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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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중에 아버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과수원집 정길산이가 네 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더라.”

“제 이야기요?”

엄마도 숟가락을 놓고 아버지의 말에 집중했다.

“네가 우리 마을을 이끌 사람이라고 떠들고 다닌다더라.”

“제가요?”

“그뿐만이 아니야. 네가 농촌을 이끌 지도자라는 말까지 하고 다닌다고.”

“그 양반이 우리 아들을 제대로 봤네요.”

조용히 말을 듣고 있던 엄마가 갑자기 나섰다.

난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는 어른이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했다. 어쩌면 지금이 나에게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판을 더 키워야 했다.

“아버지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이냐?”

“우리 마을에서 과수원 하시는 분들 전부 모셨으면 해요.”

“전부 말이냐? 뭘 하려고?”

“모두에게 좋은 일 좀 하려고요.”

아버지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러겠다고 하셨다. 이제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사흘 후, 마을 회관에 사람들이 모였다. 과수원을 운영하는 사람 말고도 동네 사람들이 전부 모인 것 같았다.

내가 등장하자 마을 회관이 술렁거렸다.

다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나에겐 그들의 신뢰를 얻을 계획이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

“저는 농부입니다.”

그들은 날 그저 농부의 자식으로만 알고 있었다. 나도 그들과 똑같은 농부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어르신들과 같은 경험은 없지만, 저에겐 세상을 읽는 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 말에 경청했다. 정길산을 통해 내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눈빛이 다들 진지했다.

“한 가지만 묻죠. 농사를 짓는 게 어렵습니까? 아니면 농산물을 파는 게 어렵습니까?”

“다 어렵지.”

“아니야. 파는 게 더 어려워.”

여기저기서 답변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 파는 게 더 어렵다고 호소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삶이 되어버린 농사야 힘들어도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판매는 다른 영역이었다. 중간 상인의 횡포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저는 마을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어르신들이 생산한 물건들을 제값을 받고 팔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마을 회관이 술렁였다.

“저게 무슨 소리야?”

“젊은 놈이 허풍이 심한 거 아니야?”

“정길산이 저놈은 믿어도 된다고 했다니까.”

난 주변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모두 동요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뜨거운 이슈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그때 백발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조용히 좀 해 봐! 저 청년이 하는 이야기 좀 들어보고 싶으니까.”

그의 말에 모두 입을 닫았다. 반짝이는 눈빛들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기운이 샘솟았다.

“말해보게. 그 방법이 뭐지?”

“제가 대신 팔아드리겠습니다.”

“어디서 판다는 건가?”

“저의 쇼핑몰입니다.”

“쇼핑몰?”

인터넷도 구경하지 못한 사람들이 쇼핑몰을 알 리가 없었다.

난 대기하고 있던 민석에게 신호를 보냈다.

“프로젝터 좀 켜줄래?”

미리 프로젝터를 준비했다.

“이곳이 제가 물건을 파는 곳입니다.”

시골 촌사람이고 바보는 아니었다. 다만 새로운 문물에 낯설어할 뿐이다. 쉽게만 알려준다면 못 알아들을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컴퓨터 안에 시장이 있는 거구만.”

백발의 노인이 이해했다는 얼굴로 말했다.

“맞습니다. 어르신.”

마을 사람들은 신기한 듯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응은 다양했다. 대부분 긍정적이었다.

쇼핑몰에 직접 쓴 소비자들의 생생한 리뷰 덕분이었다.

“이건 소비자들이 직접 쓴 글입니다.”

“그럼 우리 집 과일도 팔아 줄 수 있나?”

“팔아 드리겠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물건을 팔아달라고 아우성쳤다.

뜬금없는 물건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과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건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정중히 거절했다.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농부입니다. 중간 상인이 될 생각으로 이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수수료는 10% 받겠습니다.”

“그 정도 조건이면 우리도 환영일세.”

그때 백발의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처음부터 나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노인이었다.

“말씀하시죠?”

“그런데 자넨 무슨 농사를 지을 생각인가?”

“조만간 곶감 농사를 지을 생각입니다.”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부모님이 보인 반응과 같았다.

“대봉감으로 만든 곶감입니다. 올해 제가 처음으로 짓는 농사가 되겠죠.”

“좋은 생각인지 모르겠네.”

곶감의 명인 황유신에 배운 사실이며 내가 아는 모든 정보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난 그 말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동 하면 대봉감입니다. 누구도 곶감으로 만들지 못했죠. 그 일을 청년 농부인 제가 시작합니다.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대봉감 필요하면 말만 하게.”

너 나 할 거 없이 감을 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거저는 아니었지만, 구두로 신용거래를 마친 느낌이었다.

난 마을 사람들에게 농사를 짓겠다고 공표했다. 누구도 나한테 유난을 떤다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필요한 것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얻을 수 있었다.

이건 단순히 물건을 얻은 일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신뢰를 얻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한 번 얻은 신뢰는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다.

마을 사람 모두가 내 동료가 된다면 무서울 게 없었다. 농사는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는 일이었다. 사람이 재산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하는 동료들입니다.”

난 노트북을 만지고 있던 민석에게 손짓했다. 녀석은 손사래를 쳤지만, 내 눈빛을 보고 마지못해 나왔다.

“가희, 너도 나와.”

가희는 아버지 정길산 옆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내가 이름을 부르자 평소와 달리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게 변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에 못 이겨 나오고 말았다.

“저와 함께 하는 친구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난 두 친구의 손을 잡고 사람들에게 목례를 했다.

박수 소리가 귓가에서 오랫동안 맴돌았다.

기분이 좋았다.

축하주가 필요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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