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 껍질 깎는 일은 끝났지만, 아직 곶감이 되기엔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 숙성 과정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있었다.
난 부모님을 포함해 민석과 가희를 모두 불렀다.
“곶감이 완성되기 전까지 매일 발효액을 뿌려줘야 합니다.”
발효액이 든 분무기로 주렁주렁 매달린 감에 발효액을 뿌렸다. 어렵지 않게 따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모두가 곶감을 만드는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판매가 시작되면 정신이 돌아갈 테니까요.”
발효액을 다 뿌리고 창고의 문을 개방했다. 겨울 볕과 찬바람이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매일 문을 개방해서 햇볕과 바람을 맞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 맛있게 숙성이 되니까요.”
감을 관리하는 일은 나중에 부모님이 책임지고 맡아줬으면 한다고 말씀드렸다. 민석은 사이트를 가희는 배송에 따른 모든 일을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 그 모든 일에 관여해야 했다. 지금은 돌아가며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아니야. 이건 엄마랑 아버지에게 맡겨라. 너희들은 다른 일로 바쁠 테니까.”
“그래도 지금은 그렇게 바쁠 때가 아니라서.”
“곧 바빠지겠지. 각자 맡은 일도 있고. 이 일은 우리에게 맡겨라.”
어머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덕명아 엄마랑 아버지랑 농사 경력만 30년 야. 이런 건 우리에게 맡겨.”
“그럼 두 분에게 곶감 덕장 관리를 맡길게요.”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었다.
민석과 가희는 안 그래도 할 일이 있었다. 그전까지 내가 했던 작업이지만, 그 둘도 손에 익혀야 하는 일이었다.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일이었다. 인터넷이나 기계에 약한 부모님보다 그들이 나았다.
민석보다 가희의 적성에 맞았다. 소설가를 꿈꾸던 사람답게 글도 감성적이었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어.”
끝났다는 말에 민석이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난 그에게 물었다.
“민석아. 뭐 할 말 있어?”
“할머니들이 성화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일만 부려먹고 한 번도 놀러 오지 않는다고.”
“너에게 전화가 왔어?”
“나에게도 왔는걸.”
가희도 웃으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그들도 할머니들과 친근하게 지냈다. 모두 아들딸과 손주가 있는 분들이었지만 우리를 더 아끼는 것 같았다.
“좋아. 내일 가자.”
난 그들이 먼저 그런 말을 꺼낸 게 좋았다. 이제야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전엔 모두 내 지시에만 따랐다.
다음날 우린 선물을 안고 하동부인회관을 찾았다. 가희와 민석도 즐거운 마음으로 동행했다.
“어이구, 우리 손주들 왔네.”
할머니들이 버선발로 우린 반겼다. 한 할머니가 우린 보자마자 신문을 들고 외쳤다.
“이거 봐. 신문에 손주들과 우리가 나왔다니까.”
곶감을 깎는 할머니들이 신문 일 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김꽃님 할머니에 대한 기사보다 곶감 할머니들에 관한 기사가 더 크게 나왔다.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면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아직 신문에 대한 파워가 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의 입에도 꽤 오르는 모양이었다.
할머니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같은 질문을 했다.
“주변 사람들이 곶감을 사고 싶다고 난리야. 우리도 살 수 있을까?”
“할머니들은 살 수 없죠.”
살 수 없다는 말에 할머니들의 얼굴이 말도 못하게 어두워졌다.
“이곳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선물로 보내드릴 거예요. 설날 선물로요.”
방금 전 실망했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역시 우리 손주들이야. 나중에 또 우리가 필요하면 말만 하라고.”
할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고 능력을 존중해준 걸 고마워하고 계셨다.
정작 고마운 사람은 나였다.
이후로도 할머니들을 볼일은 많았다.
난 곶감 이후의 상품을 미리 고민하고 있었다. 앞으로 함께 할 사람도 미리 점찍어 둔 상태였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우선 곶감부터 정리해야 했다.
깜짝하는 사이에 시간이 훌쩍 지났다.
“벌써 가게?”
임순예 할머니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이 느껴졌다.
아쉽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난 좀 더 있다 갈게.”
민석이 말했다. 그는 할머니들과 만난 후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마도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각나서 그런 것 같았다.
난 가희와 둘이서 차에 탔다.
“너도 더 있지 그래?”
“난 김덕명 씨와 볼일이 좀 있어서.”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나저나 그때 생각난다.”
“언제?”
“상주 가던 날. 그땐 네가 날 태워 줬는데.”
그날 그녀는 나와 함께 상주까지 갔다. 그리고 그녀도 황유신 선생님에게 함께 곶감 기술을 배웠다.
아련한 추억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나에게 무슨 볼일?”
“기억 안 나? 타로 점.”
“그런 곶감 농사 끝나고 하기로 했잖아.
“지금 봐줘. 궁금해 미치겠으니까.”
난 가볍게 승낙했다. 고생한 그녀를 위한 서비스라고 여겼다.
“그럼 잠깐 일 좀 하고 봐줘도 되지?”
“기다리는 건 싫지만 허락할게.”
집에 도착해서 컴퓨터부터 확인했다. 신문에 기사가 나간 뒤로 사이트에 문의가 빗발치고 있었다.
지금은 ‘지리산 농부들’ 사이트에 곶감을 판매 예정이란 이미지를 박아봤을 뿐이었다.
신문에 실린 이미지도 함께 있었다.
사람들은 귀신같이 알고 게시판에 글을 남기고 있었다.
난 문의한 사람들에게 답변을 달아주고 그녀에게 갈 생각이었다.
답변을 달고 있는 도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의외의 인물이었다.
배선아 기자였다.
“김덕명 씨, 통화 가능하세요?”
“가능합니다.”
“혹시 방송에 출연할 의향 있으세요?”
“어떤 내용이냐에 따라 다르겠죠.”
난 무턱대고 환호하진 않았다. 아직 그녀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
“역시 깐깐하시군요. <식품 검증단>이란 프로그램이에요. 그 프로그램 피디가 저와 선후배 관계죠.”
“그렇군요.”
<식품 검증단>은 논란의 프로그램이었다. 검증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본 곳도 있었다. 방송 조작과 구설수가 쫓아다니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기가 좋았다. 내가 고민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마음에 안 드시나요?”
“생각 중입니다. 그런데 무슨 검증이죠?”
“유황훈증을 한 곶감과 하지 않은 곶감을 검증하려고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당장 결정하기가 어려운가 보죠?”
“아닙니다. 귀한 기회를 놓칠 수 없죠. 방송에 출연하겠습니다.”
“방송에 따른 후속 보도는 저와 함께 하는 거고요.”
“당연히 그래야죠.”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녀는 자신의 이득을 챙기겠다는 말이었다. 여우같은 여자다.
문을 열고 나오자 가희가 입을 내밀고 날 째려봤다. 기다리다 지친 얼굴이었다.
“미안. 이제 끝났어.”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안녕하세요. <식품 검증단>의 최한별 작가입니다.”
“네.”
곧장 작가에게 섭외 전화가 왔다. 난 가희에게 금방 끝날 거라고 손짓했다.
“출연에 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완성된 곶감을 방송국으로 가져올 수 있나요?”
“완성되는 대로 가져가겠습니다.”
난 자신 있었다. 사소하게 걸리는 부분이 있었지만 어떻게 풀어갈지 이미 계산이 있었다.
우선 토라진 가희의 마음부터 풀어야 했다.
그녀의 굳은 얼굴이 못 봐줄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