는 더 많았다.

반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부자 농부가 된다는 다짐을 하고 열심히 뛴 결과기도 했다.

머릿속으로 돈을 어떻게 쓸지 이미 구상해 두었다.

먼저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창립 멤버들이었다.

간만에 여유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린 오랜만에 근처 치킨집에서 뭉쳤다.

나와 민석, 가희가 맥주잔을 들었다.

“오늘은 결산하는 날이야.”

난 그들을 보고 용건부터 꺼냈다. 그들은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힘든 노동에서 탈출했다는 마음이 더 강해 보였다.

“이제야 곶감 농사도 끝났구나.”

가희는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고 말했다.

“그 말 틀렸어.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지.”

민석이 가희의 말을 받았다.

“뭐가 틀렸는데?”

“이제야 지옥문이 닫힌 거야.”

그들은 웃으며 장난처럼 말했다. 그때 지나간 회귀 전 과거가 잠시 떠올랐다. 민석의 말대로 그때는 지옥 같았다.

지금은 달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상관없었다. 이제야 살맛이 났다.

물론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남았다. 당연히 그들에게도 알아야 할 일이었다.

난 미리 뽑아온 문서를 그들에게 주었다.

“곶감 농사를 전부 마치고 결산한 내용이야.”

“우와. 우리가 돈을 이렇게 많이 벌었다고.”

둘 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본론을 꺼낼 시간이었다.

“그중 일부는 우리를 위해서 쓸 거야.”

정확히 1억이었다. 사업 예비비로 오천을 적립하고 나머지 오천은 셋이서 나눌 생각이었다. 문서에도 그리 적어 놨다.

“우선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

“난 반대.”

민석이었다. 제법 진지했다.

“말해.”

“오천을 똑같이 나누는 것에 반대해.”

“그럼 어떻게 하길 원해?”

“가희와 내가 이천 씩은 받아야겠어.”

민석과 가희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장난 같았다.

“좋아. 문제없어. 그것도 작다고 생각했으니까.”

“장난이야. 너무 진지하니까 무섭다.”

민석이 나를 보며 말했다. 가희도 그의 말에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난 돈 앞에서 장난치고 싶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남은 4억 5천이었다.

“남은 돈은 부모님에게 드릴 생각이야.”

그 돈이면 빚을 전부 갚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소를 판 돈이 있어 가능한 액수였다.

“나에게 처음부터 했던 말이잖아. 나도 동의했고.”

민석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가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도 예전에 동의했어. 그리고 이번 일은 네가 전부 주도했잖아. 너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가희도 제법 진중하게 말을 꺼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다니 고마워.”

가슴속에서 뭔가 꿈틀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동이었다. 오래전부터 돈은 그저 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돈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최소한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은 돈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일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야?”

가희가 나와 민석을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 말하는 거지?”

“이제 곶감은 끝났잖아. 이제 우린 뭐하냐고요? 악덕업주님아.”

곶감은 집약적인 농사였다. 단기간에 승부를 봐야 했다. 대봉감이 널린 주변 환경과 과거의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목표를 재설정해야 하는 때였다. 이제 단기간 치고 빠지는 농사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농사를 짓고 싶었다.

“지금부터 휴가 기간이야.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

“그럼 전부 휴가야?”

가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민석도 날 보고 있었다.

“난 다음 농사를 준비해야지. 겨울 곶감 농사가 끝났으니까.”

“뭘 하려고?”

“계획이 있어. 구체적으로 일정이 잡히면 말해줄게. 그동안 재충전하고 있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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