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 (25/205)

시골에서 사람 손을 빌리는 일은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쉬울 때는 모두가 일손을 놓고 놀 때이다. 어려운 때는 각자 일이 많을 때이다.

겨울이라고 해서 예전처럼 농촌은 한가롭지 않았다. 양파 농사를 시작하는 농가가 있었고, 시설 하우스를 돌보는 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연말 모임과 행사가 많을 때였다. 마을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 감을 구매할 수 있었지만 일손을 빌리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마을 사람 중에 작업에 참여할 수 있는 분들은 모두 몇 분이지?”

난 가희에게 물었다. 그녀에게 그 일을 맡겼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손녀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녀에게 그 일을 맡긴 이유였다.

“모두 열 분이 허락하셨어.”

“열 명이라...”

결과를 발표하는 순간은 그녀답지 않게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더 많은 인원을 동원하지 못할 건 자책하는 눈빛이었다.

“그 인원으로 될까?”

눈치도 없는 민석이 나에게 물었다.

“더 알아봐야지. 내가 알아본 곳들이 좀 있어. 우선 다들 차에 타. 가면서 이야기할 테니까.”

난 차에 타며 말했다. 민석과 가희도 쫓아 탔다.

“가희야. 열 명 중에 우리 부모님도 계신 거지?”

“맞아.”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가족들도 포함돼 있었다.

난 대략 30명 정도의 인원을 구상했다. 기한은 사흘을 잡았다. 한 사람당 대략 3,000개를 감을 깎으면 되는 것이다.

10명을 구했으니 앞으로 20명을 더 필요했다.

내가 운전대를 잡고 민석은 보조석에 앉았다. 뒷자리에 앉은 가희의 얼굴이 안 좋아 보였다.

“가희야 고생했어.”

“아니야. 고생은 뭘.”

거울에 비친 그녀의 눈매가 젖어 있었다.

난 그녀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애썼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기에 잘 알고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녀는 바쁘다고 핑계 대는 사람들에게 원망 섞인 말도 했다. 부모님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창밖을 보던 민석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 가는 거야?”

“쇼핑 좀 하려고.”

“쇼핑?”

쇼핑이란 말에 가희의 눈빛이 반짝였다. 죽었다 다시 살아난 사람 같았다. 난 대형 식자재 마트 앞에 차를 세웠다.

“위생모. 마스크. 장갑. 앞치마를 살 거야. 최대한 넉넉하게 사야 해. 개인당 세 개씩은 필요할 거야. 매일 바꿔서 써야 할 테니까.”

난 가희와 민석에게 사야 할 물건 목록을 넘겼다.

그들이 물건을 살 동안 난 농기계상으로 갔다.

감 껍질을 깎을 박피기를 대여하기 위해서였다.

“하루에 대여료가 얼마죠?”

“하루에 오만원입니다.”

싸진 않았다. 하지만 박피기는 무조건 있어야 했다. 기계로 감꼭지만 따줘도 작업이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시간을 줄이는데 기계만 한 것도 없었다.

“박피기가 전부 몇 개 있죠?”

농기계상을 다 뒤져서 총 열 개의 감박피기를 대여했다. 내가 물건을 대여하는 사이 가희와 민석도 구매를 다 끝냈다.

* * *

“기계까지 다 빌리고, 너 일할 분들 다 구한 거야?”

민석이 감박피기를 보며 물었다.

“다들 하시겠다고 했어. 우선 구두로만 약속을 받아 놓은 거지만.”

“맨날 어딜 다니더니. 사람 구하러 다닌 거구나.”

민석의 말에 가희가 날 째려봤다. 속았다고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난 이상기후가 닥치기 전부터 사람들을 물색하고 다녔다.

보육원 원장과도 접촉했고, 심지어 장애인 시설에 있는 사람들과도 만났다.

그러다 오래된 경력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발견했다.

감 껍질 깎는 사람을 구하기 최적의 장소였다.

“하동부인회관.”

가희는 눈을 크게 뜨고 간판을 읽었다. 보통의 노인 회관과 달리 할머니들이 모여계신 곳이었다.

난 미리 준비한 빵과 과자를 꺼냈다. 이곳에 올 때는 한 번도 빈손으로 온 적은 없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우리 손주 왔네.”

회관 안에서 티브이를 보던 할머니들이 날 보자 표정이 달라졌다. 손주 왔다며 환하게 웃었다.

가희와 민석은 할머니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서 뭐해? 이거 좀 도와줘.”

난 가져온 빵과 과자를 접시에 담았다. 그들도 나를 도왔다.

“덕명아, 그거 놔두고 이리 좀 와봐.”

내 이름을 부르는 할머니는 임순예 할머니로 유독 날 예뻐하셨다.

“왜요? 할머니.”

“새로 소개해줄 사람이 있다니까.”

“소개요?”

