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나와 민석은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로 향했다.
손에 든 삼겹살과 목살이 묵직했다. 당연히 소주도 빠질 수 없었다.
“하문 초등학교.”
민석이 정문에 있는 명패를 읽었다. 그것은 이곳이 학교였다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지금은 농촌 체험학습장으로 변해 있었다.
안타깝게도 마을엔 초등학교에 다닐 아이들이 없었다.
“빨리도 왔네.”
어둠 속에서 가희가 튀어나왔다. 민석은 그녀를 보자 놀란 듯 얼굴이 굳었다.
“아직 너희들은 인사도 안 했지? 이쪽은 백민석이고.”
“난 정가희.”
그녀는 소개하기도 전에 손부터 내밀었다. 둘이 어색한 인사를 하는 사이, 난 학교 안에 있는 관리소로 들어갔다.
“자네 왔는가?”
마을 회관에서 봤던 백발의 노인의 날 반겼다. 이곳 체험학습장을 운영하는 이춘배 어르신이었다.
처음부터 그를 알았던 건 아니었다. 회식할 장소를 물색하다 알게 된 곳이었다. 간혹 이곳에서 사람들이 바비큐 파티를 하던 걸 목격해서였다.
관리인을 찾아가 물으니 사용료를 내면 얼마든지 써도 좋다고 했다. 그는 그때와 다른 말을 했다.
“돈은 됐네.”
“받으세요.”
“자네 같은 사람에게 돈을 받을 순 없지.”
“저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을 바꿀 사람이지.”
“그럼 더 잘 받으셔야죠. 공짜에 익숙해지지 않게.”
난 그에게 돈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의 말을 듣자 정말 마을을 얻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가까이 있는 사람을 더 챙겨야 한다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나의 왼팔과 오른팔이 될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 가희는 민석에 이런저런 말을 붙이는 것 같았다. 민석은 고양이 앞에 생쥐처럼 꼼짝도 못 했다.
여자 앞에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고 있을 거야? 먹을 준비 안 하고.”
난 장난치듯 그들에게 말했다.
“어, 불 켜졌다.”
가희가 아이처럼 소리쳤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불이 들어왔다. 불이 켜진 곳 바로 밑에 커다란 바비큐장이 있었다.
평일 저녁이라 아무도 없었다. 우리 셋뿐이었다.
“어렸을 적엔 운동장이 커 보였는데, 커서 보니 정말 작다.”
“그러게. 오랜만에 추억 돋는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좋지.”
내가 그릴에 고기를 올리는 사이 가희는 상추를 씻었다.
지글지글. 쫘르르.
고기 굽는 소리에 군침이 돌았다.
“한잔 마시자.”
난 술잔을 들며 외쳤다.
“모두 고마워. 나와 함께 해줘서.”
“난 정식으로 같이 한다는 말도 안 했는데.”
가희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녀의 말이 맞긴 했다. 오늘이 확답을 받는 날이었다.
“그럼 지금 대답해줘.”
그녀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민석이 사이트를 담당하고 가희는 배송 쪽을 담당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녀가 거절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좋아. 나도 함께할게.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말해봐.”
“기회가 되면 내가 원하는 농사를 짓게 해줘.”
“어떤 농사?”
의외의 답변에 조금 놀랐다. 그녀가 원하는 농사가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건 나중에 말할게. 기회가 될 때.”
“좋아. 받아들일게.”
그녀는 만족했다는 뜻으로 특유의 보조개를 보였다.
난 민석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도 할 말이 있는지 궁금했다.
오늘 같은 날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털어놔야 했다.
“민석아, 너도 가희처럼 할 말 있어? 원하는 거 뭐든 말해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약속한 대로 자유를 줘.”
“자유?”
“자고 싶을 때 잠잘 자유. 먹고 싶을 때 먹을 자유. 싸고 싶을 때 쌀 자유. 최소한의 자유를 보장해줘.”
“그래. 당연하지.”
가희가 민석의 말에 깔깔거리며 박장대소했다. 난 술잔을 높이 들었다.
“지리산 농부들 그 시작을 위하여.”
술이 한 잔 두 잔 넘어갔다. 두 사람을 얻은 게 마을을 얻은 것보다 더 기뻤다.
“곶감 농사가 끝나기 전까지 월급은 없다.”
“이 사악한 악독 업주야.”
가희는 취했는지 혀끝이 고부라졌다.
계획대로 된다면 곶감 농사가 끝나면 다달이 월급을 줄 생각이었다. 지금은 회계가 없지만, 때가 되면 회계 일을 할 사람도 구할 작정이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첫 번째 회식이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됐다.
최근 들어 가장 편안한 저녁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