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팀원들과 마지막 점검을 했다. 할머니들을 실어나르는 일은 나와 민석과 가희까지 모두 투입돼야 했다.
승합차도 3대를 확보한 상태였다.
“밥은 엄마에게 부탁했는데 가희 너도 좀 도와야 할 거 같아.”
감 껍질을 깎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흘 동안 30인분의 밥을 해야 했다. 농사일은 밥심으로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식사가 중요했다.
아침, 점심, 간식, 저녁까지 하루에 네 끼를 챙기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민석이 틈틈이 식재료를 사다 날라야 했다.
“그럼 내일부터 이렇게 움직이는 거다.”
업무분장을 끝내고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잠자리에 들려는 시간이었다. 문 앞에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덕명아. 자니?”
아버지였다.
“아직이요.”
난 밖으로 나왔다. 아버지는 외출복을 입은 상태였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간만에 하는 부자지간의 면담이었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는 일은 잘돼 가냐?”
“네. 내일부터 감 껍질 깎는 작업에 들어가요.”
“그거 잘 됐구나.”
잘 됐다고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었다.
“아버지 무슨 문제 있으세요?”
“네 말대로 소를 다 처분했다.”
드디어 아버지가 결단을 내린 날이었다. 하루하루 떨어지는 솟값을 보며 그는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힘든 결단하셨어요.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무슨 고생. 그나저나 내일부터면 바쁘겠구나.”
“아버지도 절 좀 도와주세요.”
“당연히 도와야지.”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엄마였다.
“언제부터 거기에 계셨던 거예요?”
“왜 내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한 거야?”
“아니요. 갑자기 나타나셔서 놀랐어요.”
난 웃으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앞치마에 머릿수건까지 두르신 게, 내일 식사를 미리 준비하시는 듯했다.
“당신도 당연히 도울 거죠?”
“알았다고.”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날 밤, 난 오랜만에 깊은 잠이 들었다.
* * *
날이 밝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새벽부터 부산스러웠다.
승합차 세대가 동시에 움직였다. 세 명의 기사가 경적을 울렸다.
“다들 운전 조심하고.”
“너나 조심하세요.”
가희의 말에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할머니들을 일일이 픽업해야 했다. 우리는 마을버스 기사처럼 움직였다. 불편한 시골길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 손주가 운전도 잘하네.”
할머니는 시루떡을 건네며 말했다. 난 할머니들이 건넨 간식을 먹으며 픽업을 완료했다. 작업자들이 곶감 덕장에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창고에 보관했던 감을 전부 꺼내고 있었다. 마을 사람 중에 작업을 돕겠다는 이들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모자, 장갑, 마스크, 앞치마를 준비했어요. 전부 착용해 주세요.”
난 도착하는 작업자들에게 용품을 나눠주었다. 곧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
새벽부터 시작하는 고된 노동이었다. 따뜻한 밥이 뱃속에 들어가야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가희가 밥을 날랐다. 밥상이 차려지기 전까지 나와 민석은 아버지를 도와 감을 꺼내는 작업을 했다.
“밥맛이 아주 꿀맛이야.”
김꽃님 할머니가 하얀 쌀밥을 먹으며 말했다. 곶감 작업장에 모인 사람들이 입에 하얀 김을 뿜어내며 밥을 먹었다.
지리산 흑돼지를 넣은 김치찌개에 시금치나물까지 반찬이 푸짐했다.
밥을 다 먹고, 작업이 시작됐다.
감박피기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작업자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처음엔 비교적 젊은 동네 사람들이 할머니들보다 작업 속도가 빠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할머니의 손은 기계만큼 빨랐다.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기계도 손을 사용해야 했다. 반자동인 것이다.
할머니들 중엔 실제로 기계보다 빠른 사람이 있었다.
“꽃님이 아주 손이 보이질 않아.”
단연 탑은 김꽃님 할머니였다. 작업자들이 덕장에서 감 껍질을 깎는 동안 가희와 어머니는 점심 준비를 했다.
민석은 필요한 식자재를 사러 마트로 갔다.
모두 업무를 분장한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와 아버지는 곶감 걸이를 준비했다. 작업자들이 감을 깎으면 곧장 곶감 걸이에 걸어야 했다. 발효액을 담갔다 거는 만큼 섬세한 일이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발효액 작업에 대해 이미 말씀드렸다. 내가 없어도 아버지 혼자 할 수 있는 수준이 되길 바랐다.
황유신 선생님이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도 곶감을 만드는 법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셨다.
오랫동안 농부로 살아온 이력 때문인지 지금은 숙련자처럼 일했다.
껍질을 벗은 감이 걸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한 줄 한 줄 감을 매달 때마다 가슴 속에 작은 감동이 밀려오기도 했다.
‘모든 이들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일한다.’
곶감을 만들어 돈을 벌 생각 때문에 감동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때문이었다. 모두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오늘 고생하셨습니다. 일당 받아 가세요.”
진심으로 고생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돈이 아깝지 않았다. 하루 종일 군소리 하지 않고 감을 깎고 또 깎았다. 일당 이상의 일을 해주었다.
식사를 담당한 어머니와 가희도 정신없이 재료를 사다 나른 민석도 모두 수고했다.
그날 밤, 나는 자리에 눕자마자 그대로 뻗었다. 모두가 그랬을 것이다.
첫날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