“꽃님아, 이리 와라. 이 아이가 신기한 재주가 있다니까.”

임순예 할머니는 내 손목을 잡고 소파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할머니가 계셨다.

꽃님이라는 이름은 예명이 아니었다. 김꽃님, 실명이었다.

“난 괜찮대도.”

“언제는 궁금하다며? 왜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거야?”

“내가 언제 그랬다고.”

김꽃님, 그녀는 내가 기다리던 분이셨다.

“속는 셈 치고 한 번 해보기나 해.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했으니까.”

꽃님 할머니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들 해보라는 눈치였다. 할머니는 못 이기는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회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빵과 과자를 먹으며 나와 할머니를 지켜보았다. 가희와 민석도 대열에 합류했다. 모두 호기심에 가득한 눈빛이었다.

“가볍게 생각하세요. 곧 있으면 새해가 밝잖아요. 그저 새해 운세 보신다고 생각하세요.”

“새해 운세라니. 난 그런 것도 처음이야.”

“제가 카드를 놓을 테니 마음에 드는 카드를 한 장씩 뽑아 보세요.”

난 호주머니에서 타로 카드를 꺼냈다. 이것은 할머니들과 가까워질 수 있던 결정적 계기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할머니들이 나를 살갑게 대하진 않았다. 낯선 청년을 부담스러워하시는 분도 계셨다. 부담을 없애고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타로 카드를 준비했다.

할머니들이 고스톱으로 운세를 보는 것에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타로 카드도 한국에 보급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기도 했다. 내가 서양의 신비한 카드 점을 봐주겠다고 하자 할머니들이 관심을 보였다.

매일 다과회를 열고, 타로 점을 봐드렸다. 그 노력에 힘입어 지금의 관계가 될 수 있었다.

내 일이라면 버선발로 나가 돕겠다는 할머니도 생겼다.

김꽃님 할머니는 신중하게 카드를 골랐다.

“다 골랐어요.”

그녀는 내가 시킨 대로 세 장의 카드를 골랐다. 3카드 스프레드 방식이었다. 타로 점의 기본이 되는 기법이었다.

3장의 카드를 이용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타로 기술이었다. 가장 기초적인 방식이었다. 타로를 처음 접하는 상대가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룰이기도 했다.

난 그녀가 선택한 카드를 하나하나 뒤집었다.

“이게 할머니의 과거예요.”

그녀가 처음 뒤집은 은둔자 카드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과거에 힘든 일을 많이 겪으셨어요. 자신이 원하는 걸 한 번도 해보지 못하셨고요. 하지만 가슴 속에 언제나 이루고 싶은 욕망이 있었어요.”

“돌이켜 보니 정말 그랬던 거 같아.”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할머니들의 반응이 좋아서 하는 맛도 있었다.

“현재는 여자황제 카드를 뽑으셨네요. 이 카드로 현재의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있어요.”

“내 현재의 모습이 어떻지?”

“굉장히 노력하고 계세요. 과거에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매일매일 노력하는 게 보여요.”

그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지한 눈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여자 황제 카드는 미래의 카드와 연결돼 있어요. 노력의 결실을 얻을지 말지 다음 카드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미래와 연결돼 있다고?”

마지막 카드를 넘기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난 위대한 점술가가 된 기분이었다.

“이건 무슨 카드지?”

그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운명의 수레바퀴예요.”

“운명의 수레바퀴.”

모두가 내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동부인회관에서 할머니들과 가까워진 것은 감을 깎을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노련한 경력자들을 확보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김꽃님 할머니와의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녀를 과거에 본 적이 있었다. 특이한 이름과 단정한 외모 때문에 더 기억이 났다.

대기업 광고에 출연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늦은 나이에 글을 배운 사람이었다. 그렇게 배운 글로 시를 써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글 쓰는 능력 말고도 다양한 재주가 있는 분이었다. 곶감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될 사람이었다.

나와도 운명의 수레바퀴처럼 엮일 인연이었다.

“새해가 시작되는 첫날, 아주 좋은 소식이 있어요.”

“정말?”

할머니의 얼굴에 잠시 소녀가 스쳤다. 소녀처럼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놀랄 만도 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신춘문예 공모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일이 생기려면 해야 할 일이 있으세요.”

“무슨 일?”

김꽃님 할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든 할 기세였다. 다른 이들도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새해 선물을 만드셔야 할 거 같아요.”

“선물?”

“할머니도 명절에 선물을 주고받으시죠?”

“그렇지.”

“곶감도 선물하시죠?”

“곶감 좋아하지.”

곶감이란 말에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가희와 민석은 내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올해, 이 근방에서 곶감 농사를 짓는 사람이 있어요. 그 농부와 함께 곶감을 만드시면 새해 첫날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그 농부가 누군가?”

회관에 모인 할머니들이 곶감과 농부란 말을 듣고 박장대소했다. 김꽃님 할머니를 빼고 모두가 그 농부를 알고 있었다.

