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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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명이 서울로 올라간 사이, 정길산의 집은 냉랭한 분위가 감돌았다. 상주에서 돌아온 막내딸 정가희 때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손주를 돌보기 위해 서울에서 지내고 있었다. 넓은 집안에 아버지와 막내딸만이 어색한 표정으로 저녁을 먹었다.

부녀지간엔 사이가 틀어진 건, 그녀가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한 후부터였다. 정길산은 내심 그녀가 소설가가 되길 바랐다.

정가희는 밥을 먹다 입을 열었다.

“아버지 덕명이랑 약속하셨다면 서요?”

“그 녀석이 너에게도 이야기했냐?”

“그게 중요한가요? 그리고 저 때문에 화가 난 걸 왜 다른 사람에게 푸세요?”

“난 녀석에게 화풀이하지 않았어. 거래를 했을 뿐이지.”

그는 정당한 거래를 했다고 여겼다. 거래를 제의한 것은 다름 아닌 김덕명이기도 했다.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김덕명이 과수원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약속을 이행할 마음이었다.

“그럼 약속은 꼭 지키세요. 아버지가 말한 거래에 대한 약속이요.”

정길산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김덕명이 딸에게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약속을 지키마. 그런데 넌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

“당분간 여기에 있을 생각이에요.”

“여기서 뭘 할 생각이냐?”

그녀는 침묵했다.

마음 한구석으로 김덕명과 함께 일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 * *

난 민석과 함께 하동으로 가는 버스에 탔다. 버스 안에서 어제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을 설명했다.

당장 사이트를 구축하는 일부터 꺼냈다. 작은 쇼핑몰을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 당시 기준으론 만만치 않은 스펙이었다.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의욕에 찬 눈빛이었다. 그는 하나를 말하면 둘셋을 동시에 알아들었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파트너와 일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선 정길산 과수원의 흠집 난 과일부터 팔아야 했다. 최대한 빨리 사이트가 나와야 했다.

그에게 사이트 구축에 따른 기한을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뭘 원하는지에 따라 달라지지?”

“그게 무슨 소리지?”

“처음부터 완벽한 기능을 구현할지. 최소한으로 할지.”

“우선은 최소한으로.”

사이트의 특성상 끊임없이 유지보수를 해야 했다. 꼭 필요한 기능만 붙이고, 오픈을 해도 상관없었다.

“오케이. 접수했어.”

시골집에 도착하자마자 쇼핑몰 구축 작업이 시작됐다.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는 자식을 위해 최대한 배려해 주셨다.

밤늦은 시간에도 어머니는 밥을 챙겨주셨다.

“밥 안 먹을 거야?”

“잠시만요. 이것만 끝내고요.”

잠시가 새벽이 다 되도 끝나지 않았다.

새벽에 밥을 먹고 쪽잠을 자는 게 일상이 돼버렸다.

“네가 사이트 구축하는 동안, 내가 디자인 작업을 해 놓을게.”

“그런데 이게 자유야?”

민석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잠잘 시간도 안 주는 게 자유냐고? 완전 노예지.”

“이해해줘. 자유를 갖기 전에 할 일이 좀 있어서 그런 거니까.”

“김덕명, 좀 변한지 알았는데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똑같아.”

투정을 부렸지만 민석은 열심히 일했다. 그가 사이트를 구축할 동안 나에게도 할 일이 많았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키워드 작업도 해야 했다.

아직 국내 1등 포털 사이트에 키워드 광고 개념이 없을 때였다. 검색창에 특정 단어를 검색하면 나오는 게 신기한 수준이었다.

그 신기하고 놀라운 작업을 난 쉬지도 않고 했다. 과수원에서 팔 과수의 사진을 찍고 인터넷에 올리는 작업을 했다.

이제 검색어로 흠집이 난 과일을 검색하면 잡히는 수준이었다. 과일을 싸게 사는 법을 검색해도 내가 만든 정보들이 잡혔다.

아직 사이트도 오픈 전이었다. 우선 시험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올려 주신 흠집 난 사과를 구매할 의사가 있습니다.

과일을 판매한다는 내용을 쓰지도 않았다. 내용만 보고 구매 의사를 밝힌 것이다.

이제 사이트를 오픈해야 할 순간이었다.

곧 추석이 다가오고 있었다.

신뢰를 얻다

“이제 사이트는 언제든지 오픈 가능해.”

“그럼 디데이를 오늘 저녁으로 하자.”

민석의 얼굴에 다크서클이 짙었다. 나 역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하루에 세 시간 정도 잠을 잔 것 같다.

우린 도착한 날부터 보름이 넘게 밤샘 작업을 했다.

-지리산 농부님, 흠집 사과 구매 요망합니다.

-지리산 농부님, 흠집 배 구매 요망합니다.

블로그에 댓글이 쇄도하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반응이 좋을지 몰랐다. 작은 흠결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만큼 제철 과일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간의 심리는 다양하다. 모든 사람이 보기 좋은 상처 하나 없는 과일을 원하진 않았다. 비록 흠집이 있지만 다른 문제가 없고, 가격이 저렴하다면 선택하는 이들이 있었다.

때론 그 다양성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기도 한다.

난 흠집 과일이라는 새로운 틈새시장을 개척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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