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드디어 마지막 날이 찾아왔다.
새해의 첫날이기도 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네. 뭐 특별한 이벤트 없는 거야?”
임순예 할머니가 날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당연히 있죠. 오늘 저녁엔 학교 운동장에서 삼겹살 파티를 합니다.”
“모두 참석하실 거죠?”
“아. 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늘따라 김꽃님 할머니의 얼굴이 달라 보였다. 화장을 하신 것 같았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늘이 신춘문예 발표 날이었다.
새해 첫날이지만 다들 첫날처럼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속도가 붙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빨랐다.
이제 끝이 보였다. 한 시간 후면 모두 기분 좋게 삼겹살을 먹을 것이다.
그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혹시 여기 김꽃님 할머니 계신가요?”
“누구시죠?”
“한국신문의 배선아라고 합니다. 신춘문예 당선자 인터뷰를 왔습니다. 일을 끝내야 만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저희가 좀 일찍 직접 찾아왔습니다.”
기자가 나에게 명함을 주며 말했다. 신춘문예 당선자라고 모두를 인터뷰하진 않는다. 김꽃님 할머니의 독특한 이력 때문에 이곳까지 찾을 것이다. 글을 처음 배워 신춘문예에 당선되다니 화제성은 충분했다.
“잠시만요. 제가 모셔 올게요.”
그녀의 옆에 사진기자도 함께 있었다. 난 할머니를 조용히 불렀다. 이유를 말하자 얼굴에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모두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난 잠시 사실을 잠시 숨겼다. 곧 있을 삼겹살 파티에 축하 거리로 남겨둘 생각이었다.
“이렇게 불쑥 찾아오다니. 내가 분명 일이 끝나야 시간이 된다고 했거든.”
“괜찮아요. 다녀오세요. 이야기 충분히 나누시고요. 차도 준비해 놨어요.”
“고마워.”
난 기자와 인터뷰 중에 곶감에 대한 이야기를 할 거라고 예상했다.
크든 작든 홍보 효과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나에게도 작은 선물이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건, 기자가 이곳까지 직접 온 일이었다.
배선아 기자가 일찍 왔다고 말할 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이제야 작업이 전부 끝났다. 불량도 거의 없었다. 25만개의 곶감이 완성된 날이다. 이제 숙성작업을 거쳐 완전한 곶감이 될 날만이 남았다.
김꽃님 할머니가 인터뷰를 마치고 날 찾았다.
“미안해. 늦었지. 금방 끝내고 오려고 했는데.”
“아니요. 괜찮아요. 그동안 애써 주신 거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기자가 자네를 좀 보자고 하네.”
“저를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배선아 기자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곶감 농사지으시는 김덕명 씨 맞으시죠?”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네, 제가 김덕명입니다.”
“혹시 시간 되시나요?”
“용건이 뭐죠?”
“인터뷰 좀 하려고요. 가능하신가요?”
“왜 갑자기?”
“청년 농부 김덕명 씨에 대해 호기심이 생겨서요.”
새해 첫날,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청년 농부의 꿈
“저녁 같이 드실래요?”
난 배선아 기자에게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승낙했다. 함께한 사진기자도 좋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 전에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여기자가 나에게 물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창고에 걸린 곶감을 향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사진기자의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돈을 들이지 않고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감이 전부 몇 개나 되나요?”
“25만 개 정도 됩니다.”
“엄청나네요.”
배기자는 어마어마한 수에 감탄한 듯했다. 사진을 다 찍고 우린 학교 운동장으로 이동했다. 동료들과 첫 회식을 했던 장소였다.
마지막 작업에 맞춰 미리 예약을 해두었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부터 고기 굽는 냄새가 코끝에서 진동했다. 마을 잔치가 벌어진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난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도 초대했다.
“식사부터 하시죠?”
난 기자 일행에게 말했다. 곰처럼 덩치가 큰 사진 기자는 못 참겠다는 얼굴이었다. 모두 밥을 먹고 있는 사이, 난 운동장에 있는 작은 연단으로 향했다.
“식사 중에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감 깎는 작업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감을 제공해 주신 마을 분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난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새해 인사기도 했다. 모두 나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냈다.
“한 가지 더 축하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축하란 말에 몇몇 사람들은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김꽃님 할머니 앞으로 나와 주세요.”
할머니가 수줍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때 할머니의 친구분들이 꽃님 할머니의 등을 떠밀었다.
“부끄러워하시네요. 모두 박수 부탁드립니다. 할머니께서 신춘문예 시부분에 당선되셨습니다.”
그제야 이유를 알겠다는 사람들이 환호를 보냈다. 할머니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연단으로 나오셨다.
“한 말씀 하시지요.”
“무슨 말을 하라고.”
“새해 첫날 좋은 선물을 받으셨잖아요. 덕담이라도 한마디 하세요.”
“난 평생 까막눈으로 살았습니다. 시인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런 행운이 찾아온 건, 이 청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때문이라는 말에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배기자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저 청년 때문이라는 게.”
“아 글쎄. 곶감 아르바이트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거든요.”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이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부인 회관 할머니들도 배꼽을 잡고 웃으셨다.
인사가 끝나고 모두 즐거운 얼굴로 음식을 나눠 먹었다.
자리가 무르익자 배기자가 날 찾았다.
“이제 인터뷰할 수 있을까요?”
“그러시죠.”
우린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 기자는 아직 배가 고픈지 인터뷰가 끝난 뒤에 오겠다고 했다.
“신년 특집을 기획하고 있거든요. 김덕명 씨를 취재하고 싶습니다.”
“제가 그럴 만한 소재가 될까요?”
“마을 분들에게서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대단한 청년 농부가 등장했다고.”
“과찬입니다.”
“겸손하시네요. 그럼 인터뷰를 시작할까요?”
그녀는 훈훈한 내용만을 원하지 않았다. 팔릴 이야기를 집요하게 캤다.
특히, 이상고온현상으로 곶감 농사가 망한 것에 주목했다. 그녀는 한 달 전 곶감 농가를 취재한 경험이 있었다. 곶감 농사를 짓는 농부들의 곡소리를 옆에서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가 다 늦게 감을 깎는 이유를 캐물었다. 촉이 있는 여자였다.
난 그녀에게 노트를 보여줬다. 민석에게 보여줬던 그 노트였다.
노트에 이상 기온이 나타날 확률이 높음을 예상한 자료가 있었다.
곶감의 명인 황유신 선생의 제자라고 말하자 그녀의 눈에서 이채가 돌았다.
그럴 만도 했다. 황유신은 대한민국 농업 대상에 빛나는 이름이었다. 제자를 받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황유신 선생만의 비법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난 유황훈증 없이 곶감을 만들었다고 했다. 물론 황유신 선생님의 비법을 묻는 대목에선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 하였다.
배기자는 내 스토리가 팔릴 이야기라고 확신한 것처럼 보였다.
인터뷰 말미에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혹시 꿈이 뭔가요?”
“농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습니다.”
“패러다임이요?”
“대기업에 들어가기보다 농부가 되길 바라는 청년이 많아지길 꿈꿉니다.”
“재미있는 생각이네요.”
“기자님에겐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꿈입니다.”
배기자는 입가에 미소를 물고 대꾸했다.
“후속 보도도 생각하고 있는데, 그때도 응해주실 거죠?”
“물론입니다.”
인터뷰를 끝내자 사진기자가 나타났다. 배가 불러 뒤뚱거리며 셔터를 눌렀다. 온갖 포즈를 취하며 사진까지 찍자 긴 하루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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