“바로 저예요.”

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신춘문예 마케팅

나를 보는 김꽃님 할머니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말 나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신춘문예 당선자 발표 날 좋은 일이 생긴다는 말만으로도 들떠 있었다.

난 회관에 모인 할머니들을 불렀다.

“할머니들 그때 말씀드렸던, 곶감 아르바이트 기억하시죠?”

“당연히 기억하지.”

“언제든 부르기만 하라고.”

모두 기분 좋은 얼굴로 응하셨다.

“말씀처럼 작업을 당장 시작하려 합니다. 일하기 전에 민감한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민감한 문제는 알바비였다. 시골에서 인건비는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단돈 만원 때문에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뭐 우린 손주가 주는 대로 받아야지 뭐.”

날 친손주처럼 대하는 임순예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마음은 알 수 없었다.

사소하게 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특히 인원이 많을 땐 합의를 이끌어 내야 했다.

“사흘 동안 감을 깎는 일이에요. 하루에 3천개 정도씩 깎아 주셔야 하고요.”

“간식은 뭘 주나?”

“할망구 시작도 전에 먹는 타령이야.”

“그럼 3천개만 깎으면 일찍 가도 되나?”

역시 생각도 못 한 말을 꺼냈다. 할머니들은 보통 일당으로 최소 5만원에서 6만원을 받았다. 이 당시 건설 노동자들에 비해서 적은 액수였다.

“할머니들은 얼마를 원하세요?”

보통은 나처럼 할머니들에게 인건비를 묻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게 관행처럼 굳어져서이다.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둘 필요가 있었다. 곶감 작업 말고 다른 일에도 도움이 될 사람들이었다.

이곳에 와서 안 사실이지만, 그들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농사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었다.

김꽃님 할머니뿐만 아니라 모두가 필요한 인재들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6만원은 받아야지.”

6만원이 최소 단위였다. 경매장처럼 가격이 치솟았다. 최고는 9만원이었다. 시간과 노동 강도를 고려해서 많이 부른다고 부른 가격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동시장에서 가치가 떨어졌음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많은 돈을 받아야 할 경력자들인데 말이다.

“하루에 십만 원씩 어떠세요?”

“그렇게 많이?”

최고로 부른 9만원에 만원 한 장을 더 얹었다. 그들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일당은 매일 매일 끝나는 시간에 드리겠습니다.”

“우린 좋지. 그럼 언제부터 일하는 거지?”

“내일부터입니다. 혹시 시간이 안 되는 분 계신가요?”

아무도 없었다. 모두 한겨울을 보낼 용돈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대략 19명의 할머니가 곶감 작업에 참여하기로 했다. 마을 사람까지 합치면 총 29명이었다. 거기에 나와 민석 그리고 가희까지 더하면 32명이다.

계획했던 인원이 충족됐다.

난 할머니들에게 인사를 하고 부인회관을 나왔다. 가희와 민석이 내 뒤를 따랐다.

“이런 곳을 어떻게 안 거야?”

민석이 차에 타자마자 나에게 물었다.

“이곳저곳 조사 좀 했지.”

“타로 카드는 언제부터 한 거야?”

가희는 타로 카드에 호기심을 보였다.

“취미로 했던 건데,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어.”

“나중에 나도 한 번 봐줘.”

“곶감 작업 끝나면 언제든지.”

그녀는 곶감 작업이란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알바비를 그렇게 많이 줘도 되나?”

“사소한 일에 돈을 아끼면 물건이 나빠진다는 말이 있어.”

“그런 말이 있어?”

민석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가희는 알지? 감 껍질 깎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럼 알다마다. 아직도 그 감각이 손에 남아 있다고.”

그녀는 두 손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했다. 황유신 선생이 곶감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부분도 감 껍질을 깎는 일이었다.

너무 두꺼워도 안 되고 얇아도 안 됐다. 제대로 잘 깎은 감으로 만든 곶감이 최고의 상품이 될 수 있었다.

정성이 들어가야 했다. 대충해서는 최상품의 곶감을 만들 수 없었다.

“너희들이 애써준 덕분에 여윳돈은 충분해.”

“뭐 그러면 다행이고.”

흠집 난 과일을 판 수수료에 내가 가진 돈까지 합해 천만 원이 넘는 예비비가 있었다. 인건비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액수였다.

“그동안 잘 쉬었지?”

“쉬긴 뭘.”

가희가 투덜대듯 말했다. 사람들 섭외하러 다니느라 애썼다는 말투였다. 난 웃으며 넘겼다.

“이제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곶감 작업에 들어갈 거야. 각오 단단히 해.”

“다시 악덕 기업주로 변하는 건가?”

민석의 말에 가희가 맞장구를 쳤다.

‘사흘 안에 끝을 낸다.’

벌써, 12월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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